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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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사물의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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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31.

 

사물의 중력: 존재지도학 입문

The Gravity of Things: An Introduction to onto-Cartography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1916년에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안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중력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뉴턴은 중력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발견했었지만, 중력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전적으로 불가사의했다. 사실상, 뉴턴적 틀 내에서는 중력이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해 도대체 질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뉴턴 이론이 행성, 유성, 위성 등의 움직임에 관해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뉴턴 이론 덕분에 포탄을 원하는 곳에 보낼 수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중력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객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은, 이제 객체들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게 해 주는 이런 단순한 방정식들, 이런 소수의 문자들과 기호들에 의해 유발되는 새로운 예측 가능성의 행복감 속에서 무시되었다.

 

문제는 단순했다. 자연주의적이고 유물론적 사유는 두 존재자 사이에 인과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려면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다. 어떤 식으로든 한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접촉해야 한다. 로마 엘리트와 기독교 교회에 의해 거의 파괴되었던 걸작에서 위대한 로마 시인-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이 원리를 발설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이런 원리일 것이다. 아무것도 결코 무(無)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의 테제는,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에 영향을 미치려면 그 두 존재자 사이에 실재적인 물질적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리로 그는 모든 미신에 이의를 제기했고 원인들에 관한 엄밀한 학문의 가능성을 끄집어내었다. 루크레티우스의 첫번째 공리가 모든 미신에게 저주였다면, 이것은 그것이 마술 또는 원격작용이라는 관념의 기반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루크레티우스적 틀 내에서는 당사자가 부재할 때 그 사람에게 건 주문 또는 저주는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을 것인데, 마법사의 주문과 그 사람 사이에 물질적 상호작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길에서 금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바로 루크레티우스의 첫번째 공리 같은 테제에 근거하여 생각했을 때, 뉴턴의 중력 이론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길에서 금을 밟으면 재수가 없다는 생각과 같은 터무니 없는 믿음처럼 뉴턴의 중력은 비술인 듯 보였다. 달과 해가 조수의 원인이라는 뉴턴의 테제는 멀리 떨어진 기도자가 아무튼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과 도대체 어떻게 다른가? 한 존재자가 이런저런 식으로 다른 한 존재자와 접촉하지 않은 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뉴턴주의자들은 중력을 설명하기 위해 힘이라는 개념에 호소했지만, 한 사물이 멀리 떨어져서 다른 한 사물에 어떻게 힘을 행사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한에 있어서, 힘이 어떻게 비술 또는 마술적 작용이 결코 아닐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와 접촉하지 않은 채 어떻게 그 존재자에 작용할 수 있는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대단한 혁명적인 도약을 이루었던 것은 이 같은 의문들의 맥락에서였다. 뉴턴과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도 중력에 대한 메커니즘―이제 겨우 힉스 보존의 발견을 통해 중력의 메커니즘이 밝혀지기 시작하고 있다―을 여전히 제공하지 않았지만, 그는 중력을 힘이라는 개념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중력 현상의 탈신비화를 향해 멀리 나아갔다. 사실상 아인슈타인이 증명한 것은 중력이 결코 힘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들의 질량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공간의 곡률이다. 아인슈타인적 틀 내에서 중력은 다른 객체들을 끌어당기고 밀치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객체들의 질량이 어떻게 시공간을 휘게 하는지의 결과이다. 달이 지구 주위로 궤도 운동을 하는 까닭은 달이 지구로부터 끌리기도 하고 동시에 밀쳐지기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의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하여 달이 직선, 즉 곡선의 표면을 따라 똑바른 선을 따라 움직일 때 따르는 경로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각화하기 위해서 칸탈루프 한 개가 놓여 있는 침대 시트를 상상하자. 칸탈루프는 시트의 표면을 휘게 하는데, 만약 오렌지 한 개가 그 곡률의 장에 놓여지면 그것은 시트를 따라 구를 때 그 경로를 좇을 것이다. 중력은 힘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객체들이 움직일 때 따르는 하나의 장 또는 토폴로지이다.

 

기계지향 존재론(machine-oriented ontology, MOO)[브라이언트 판본의 객체지향 존재론(OOO)]의 틀 내에서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두 가지 이유 떄문에 가장 중요하다. 첫째,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존재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주어진 용기로서 존재자들과 무관한 환경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달리 말해서, 시공간은 존재자들이 포함되어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오히려, 시공간은 객체들 또는 기계들의 덩어리로부터 발생한다. 시공간은 선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물들로부터 발생한다. 둘째,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균질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척도는 모든 곳에서 같지는 않다. 오히려, 시공간은 지역마다 상이한 모든 종류의 혹, 수축, 팽창, 그리고 곡률들을 갖는다. 매우 강하게 휘어서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빠져 나갈 수 없으며 사실상 그것들을 다른 시공간들과 격리된 자족적인 시공간으로 만드는 시공간―블랙홀―들도 존재한다. 아인슈타인의 테제는 시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시공간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력은 끌어당김과 밀침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시공간 경로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경로들은 생성의 경로이자 운동의 경로이다. 경로들은 객체들이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움직일 때 그리고 발달하거나 생성할 때 따라야 하는 그런 벡터들이다.

 

내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과 중력 이론으로 시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존재지도학의 기본적인 이론적 주장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존재지도학은 서로 상호작용할 때의 객체들의 시공간에 관한 이론이자 이런 상호작용들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방법이다. 확실히, 여기서 내가 사용하는 대로의 "중력"은 그것들을 따라 존재자들이 움직이고 생성되는 시공간적 관계들이나 경로들을 사물들과 기호들이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주의를 끌기 위해 선택된 하나의 은유―또는 더 낙관적으로 그 낱말에 대한 들뢰즈적 의미에서 하나의 철학적 개념―이다. 현재 존재하고 있는 이론 안에서 더 친숙한 견지에서는 "중력"을 "힘" 또는 "능력"으로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힘이라기보다 중력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선택했다면, 이것은 철학과 이론의 세계에서 힘이라는 개념이 너무나 인간중심적인 것이 되어버려서 즉각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주권자들, 계급 권력, 상징 권력, 그리고 미시 권력과 생명 권력 같은 것에 주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마르크스, 푸코, 그리고 부르디외에서 발견되는 형식들과 같은 분석 형식들을 버리고 싶지 않는 반면에, 교육과 연구의 층위 둘 다에서 인문학을 수용하는 기관들 내부에서 이런 인류학적 함의들이 퇴적되어온 방식―그것 자체가 일종의 중력이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의도와 의미들을 투사하는 텅 빈 화면 이상의 것으로서 힘을 행사하는 비인간적인 것들을 상상하기 어렵게 만들어버렸다. 스테이시 알레이모(Stacy Alaimo)가 서술했듯이, "물질, 즉 세계와 우리 자신들의 방대한 재료는 관리할 수 있는 '조각들'로 분해되거나, 또는 인간의 기록을 위한 '빈 서판'으로 납작하게 되어버렸다." 틀림없이, 현대 비판 이론 또는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의 지배적 경향은 비인간적 존재자들을 인간들이 의미들을 투사하는 빈 서판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비인간들이 사회적 조립체들에 기여하는 차이점들에 어떤 진지한 주의도 집중되지 않은 채, 사물들은 인간 권력과 의미의 단순한 나르개 또는 탈것으로 환원된다. 기호학적으로 추동되는 더 전통적인 비판적 분석 형식들이 우리의 사회적 세계들이 왜 현재의 모습으로 조직화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고 믿고 있는 한, 나는 그것들을 버리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는 반면에, "중력"이라는 술어가 낡은 친숙한 사유 습관과 단절하고, 대부분 현대 이론의 핵심에 놓여 있는 어떤 맹목을 극복하고, 사회적 관계들이 왜 현재의 형식을 띠는지에 관한 더 풍성한 이해를 제공하며, 그래서 우리의 정치적 개입의 가능성을 확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낯설 것이라는 점이 내 희망이다.

 

"존재지도학"의 "존재(onto)"는 그리스어 온토스(οντοζ)에서 비롯된 "존재자적(ontic)"이라는 낱말을 가리키며, 물질적으로 현존하는 존재자, 실체, 또는 객체들을 나타낸다. 물론, "존재지도학"은 지도를 구성하거나 그리는 실천이다. 그러므로 존재지도학은 하나의 장, 상황, 또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사물들과 기호들―의 지도 또는 도표일 것이다. 내게 "상황" 또는 "세계"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존재자들과 기호들의 질서정연한 집합을 의미한다. 세계 또는 상황은 자체의 내부에서 외재적으로 관계를 맺은 존재자들 및 기호들과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존재자들 및 기호들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존재지도학은 공간의 지도 또는 지리가 아니라―어떤 주어진 상황이나 장 속의 "사물들과 기호들의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고, 존재지도학이 항상 지리학적으로 상황지워져 있는 한 그것이 이 기획에 대한 지리학의 엄청난 적절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오히려 사물들 또는 내가 기계라고 부르는 것들의 지도이다. 특히, 존재지도학은 사물들과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적 중력 장들과 이런 장들이 운동과 생성의 가능성들을 제약하고 제공하는 방식들에 관한 지도이다.

 

그런데 무슨 목적을 향해서? 존재지도학을 수행할 때 우리는 단지 존재하는 사물들과 기호들의 목록을 만들고 있는 것인가? 목록은 어떤 상황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의 일람표일 뿐 아직 지도 또는 지도학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가 지도학으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사물들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목록으로 작성하기보다는 사물들이 어떻게 분포되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특히, 존재지도학의 중심 테제는 시공간이 사물들과 기호들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지도학은 사물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에서 비롯되는 시공간 경로들, 중력 장들의 지도를 그리는 실천이다. 이 기획에 중요한 것은 사물들과 기호들이 다른 존재자들의 운동과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력을 만들어낸다는 인식이다. 물론, 이 중력은 물리학자들의 중력이 아니라―그것은 그런 종류의 중력도 포함할 것이지만―모든 존재자들의 운동과 생성에 영향을 미치는 훨씬 더 폭넓은 유형의 중력이다. 아인슈타인과 함께, 존재지도학은 사물들과 기호들의 중력이 존재자들에게 운동과 생성의 어떤 가능성들을 제공하고 그들의 운동과 생성의 가능성들을 제약하는 시공간적 경로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아인슈타인과 함께, 존재지도학은 모든 존재자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시공간이 존재한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어떤 환경 또는 상황 속에 있는 존재자들이 행사하는 중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시공간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존재지도학"이라는 술어는 새로울 것이지만, 존재지도학적 이론과 탐구의 여러 조각들은 꽤 오랫동안 주변에 존재했다. 라투르가 "잃어버린 질량들은 어디에 있는가(Where are the Missing Masses)"를 쓰면서 우리가 사회에서 발견하는 많은 규칙적인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문의 경첩과 과속방지턱 같은 비인간들을 참조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세계에 대한 존재지도학적 분석이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거기서 라투르는 세계의 비인간들이 다양한 기술 형식으로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행동하게 하거나 또는 그것들이 없을 때는 일반적으로 좇지 않을 어떤 경로들을 좇게 하는지 보여준다. 요약하면, 그는 이런 비인간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어떤 중력을 행사하여 우리로 하여금 운동과 생성의 어떤 경로들을 좇게 하는지 보여준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제1권에서 역사가 브로델(Braudel)은 특수한 시점에 특수한 인간 집단이 물려받은 습관 및 당대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정의되는 "가능한 것들의 일람표"를 작성하기를 제안합니다. 브로델이 서술하듯이,

 

인간 생활의 전체를 제한하고 포괄하는 다소 넓은 경계, 도달하기가 늘 어려우며 넘어서기란 더욱 어려운 한계, 말하자면 일종의 천장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현시대를 포함하여 각 시대마다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 다시 설명하면 노력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도달할 수는 있는 것과, 인간에게 아예 거부된 채 남아 있는 것 사이에 한계가 그어져 있었다. 과거에는 식량이 불충분했고, 가용자원에 비해 인구가 너무 적었거나 혹은 너무 많았으며, 인간의 노동 생산성이 낮았고, 또 자연에 대한 정복이 겨우 시작된 단계였다는 것 등이 불가능의 영역이 존재하는 원인이었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주경철 옮김, 까치, 1995), p. 17에서 인용]

 

여기서 브로델이 언급하는 가능한 것들의 일람표는, 예를 들면, 콰인(Quine)의 방식을 좇아서 빈 출입구에 가능한 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지 또는 돼지가 날 수 있는지 여부를 궁금해 하는 논리적 또는 형식적 가능성의 일람표가 아니라, 물질적 가능성의 일람표이다. 물질적 가능성은, 입수 가능한 자원, 현존하는 기술들, 그 환경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의 특성들 등의 견지에서 그 환경의 물질적 조직화를 고려했을 때 어떤 특수한 환경이나 상황에서 정말로 가능한 것으로 이루어진다. 브로델이 알고 싶은 것은 어떤 특수한 역사적 환경 또는 상황에서 물질적으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이다.

 

물질적 가능성의 이런 구조들을 이해하기 위해, 15세기에 존재했던 대로의 쾰른이라는 도시의 사례를 들자. 브로델은, 인구가 20,000명인 쾰른이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도시는 왜 이 크기를 넘어서 팽창할 수 없었는가? 브로델이 언급하듯이, 이 인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칸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양떼, 이집트의 쌀, 콩, 밀, 흑해 연안의 밀과 목재, 소아시아의 소, 낙타, 말이 필요했으며, 또 그 인구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터키 제국의 모든 가용한 인적 자원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해서 타타르 인들이 러시아에서 포로로 잡은 노예[...]나 터키 함대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끌어[온] 노예들이 필요했다. [페르낭 브로델,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1>>(주경철 옮김, 까치, 1995), p. 55에서 인용]

 

도시는 단순히 하나의 존재자, 저곳에 자리잡은 사물이 아니라, 오히려 자체에 속하는 요소들(시민, 직업, 사회적 질서, 건물, 재화 등)을 어떻게 생산하고 유지하는지에 관한 문제와 자체 내에서 발생하는 과정들이나 활동들을 통해서 자체에서 비롯되는 사물들도 어떻게 생산하는지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는 기계 또는 유기체이다. 정확히, 도시는 자체를 통과하는 에너지의 흐름을 통해서만 자체의 조직 또는 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소산 구조(dissipative structure)"이다. 15세기의 쾰른이 자체의 현존을 유지하고 엔트로피 또는 해체를 피하기 위해서는, 나무 형태로 건물과 연료에 쓰이는 에너지의 흐름, 자체의 인구를 지속하는 데 요구되는 모든 종류의 식품(모든 인간 육체, 직업, 그리고 사회적 집단화가 가능하려면 일정량의 칼로리가 필요하다), 도시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 기타 등등이 필요했다. 결국, 이런 것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농경 기술, 식품과 다른 재화의 수송을 가능하게 할 농촌 지역과 여타 도시들을 잇는 도로들의 존재 또는 부재, 현존하는 해양 기술과 선박의 적하량, 식품 보존을 가능하게 하는 현존하는 저장 기술, 질병과 전염병을 방지하는 의료 기술과 하수 기술,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들 사이의 통신의 가능성, 노동 자원을 제공하는 주변 지역의 인구 밀도, 그리고 다수의 다른 것들에 의존했다. 우리는 필요한 이런 요소들 전체를 "하부구조(infrastructure)"라고 부를 수 있다. 15세기 동안 쾰른이라는 도시가 취했던 형식의 유일한 이유는 아닐지라도, 역사적으로 특정한 이런 하부구조가 모든 종류의 방식들로 그 도시의 가능한 것들을 제공하고 제약했다.

 

15세기의 쾰른이 묻어 들어가 있었던 하부구조는 그것들을 따라 생성과 운동이 구조화되는 시공간 경로들을 규정하는 거대한 중력장을 형성했다. 이것을 예시하기 위해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현존하는 저장 및 보존 기술은 육상으로 또는 해상으로 그 도시에 운송할 수 있는 식량의 종류들 뿐 아니라 그 도시의 인구에 제공할 식량의 가능한 저장량과 저장할 수 있는 식량의 종류들을 제한한다. 시간적 층위에서, 이것은 그 도시 사람들의 건강과 발달뿐 아니라 그 도시가 이를 수 있는 크기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한편으로, 그 도시는 그 만큼만 충족시킬 식량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인구 밀도 또는 크기에만 이를 수 있었다. 시골은 그 도시의 시민들을 부양할 만큼만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자체적으로 그 식량을 생산할 필연적으로 거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개간과 살충제 형태의 현존하는 농경 기술과 현존하는 운송 기술뿐 아니라 현존하는 식량 저장 및 보존 기술과 더불어 식량의 특성들이, 식량이 상하여 쓸모 없게 되지 않으려면, 식량 자원이 오직 어떤 특정한 거리만큼 떨어진 곳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특수한 종류들만 운송될 수 있다는 점을 보증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는 겨울철 오렌지가 얼마나 사치품인지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물론, 일시적으로 이것은, 인간 신체들의 발달이 계절적으로 입수할 수 있는 것에 의존했고, 이런 환경에서는 식량이 다른 모든 곳에서 운송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체 발달이 가뭄과 살충제의 참화에 대단히 민감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체들의 건강, 그것들이 발달하는 방식, 장수 등에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었다. 즉, 이런 것들은 신체들의 생성 또는 그것들의 질적인 특성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박물관에서 프랑스와 미국의 혁명군 병사들의 군복들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얼마나 작은지 깨닫고서는 놀래곤 한다. 인간들은 키가 큰 거인들로 진화되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바뀐 것은 인간들의 유전자가 아니라, 식물, 우유, 단백질 등과 같은 영양분들을 일년 내내 풍부하게 입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변화들은 농경 기술, 운송 기술, 저장 및 보존 기술, 그리고 심지어 통신 기술이 바뀐 결과로서 가능해졌다. 통신 기술이 매우 중추적인 것으로 판명된다면, 이것은 이 지역 또는 저 지역에서 어떤 식재료가 필요한지 서로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다른 지역들이 소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도로가 없는 세계의 지역들을 가로질러 말을 탄 배달원에 의해 전달되는 통신에서 위성 기술에 의한 통신으로의 전환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종류의 차이인데, 사회적 관계들과 일단의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흔히 강조되듯이, 이제는 관념들이 훨씬 더 빨리 그리고 널리 순환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이한 기후 지역들 사이의 큰 차이점들을 가로질러 특수한 식량들에 대한 요구를 전달하는 일 같은 단순한 것들이 가능해졌다. 입수할 수 있는 식량의 이런 변화가 그저 물리적 신체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루나 이틀 동안 먹지 않고 지내거나 또는 한 종류의 음식만 먹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먹는지와 우리가 먹는지 여부가 여하튼 우리의 감정뿐 아니라 우리의 인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근은 신체적 건강을 파괴할 뿐 아니라, 어떤 사회적 질서에도 파국적일 수 있는 특수한 종류의 감정적 상태들과 사회적 관계들을 유발한다.

 

이것들은 모두 기호들이 아니라, 의미작용의 차이점들이 아니라, 사물들 자체의 특성들―농경 기술과 사용되는 도구들의 특성들, 물의 특성들, 곡물과 동물의 특성들, 통신 기술의 특성들, 쓰레기와 미생물의 특성들, 배와 말의 특성들, 기타 등등―이 기여하는 차이점들이다. 일단 우리가 사물들의 이런 힘, 즉 그것들이 시간과 공간을 구부리거나 휘게 하는 방식을 식별하기 시작하면, 도처에서 존재지도학적 이론에 기여하는 것들을 식별할 수 있다. 매체는 인간들의 연장이라는 매클루언(McLuhan)의 테제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사실상 우리는 존재지도학이란 매클루언의 전통에 있어서의 매체 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앤디 클라크(Andy Clark)의 연장된 마음 가설에서 그것을 보는데, 그 가설에 따르면, 마음은 머리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육체, 뇌,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계를 항해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 사이의 관계이다. 다양한 통신 기술들이 사회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변형시키는 방식에 대한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분석에서 우리는 존재지도학의 이론적 요소들을 본다. 글쓰기가 인지의 본성을 어떻게 변형시켜 수학과 "보편적" 법칙 같은 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월터 옹(Walter ong)의 분석에서 우리는 다른 요소들을 본다. 데란다(DeLanda)가 제시한, 사회에 대한 조립체 이론과 세계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공장과 견고한 기계들이 직장 생활과 노동자들의 육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실천적 타성태(the practico-inert)가 사람들의 생활을 구조화하는 그것 자체의 삶을 어떻게 나타내는지에 대한 샤르트르의 분석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초육체성(trans-corporeality) 또는 육체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에 대한 스테이시 알레이모의 설명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어떤 행위자의 의도, 의미, 믿음, 또는 생각에 관계 없이 한 통의 편지가 사회적 연결망 속에서의 그 행위자의 위치를 결정하는 포(Poe)의 "도둑맞은 편지(The Purloined Letter)"에 대한 라캉의 분석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여기에도 중력, 기호와 텍스트들에 의해 행사되는 중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기호적 존재자인 부채와 그것이 삶과 사회적 관계들을 어떻게 구조화하는지에 대한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분석에서 우리는 그것을 본다. 또한 우리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에서 그런 이론의 요소들을 보는데, 그 책에서는 젠더가 인간 육체들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담론들에 바탕을 둔 인간 육체들의 수행의 결과라고 주장된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이론의 요소들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하나의 통일 이론이다.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이런 발견들을 일반 이론에 기여하는 것들이라기보다 대립하는 것들로, 해석상 충돌하는 것들로 위치시키는 경쟁하는 진영들이 있다.

 

존재지도학의 이론도 있고 경험적 실천도 있다. 존재지도학의 실천은 주어진 상황 또는 세계에서 다양한 사물들과 기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공간적 중력 경로들에 대한 분석 또는 그것들의 지도 그리기일 뿐이다. 이런 실천이 경험적이어야 한다면, 이것은 한 상황에 어떤 존재자들과 기호학적 존재자들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것들이 어떤 경로들을 만들어내는지, 이런 특수한 맥락 또는 환경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등을 미리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존재지도학이라는 기획은 거대하고 누구든 한 사람의 작업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데, 그것이 대단히 다학제적이어서 그 상황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들, 그것들의 구체적인 특성들, 문학, 신화학, 기호학, 정치 이론, 역사, 다양한 과학, 기술 등에 지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실천의 어려움은 한 상황의 중력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많은 것들이 결코 그것을 텍스트나 기록물―최소한 인문학자들이 친숙한 경향이 있는 기록물―로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더 심화된다. 사람들이 식량을 준비하고 경작하는 방식, 위생 구조들, 전력선의 세부 사항들, 이용할 수 있는 기술들, 질병 역학들, 전 세계에 걸친 텍스트들의 배포, 도로들의 배치 등은 사회들이 왜 현재의 형식을 취하는지에 대한 분석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들이 아니며, 사회적 세계의 자취를 포착하기 위해 우리가 참조하는 경향이 있는 텍스트 또는 기록물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 것들도 아니다. 그 결과, 그것들은 사람들에게 중대한 중력을 행사하고 어떤 형식들의 억업적인 사회적 조직이 지속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라투르가 자신의 저작 전체를 통해 역설하듯이, 이것은 사회들이 단순히 믿음, 법률, 규범, 의미작용 체계, 담론들에 의해 결합된다는 인상을 체계적으로 낳았다. 그것은 이런 것들이 어떤 유형들의 사회들의 필요한 구성 성분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그리고 여기서 나는 사회를, 인간들이나 생명체들이 포함되는지 여부에 관계 없이, 무엇이든 존재자들의 조립체로 다룬다는 점에서 화이트헤드를 좇는다―또한 비인간적 존재자들의 방대한 연결망들과 그것들이 그런 환경 내에서 다른 존재자들에 행사하는 중력 때문에 사회들이 현재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들의 이 차원은 흔히 무시되는데, 한편으로는 그것이 제대로 기능함으로써 보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판적인 사회적 및 정치적 탐구에 있어서 우리가 참조하는 경향이 있는 많은 기록물에서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활기찬 물질(Vibrant Matter)>>에서 베넷(Bennett)에 의해 논의된 것과 같은 거대한 힘의 과시가 있거나, 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같은 것이 도시들 전체를 마비시키고 난 후에야 우리는 어떤 유형들의 사회적 관계들을 유지하는 데 비인간들이 그야말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지 의식하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존재지도학의 이론은 존재지도학의 기본 개념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완전히 망라하지 않은 채, 이 기본 개념들은 객체, 중력, 경로, 생성, 운동, 세계, 다원론적 시공간성, 관계, 기호 등과 같은 개념들이다. 덧붙여, 존재지도학은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에 대한 제약들을 개괄한다. 특히, 루크레티우스와 더불어, 존재지도학은 "그 어떤 것도 무(無)로부터 생성될 수 없다"는 테제를 지지한다. 원격작용은 전혀 없다. 한 존재자가 다른 한 존재자에게 영향를 미치려면, 그것들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게 하는 어떤 매질이 있어야 한다. 이 존재자와 저 존재자 사이에서 넘어가는 어떤 물질적 매개자 또는 다이몬이 있어야 한다. 현대물리학이 옳다면―그리고 여태까지 그것은 계속 유효한 듯 보인다―그 어떤 두 존재자들도 빛의 속력을 능가하는 빠르기로 상호작용할 수 없어야 한다. 이것은, 원격 상호작용들이 어디에서 일어나든 간에, 다이몬, 신호, 또는 시뮬라크럼이 한 존재자에서 다른 한 존재자로 여행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한에 있어서 시간이 한 요소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시뮬라크라가 여행하는 매질은 빛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기 때문에, 이런 시간적 빠르기는 다양한 상이한 존재자들에게 엄청난 중력을 행사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필수적인 문제들에 관해 정부 관료와 소통하는 모든 방식에 관해 생각하자. 시간과 속도는 사회적 관계들이 취하는 형식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존재자들 사이의 전달물 또는 메시지의 물질성과 더불어 이런 시뮬라크라가 여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이런 강조 덕분에 우리는 기호, 텍스트, 그리고 표상들에 관해 다른 식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기호, 텍스트, 표상, 그리고 메시지들의 대상성에 관해 집중하여, 이런 시뮬라크라가 그저 무언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 자체가 무언가라는 점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기호들의 물질적 실재성은 보이지 않게 되거나 잊혀진다. 기호들과 관련된 상황은 하이데거가 현존재의 공간성과 안경에 대한 현존재의 경험에 관해 논의하는 상황과 비슷하다. 하이데거가 서술하듯이, "어떤 사람이 거리적으로 자신과 매우 가깝게 '코 위에 놓여' 있는 안경을 끼고 있을...때, 그 안경은 반대편 벽에 걸린 그림보다 환경적으로 그에게서 더 멀리 존재한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듯이, 그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서, 우리가 그림에 정향하고 있는 한 우리의 안경들은 보이지 않게 되고 현전에서 물러나 있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것이 유클리드적 공간 또는 뉴턴적 공간의 공간성보다 더 근본적인 공간성―근접성이 거리적 가까움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어린 취급에 의해 규정된다―이 있다는 점을 예증한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이런 관심어린 취급에서 우리는 우리의 안경들을 통해서 바라본다. 체험 속에서 가까이 있는 것은 안경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어린 취급에서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런데 확장된 마음 가설과 관련하여 앤디 클라크 같은 이론가들이 옳다면, 근시의 사람은 자신의 신체를 안경과 결합시키지 않는다면 그림을 향해 결코 정향할 수조차도 없을 것이다.

 

기호, 텍스트, 그리고 메시지들의 경우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기호는 우리의 사유를 그것을 나르는 수단―기호를 전송하는 기표―을 넘어서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든지 간에 그 기의로 끌고 간다. 우리가 기호들을 다룰 때 망각하는 것은, 기호가 우선 자체를 넘어서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해서는 기호 자체가 현존하는 물질적 존재자가 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그 어떤 다른 존재자와도 마찬가지로, 기호들은 시간과 공간을 통과하여 전달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물질적 존재자들이어야 한다. 기호들은 그 속에서 존재할 어떤 매질을 항상 필요로 한다. 이 매질은 기호들이 통과하는 공기일 수 있는데, 소리는 진공을 통해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호들은 종이에, 컴퓨터 데이터 은행에, 뇌에, 연기 신호에, 깃발에, 공중 광고 등에 기입될 수 있다. 기호들은 컴퓨터 코드에서 쇄기문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이한 글쓰기 형식들로 기입될 수 있다. 그렇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기호의 의미 자체는 무형적일지라도, 그럼에도 기호는 항상 퍼스(Peirce)가 "기호전달체(sign-vehicle)"라고 부르는 것 또는 기호를 전달하는 어떤 종류의 물질적 매질에 결부되어 있다.

 

이것은 사소한 명백한 점인 듯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이 엄청난 함의들을 품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종의 반전된 선험적 에포케, 즉 당분간 의미하는 존재자들의 의미에 대한 그 어떤 집중도 중지하는 대신에 그것들의 물질적 또는 육화된 존재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특수한 환경에서 바이러스 또는 미생물의 분포와 마찬가지로 기호들도 세계 속에서 어떤 전염병학적 분포, 즉 세계 속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위치하고 있는지에 관한 지리학을 갖는다는 점을 수반할 것이다. 세계 전역에 전달되기 위해서 모든 텍스트는 물질적으로 육화된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 위치할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위해 이데올로기 비판 같은 기획들을 고려하자.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데올로기들의 물질적 분포를 무시한 채 문화적 인공물과 실천들의 무형적 차원―그것들의 의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런 비판들 가운데 많은 것들의 진실성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이데올로기 텍스트들의 무형적 차원, 즉 그것들의 의미에 집중할 때, 이런 비판들은 이 이데올로기들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전개된다. 그런데 그 어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도 시공간적으로 처해 있는 존재자들이기 때문에 상이한 장소들에는 상이한 이데올로기들이 있다.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가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살충제를 뿌리기를 원하지 않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어떤 이데올로기가 특수한 장소에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기표 집합체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식별할 수단과 그런 특수한 기표 집합체들에 개입할 방법들을 판별할 수단이 필요하다.

 

기표적 존재자들에 대한 주목은 이데올로기적 개입들이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관한 의문들을 항상 제기한다. 나는 지젝의 많은 메타이론적 주장들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지젝의 많은 이데올로기 비판은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지젝의 문체를 흉내내면, 그렇지만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비판들이 정확히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관한 의문이다. 우리는 지젝의 비판들이 이런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에 정향되어 있다고 추측할 것이다. 결국, 이데올로기 비판이 그런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정향되지 않는다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젝의 비판들에 관해 성찰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하는 데 고도의 이론적 배경 지식―라캉, 헤겔, 그리고 일단의 다른 이론가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에서 비롯되는 어떤 특수한 종류의 메시지들을 수용하고 판독하기 위해서 일종의 "프로그램"을 필요로 한다. 지젝의 글을 읽는 것은, 수용자가 그것을 판독할 수 있으려면 어떤 특수한 종류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이 기준에 따라 지젝의 글을 평가하고 그를  내재적으로 비판할 때―분명히 그는 세계를 그저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기획을 승인한다―우리는 물질적 기반에 근거하여 그의 기획의 적절성에 관해 물을 수 있다. 그런 비판은 그의 비판들의 정확성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실천의 적절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것은 우리가 텍스트의 물질적 특성들, 그것이 다루고 있는 존재자들, 그리고 이 텍스트가 구성되는 방식의 적절성을 평가할 때에만 부각되는 의문이다. 이런 기준에 따라 판단하면, 우리는 그런 비판들이 도대체 그런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송신 메시지들을 판독하는 데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갖춘 다른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실천이 이데올로기 비판가에게 자신이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동시에 주면서 이데올로기 자체를 건들이지 않은 채 그대로 둘 때 이런 종류들의 사회적 관계들을 전환시키기보다는 사실상 그런 관계들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판은 그런 비판들의 정확성과 진실성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많은 경우에 그것들은 전적으로 참이다―그것들이 물질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자. 그런 분석은 이런 이데올로기 비판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그 비판들이 자체의 적절한 목표에 이르러 그런 연결망들 속에서 효과를 산출하는 것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부가적인 조작들이 개입되어야 하는지 물을 것이다.

 

의미 또는 내용에 대한 주의 집중을 일시적으로 중지한 다음에 기호전달체들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는 전염병학이나 개체군 성장 및 확산에 접근하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기호적 존재자들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존재지도학이 기호적 존재자들의 물질성에 접근하는 방식과 밈 이론 사이에 명백한 교차점들이 존재한다. 그런 분석은 다양한 전달 매체 또는 기호전달체들의 나르개들(공기, 글로 쓰여진 텍스트, 인터넷 등)이 의미와 사회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다양한 기입 형식들이 메시지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그리고 기호전달체들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 등에 특히 주목할 것이다. 여기서, 예를 들면,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신문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분석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문들의 내용, 대상이 확실히 민족 정체성의 형성에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던 한편, 매체로서의 신문의 물질성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이 맞다면, 그것은 신문이 특수한 메시지들 또는 표현 형식들이 널리 순환될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인데, 그럼으로써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접촉하거나 소통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정체성에 관여할 기반을 제공하였다. 매클루언이 즐겨 과장되게 서술했듯이, 매체는, 자체의 순전한 물질성에 있어서, 메시지이다.

 

존재지도학의 기획은 끌림의 체제(regime of attraction)라는 내 자신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쟁점들에서 기인한다. <<객체들의 민주주의>>에서 나는 객체들이 왜 있는 그대로 개체화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끌림의 체제"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거기서 나는 객체―이제 기계라고 부른다―들이 내가 "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라고 부르는 잠재적 차원과 내가 "국소적 표현(local manifestation)"이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차원 사이의 분리라고 주장했다. 자기생산 이론뿐 아니라 들뢰즈와 가타리에 기대어, 나는 기계를 물질이나 에너지의 흐름들이 통과하는 존재자로 주제화하는데, 그 동안 기계는 물질을 재처리하고 물질에 의해 재처리되어 어떤 종류의 출력을 산출한다. 기계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조작하거나 기능을 수행하며, 그런 조작들을 통해서 자체의 부분들 또는 어떤 종류의 산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기계는 항상 내부적으로 이질적이며, 서로 결합되어 있는 다양한 부분들 또는 더 작은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고 자체가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엔트로피 또는 해체의 위협에 직면한다. 기계는 저기 놓여 있는 적나라한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정 또는 활동이다. 나무 같은 기계의 예를 들어보자. 나무는 햇빛, 물, 토양 속의 영양분, 이산화탄소 같은 물질의 흐름들이 통과하는 기계이다. 사실상, 한 나무가 해체되거나 분해되지 않고(죽거나 썩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 그것은 끊임없이 이런 흐름들에 의존해야 한다. 이런 흐름들에 의존할 때, 그 나무는 그것들을 재구성하여 햇빛, 토양 영양분, 이산화탄소, 물로 자체의 부분들을 만들어내고 이런 물질들을 다양한 유형의 세포들뿐 아니라 그 나무에서 떨어질 열매, 산소, 그리고 다른 결과물들로 형성한다. 들뢰즈가 시적으로 서술하듯이,

 

우리가 밀이라고 부르는 것은 흙과 습기의 수축물이며, 그리고 이 수축은 응시이자 그 응시의 자기만족이다. 그것의 존재만으로 들판의 백합은 하늘, 여신과 신들의 영광을, 다시 말해서 자신이 수축하면서 응시하는 요소들의 영광을 노래부른다. 모든 유기체는 반복의 요소와 경우들로 만들어지고, 응시되고 수축되는 물, 질소, 탄소, 염소 화합물, 그리고 황산염들로 만들어지며, 그래서 자체를 구성하는 모든 습관을 서로 얽어맨다.

 

한 나무는 다른 독특한 기계들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것 자체가 다른 작은 기계들―세포는 작은 기계이며, 그것 자체가 다른 세포들에서 비롯되는 모든 종류의 흐름들에 의존한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열매, 향기, 산소 등과 같은 다른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객체라기보다 기계로서의 존재자들에 대한 주의 집중은 존재자들이 어떤 성질들 또는 특성들을 지니고 있는지가 아니라, 존재자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그것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그것들이 다른 존재자들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이런 조작들로 무엇을 만들어내는지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그렇지만, 기계들과 그것들을 통과하여 흐르는 물질들 사이의 관계가 능동적인 것(기계)과 수동적인 것(물질) 사이의 관계, 또는 형태가 없는 물질과 형태가 있는 기계 사이의 관계라고 결론짓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스테이시 알레이모가 초육체성이라는 자신의 개념으로 시사하듯이, 기계들이 자체를 통과하는 물질들을 변형시키는 만큼 기계들도 자체를 통과하여 흐르는 물질들에 의해 변형된다. 나무는 그것이 의존하는 물의 화학적 성분, 입수할 수 있는 영양분, 그것이 성장하는 온도, 그것을 둘러싼 공기의 특질에 따라서 다르게 성장할 것이다. 그것이 성장하는 고도와 만나는 바람도 그 나무의 본성을 바꿀 것이다. 예를 들면, 내 집 옆에 특정한 방향으로 구부러진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텍사스 지역이 흔히 꽤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기 때문에 이 나무가 그런 식으로 성장했다고 추정한다. 그 나무의 성장은 나무가 위로 성장하는 경향과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세찬 바람의 힘의 일종의 타협, 일종의 종합이었다. 이 나무는 이른바 화석이 된 바람, 나무의 살에 새겨진 바람이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지도학이 고려하는 것으로서의 중력의 멋진 일례를 갖게 된다. 기계들의 초육체성은 기계들이 가소성 또는 변형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기계들의 성질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끌림의 체제 또는 시공간적 중력장 속에서 다른 기계들과의 만남의 결과로서 바뀔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 사이의 구분이 필요하다. 기계가 여전히 그 기계로 남아 있으면서 성질의 변화를 겪을 수 있다는 점이 참이라면, 기계가 더 이상 자체의 성질들로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오히려, 성질들은 사물의 특성들, 즉 사물이 지니고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오히려 사물이 저지른 활동들 또는 사건들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질들은 행함의 결과물이다. 예를 들면, 공의 색깔은 그 공이 현재 처해 있는 조명 조건에 따라서 변한다. 그 공이 상호작용하는 빛의 유형의 변화에 따라서, 이제는 밝은 적색이고, 이제는 적갈색이고, 이제는 진한 적색이고, 그리고 이제는 검거나 색깔이 없다. 우리에게 존재론적으로 정확한 언어가 있다면, 변화하는 환경에 따라서 그 공이 여러 색깔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공이 적색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공이 특수한 조명 조건에서 적색을 나타낸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자체의 성질들로 기계를 개체화할 수 없다면, 당연히 기계들의 존재는 다른 것으로 개체화되어야 한다. 나는 이 다른 것이 능력들, 역량들, 그리고 기계가 수행할 수 있는 조작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기계의 능력과 조작들은 그것이 겪는 초육체적 만남들의 결과로서 변동되고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내 인지 능력은 알코올과의 만남의 결과로서 일시적으로 저하되는데, 아마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런 능력과 조작들이 기계의 잠재적 고유 존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계의 능력들의 영역이 특수한 시간과 장소에서 그것이 우연히 구현하는 그 어떤 성질들보다 항상 더 넓다는 점이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육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모든 육체, 모든 기계는 어떤 주어진 시간에 그것이 우연히 현실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행할 능력을 항상 갖추고 있다.

 

반면에, 기계의 국소적 표현은 특수한 시점과 장소에서 현실화된 특성 또는 성질을 가리킨다. 국소적 표현들은 어떤 특수한 특성이 현실화된 것들이기 때문에 표현들이다. 예를 들면, 공의 적색이 있다. 국소적 표현은 특수한 국소적 조건에서 어떤 특성이 현실화된 것이기 때문에 국소적이다. 다른 국소적 조건이 주어지면, 매우 다른 성질 또는 행위가 나타날 것이다. 공은 밝은 적색이 아니라 적갈색을 현실화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유전체가 동일한 두 개의 밀알은 다른 고도에서 성장했을 때 매우 다른 특성들을 드러낼 것이다. 잠재적 고유 존재와 국소적 표현 사이의 구분 덕분에 우리는 무엇이든 어떤 존재자 내부에 잠복되어 있는 잠재태가 자체의 현실화된 그 어떤 특징들도 넘어선다고 규정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여기서 나는 경험적인 것들에서 선험적인 것들을 알아내지 않는다는 들뢰즈의 처방을 좇는다. 기계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결코 자체의 현실화된 성질들과 비슷하지 않다. 잠재적 고유 존재는 이런 성질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은 항상 자체 속에 여타의 다른 성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품고 있다.

 

국소적 표현의 국소성이 내가 "끌림의 체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끌림의 체제는 한 기계가 다른 기계들과 공유하는 관계들로서 그 기계 안에서 발생하는 표현들 또는 현실화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다른 기계들에서 비롯하여 그 기계를 통과하는 흐름들이 기계 안에서 다양한 표현들 또는 현실화되는 것들을 말하자면 "끄집어 낸다"는 의미에서 끌림의 체제는 끌어당긴다. 끌림의 체제는 기계로 하여금 특수한 성질들을 현실화하게 만드는 맥락적 또는 환경적 교란이다. 요약하면, 끌림의 체제는 존재자들의 생성 및 운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시공간적 중력장이다. 우리는 이미 화석화된 바람으로서의 나무에 대해 이 중력장이 수행한 역할의 일례를 검토했다. 거기서 그것이 바람과 자체 세포들의 발달과 통합한 방식의 결과로서 그 나무는 그렇게 성장했고, 그렇게 되었다. 바로 이런 시공간 상의 통합 때문에 그 나무는 이런 특수한 굽은 형태를 현실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중력장 또는 끌림의 체제는 존재자들의 운동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존재지도학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공간과 시간이 모든 곳에서 동일하지는 않으며, 운동이 물질적으로 모든 방향으로 가능하지는 않다. 요약하면, 존재지도학은 공간과 시간에 관한 연결망 개념을 제시한다. 도시에서 도로들이 배치되어 있는 방식은 존재자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과  한 존재자가 다른 장소에 이르기 위해 이동해야 하는 방식뿐 아니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수행한다. 유클리드적 공간에서는 두 장소가 서로 꽤 가까울 것이지만, 울타리와 벽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지점에 이르는 것이 꽤 어렵게 될 수 있다. 그 벽과 도로들은 사회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치는 움직임에 어떤 중력을 행사한다. 유클리드적 공간에서 나는 일리노이에 거주하는 에일린 조이(Elieen Joy)보다 내 대학의 총장에 거리적으로 훨씬 더 가깝지만, 내가 총장과 접촉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의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하는 반면에 조이와는 더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지도학적 공간과 시간에서는 총장보다 그가 내게 훨씬 더 가깝다. 대학의 관료 체제는 시공간적 중력장으로서 기능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부풀리며 대학 총장을 움직일 수 있는 내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덧붙여, 존재자들은 자체의 환경에서 비롯되는 영향들에 선택적으로 개방되어 있을 뿐이다. 바위는 언설에 반응하지 않는다. 뼈는 이야기 요법으로 치료될 수 없다. <<심판>>과 <<성>>에서 조셉 K는 관료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전적으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우리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아챈다. 나는 자외선 영역의 빛에 교란될 수 없지만, 사마귀 새우는 그럴 수 있다.

 

존재지도학이 이론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끌림의 체제의 특질인 생성 및 운동의 이런 복잡한 동역학이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기계들의 구조와 그것들의 동역학을 이론화하려고 노력했다면, 존재지도학은 기계들 사이의 관계들과 그것들이 생성과 운동의 시공간 벡터들과 경로들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이론화하려고 노력한다. 이 기획은 지적인 관심사일 뿐 아니라 내가 "테라이즘(terraism)"이라고 부르는 실천―지구의 실천과 지구 내의 실천을 가리킨다―을 생성한다. 테라이즘이라는 실천은 세 가지 차원, 즉 지도학, 해체, 그리고 대지 형성이 있다. 지도학은 물질적 기계들과 기호적 기계들의 장들의 지도를 그리는 데 있는데, 그럼으로써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시공간 중력장들 또는 그것들이 초래하는 운동과 생성의 경로들을 식별하게 된다. 해체는 어떤 끌림의 체제 내에서 우리가 편애하는 존재자들의 생성과 운동을 저지하는 관계들을 단절하는 것을 가리킨다. 때떄로 해체는 문화 연구에서 발견되는 것(해체, 정신분석학적 비판, 이데올로기 비판, 마르크스주의적 문화 비판, 페미니즘적 문화 비판, 퀴어 비판, 계보학적 비판 등)과 같은 고전적인 기호학적 비판 및 분석 양식들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때때로 해체는 문자 그대로 어떤 존재자들을 끌림의 체제에서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을 것인데, 그럼으로써 그것들은 존재자들의 생성과 운동을 더 이상 저지하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면, 생명체들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하려고 노력하는 환경 운동이 물질적 해체의 일례이다. 비슷하게, 말라리아가 사람들에게 문화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다른 목적들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특정한 환경에서 말라리아 미생물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지 형성은 기호적 기계들과 물질적 기계들의 층위에서 더 나은 생성과 운동 형식들을 가능하게 하는 끌림의 체제 또는 시공간 연결망을 구성하려고 시도하는 데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할 핵심은 모든 기계가 자체의 잠재적 고유 존재의 층위에서 잠복된 잠재력들을 품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 때문에 어떤 기계를 현존하는 끌림의 체제에서 제거했을 때 또는 새로운 시공간 중력장에 위치시켰을 때 그것이 파괴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가능성으로 우리를 영원히 괴롭힌다. 우리는 어떤 기계이든 그것이 무엇을 행할 수 있는지 전적으로 알지는 못하고 그 어떤 기계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이해한 상태에서 테라이즘은 항상 신중하고 겸손하게 실행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