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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 인터뷰-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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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 6.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인터뷰 

 

―― 조니 고든 팔레이(Jonny Gordon-Farleigh)

 

그의 새 책 <<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The Faith of the Faithless)>>의 출간과 함께 나는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에게 반사실적 신앙이 현대 정치에 매우 중요한 이유, 그것이 정치적 변화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가능성들의 보관소"를 제공하는 이유, 여전히 "거인들"에 대한 강박이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오늘날 진실한 정치적 지형의 모습에 관해 물었다...

 

STIR: 최근의 신학적 부활은 "신학적 필요가 아니라 이론적 부족"[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때문이라고 추정되었습니다. 이십 세기의 공산주의 기획들의 파국적인 실패 외에 이례적이지는 않지만 뜻밖의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의 이런 급상승을 가져온 이유들이 더 있을까요?

 

사이먼 크리츨리: 정치신학에 대한 관심은 자유주의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됩니다. 하나의 범주 또는 술어로서의 정치신학이라는 관념은 사실상 바쿠닌에서 유래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십구 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사상에서 유래되며, 또한 처음에는 하나의 폭력적인 술어로서 사용됩니다. 그리고 1920년대에 칼 슈미트(Karl Schmitt)가 그것을 포착할 때 그는 그것에 다른 가치를 부여하지만, 좌파와 우파인 바쿠닌과 슈미트 둘 다의 경우에 공격 대상은 동일한 자유주의입니다.

 

시대구분을 하면, 바르샤바 조약과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여파가 있고, 그리고 재빨리 소진되는 해방적 활력을 위한 민주주의 내부의 잠재력에 관한 낙관주의가 풍부한 1990년대 초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시점에 신학적 관심사로의 복귀가 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적 관념들로의 복귀라기보다는 오히려 심층의 동기부여 구조의 층위에서 인간적 자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자기들이 함께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시도입니다. 당신이 그런 의문에 관심이 있다면, 종교사상의 역사가 정말로 참조할 곳입니다. 참조할 유일한 장소일 것입니다.

 

제 경우에, 저는 결코 특별히 세속주의적인 사상가이었던 적이 없었고 저는 결코 세속적 근대성에 관한 관념들에 대해 강한 신념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런 것들에 관해 의식해온 한에 있어서, 저는 바울,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등과 같은 종교적 사상가들에 대단히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제게는, 만약 당신이 철학 또는 이론이 종교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어떤 관념에서 출발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엄청나게 유용한 가능성들의 보관소로부터 단절시키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은 종교 없이 생각할 수 없거나, 또는 종교만으로 행해지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 없이 행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유신론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목적들을 위해 그런 전통 속의 최고의 가장 강력한 관념들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에 관해 사유하기 위해 종교적 원천들을 사용하는 것으로 복귀한 사람들 가운데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성 바울이 가장 강력하다고 저는 말할 것입니다.

 

제게 그 문제는 이중적입니다. 첫째, 그것은 진단적입니다. 정치 형식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들을 상이한 신성화 형식들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정치 형식들―파시즘, 자유민주주의, 스탈린주의―의 역사는 신성한 것들의 상이한 형식들이라는 이런 생각이 제게 있습니다. 항상 어떤 신성한 대상이 있습니다. 민족, 인민, 인종, 또는 그것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그래서, 정치의 역사를 종교적인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의 운동으로 여기기보다는 저는 정치를 신성한 것의 의미에 있어서의 전환으로 여깁니다.

 

제게는, 예를 들면, 시민들에게 특별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미국 시민종교의 견지에서 엄청나게 강력한 정치신학이 존재하는 제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나라(미합중국)에서 당신이 정치 형식들을 바라보고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때, 그것이 엄청나게 유용한 진단 도구입니다. 그래서, 매우 중요한 진단적 범주가 있으며, 그 다음에 더 규범적인 범주가 있습니다. 제게 정치는, 거친 표현으로 서술하면, "대표 없는 연합체(association without representation)"입니다. 저는 이것을 루소로부터 각색했습니다. 제게 연합체라는 관념은 단지 종교적 관념인 것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종교적 관념입니다. 종교는 단단히 결합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는 렐리가레(Religare)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합체를 단단히 결합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제게 그것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좌파가 고심해온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교적 전통을 그냥 버릴 수 있다거나, 또는 그것은 터무니없는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측면에서 반생산적인 속물적 태도입니다.

 

S: 정치신학에 대해 많이 관여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은 신앙이란 명제적이라기보다 수행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에 관해 그 책에서 제시된 당신의 주장과 일치합니까?

 

SC: 저는 테리의 관심사에 매우 친밀하며, 그리고 시간이 감에 따라 저는 훨씬 더 친밀해질 것입니다. 그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는 급진적인 가톨릭 교도로 출발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상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비판 대상, 즉 자유민주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세속적 신학―인권, 자유, 개체성, 기타 등등―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제게 신앙은 유신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 같은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자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주체적인 선언입니다. 그것은, 제 용어로 말하자면, 어떤 요구와 관련된 선언입니다. 신앙은 당신이 스스로를 하나의 윤리적 또는 정치적 주체로서 구속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요구합니다. 그것이 신앙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없지만 어떤 무한한 요구, 말하자면, 살인 금지 또는 평등의 심화와 관련된 신앙 경험을 지니고 있는, 예를 들면, 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한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 신앙이 그들의 세계관 속의 어떤 유신론적 실재에 의해 보증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합시다. 제 견해는 주관적인 층위에서는 아무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쓸모 없는 일탈입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는지입니다. 저는, 예를 들면, 미합중국의 블랙 기독교 같은 행동, 행위, 그리고 실천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종교적 기획들에 관심이 있습니다.

 

저는 신앙은 명제적 평면― 저는 X 등을 믿습니다―이라기보다 수행적 평면 위에 놓여져 있다는 테리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S: <<데클로지옹>>에서 장 뤽 낭시는 투쟁적인 인물로서 바울이 아니라 야고보에 주목합니다. 바울에는 발견되는 의지의 취약성 대신에 낭시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야고보에 주목합니다.

 

SC: 그것은 계속 나타나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십칠 세기 프랑스에서 얀센주의자들이 믿었던 것인데, 그들은 전적으로 박해받은 종교적 소수파였습니다. 그들은 세계 속의 행위로서의 신앙이었습니다.

 

행위로서의 신앙과 영성은 구분됩니다. 대체로 뉴에지 신앙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을 둘러싸고 다양한 형식으로 성장한 영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영성은, 끔찍하고, 혼돈적이며, 산산조각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당신이 계발할 수 있는, 자신과 관련하여 축복받은 것 또는 신성한 것을 찾아내기 위한 내향적 전환이 됩니다. 제게 신앙은 외부를 향하고 영성은 내부를 향합니다. 저는 필립 K. 딕과 영지주의에 관한 글에서 이것에 대하여 적었는데, 그 글에서 저는 세계란 추잡한 것, 일종의 매트릭스―사악한 기업 권력자들 또는 누구이든지 간에 그들(영지주의자들이 아르콘들이라고 부르는)의 지배를 받는 꿈 공장―이지만, 우리들 내부에는 순수한 신성한 불꽃이 있다는 점을 수용할 때 영지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모든 흥미로운 영성 형식들은 통제할 수 없는 듯 보이는 세계로부터의 수동적인, 허무주의적인 물러섬의 형식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영성에 반대하는 한편, 그것을 이해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상이한 영성 형식들을 다루게 될 때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아무 믿음도 없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불교가 따르기 쉬운 듯 보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완벽함 또는 텅빔의 실천들을 계발할 수 있으며 그것은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다룰 수 있게 합니다. 저는 그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수동적 허무주의가 세계에 대한 한 대응책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대응이며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S: <<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에서 당신은 그람시의 말을 인용합니다. "사회주의가 기독교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주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어떤 정치적 노력 또는 기획이 종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것이 왜 그 기획의 성공을 위해 중요합니까?

 

SC: 정치적 기획의 성공을 위해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운동의 문제들에 의해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로 하여금 어떤 식으로 행동하도록 고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와 관련하여, 저는 인간들을 연합체로, 공동 전선으로 데려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인물로서 그람시는 마르크스보다도 그리고 사회경제적인 것들에 대한 과도한 믿음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현대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도 항상 제 관심을 더 많이 끌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그것은 터무니 없을 것입니다―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위해서 우리는 공동 전선, 또는 그람시가 헤게모니의 활동이라고 부르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 전선, 즉 그람시가 부르듯이 하나의 역사적 블록으로 결합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종교 또는 종교적인 사람들을 배제하면, 당신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람시의 시대에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대체로 가톨릭 교회가 회고적인 반동 세력이지만,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은 가톨릭의 좌파적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더 일반적으로 사람들을 일종의 공통적인 것으로 엮어내는 것, 넓은 의미에서 시적인 또는 종교적인 어떤 종류의 구조의 형성입니다. 그것은 정치적 상상력이 풍부한 활동을 필요로 합니다.

 

<<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에서 제가 말하는 주제는 제가 최고의 허구라고 부르는 것, 즉 정치의 영역은 허구의 영역인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홉스가 인공적 인간과 인공적 영혼이라고 불렀던 것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런 허구들을 허구들―인민 주권이라는 허구, 우리 인민들이 실제로 상황을 지배한다는 관념 또는 우리가 금권 정치 체제 또는 과두 정치 체제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관념―로 폭로하는 것이 우리가 허구에서 사실로 움직인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최고의 허구―우리가 허구라는 것을 알았지만 여전히 믿는―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이런 다른 관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시적, 그리고 종교적 기획일 수 있는 것을 공식화하는 방식입니다.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일종의 낭만주의가 있으며, 일종의 실용주의도 있습니다. 낭만주의는 최고의 허구에 관한 관념입니다. 실용주의는 운동들이 배제 또는 전위들의 계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민들로 하여금  합류하도록 고무하는 연합체의 구성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관념입니다. 저는 그것이 일정 기간 동안 '점거하라' 운동이 행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그 운동으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지만 말입니다.

 

S: 사실들이 우리에 맞서고 자본주의 일극 세상의 연속이 신뢰할 만하고 그럴듯한 유일한 정치적 선택으로 간주될 때, 지식보다 신앙이 더 긴급히 필요한 정치적 자원이 될 수 있습니까?

 

SC: 우리는 둘 다 필요하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을 일종의 공식으로 서술하자면, 상황주의자들은 '현실주의적이 되어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에 관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좌파―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가 된다는 것은 반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힘은 매우 커서 우리가 존재하는 체제에서 대안들이 있다는 입장은 영원히 조소받고 무시당하는 입장이 됩니다.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합니다.

 

S: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이것을 자본주의 현실주의라고 부릅니다.

 

SC: 요점은 대안이 없다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실용적으로 그것을 수용해야 하고 우리의 요구들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만큼, 그 어떤 좌파적 기획도, 그 어떤 해방적 기획도 반사실적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사물들을 배치하는 대안적 방식의 그럴듯함에 대한 반사실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신앙을 필요로 합니다. <<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에서 제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또 하나의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상가들의 형태들이 여전히 저곳에 있으며, 우리는 유토피아적 전통을 하나의 시대 또는 하나의 변형 또는 일종의 터무니없는 입장으로 단순히 거부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식에 관해 말하자면, 우리에게 지식이 필요없다―그것은 터무니없을 것입니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신앙의 한 형식으로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몇 가지 형식들의 과학적 지식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물들에 관한 지식의 축적으로서의 과학이라는 이런 종류의 말도 안 되는 관념이 있습니다. 과학은 신앙의 한 형식입니다. 과학은 신앙에 의해 유지되며, 그리고 그것은 자체의 적인 의심이 아니라 확실성인 신앙의 한 형식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래서 가장 극단적으로 그 관념을 서술하면, 우리는 지식으로 간주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고 조직되며,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안들은 그저 터무니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체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대안적 입장을 유지하는 것은 신앙의 입장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S: 당신이 슬라보예 지젝과 벌인 논쟁은 최소한 두 가지 상이한 정치적 입장―무정부주의와 권위주의―를 분명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둘 다 국가의 종말을 추구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집니다. 가브리엘 쿤(Gabriel Kuhn)이 지적하듯이, 왜 여전히 "거인들"―레닌, 마오, 카스트로―에 대한 매우 이상한 강박이 존재해야 합니까?

 

SC: 좋은 질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영웅주의의 환상입니다. 그것은 남성성의 정치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적으로 걱정스럽고 역겨운 것이라고 간파합니다. 저는 저와 지젝이 벌인 논쟁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것이 왜 가치 있는 논쟁인지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유일한 점은 그것이 좌파의 입장에서 권위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이의 구분에 집중했다는 것이고, 그리고 그것이 좌파에 전위 또는 영웅적 폭력의 정치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레닌주의적 향수의 여러 형태들이 어떻게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지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제게 방 안에 앉아서 비디오 게임을 하고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며 어떤 격변적 사건을 꿈꾸고 있는 청년들을 상기시킨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잘못되었고, 소박하며, 어리석다는 점을 알아차립니다.

 

우선 말할 것은 무정부주의적 전통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또는 레닌주의적 공산주의가 좌파가 관리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고드윈(Godwin), 바쿠닌(Bakunin), 크로포트킨(Kropotkim), 그리고 또한 말라테스타(Malatesta)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다음에 제가 정말로 관심을 갖고 있는 콜린 워드(Colin Ward) 등과 같은 인물들의 영국적 전통 전체를 관통하는 무정부주의적 전통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훨씬 낮은 층위입니다. 그것은 훨씬 덜 영웅적이고 극적입니다. 거의 틀림없이 그것은 영국 혁명 초기에 당근을 심던 디거파로 시작합니다. 땅을 돌려받는 것, 공유지를 돌려받는 것, 그리고 채소를 키우는 것은 생페테르스부르그의 겨울 궁전의 습격만큼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일종의 남근적인 영웅 정치에 대한 일종의 향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저는 특별히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고 싶습니다.

 

정치는 다른 활동입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서 저는 '점거하라' 운동을 지적합니다. '점거하라' 운동은 정치에 대한 권위주의적, 영웅적, 남성적, 전위적 관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영향력을 지닌 사람들의 잘 조직되었지만 느슨한 집합체였습니다. 주코티 파크로 내려갔을 때, 가장 뚜렷했던 것은 그곳에 상이한 집단들이 대단히 많이 있었으며, 상이한 사람들이 대댠히 많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적은 작은 플래카드―일부는 정말 전적으로 터무니없었습니다―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민주주의란 얼마간 그처럼 보입니다. 조직된, 규율 잡힌 혁명 엘리트라는 관념은, 제 생각에, 약간 웃깁니다. 그것은 하나의 소외 방식일 뿐입니다. 그것은 자체의 낭만적 실패를 지속시키는 좌파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S: 무정부주의적 관념들, 또는 최소한 무정부주의자 집단들과 관련된 또는 그것들에 의해 채택된 관념들은 지난 이십 년 동안의 정치적 운동과 사회적 운동―대안지구화 운동과 가장 최근의 '점거하라' 운동―에 중요했습니다. 하나의 전통으로서의 무정부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이 그랬던 방식으로 길들여지지도 제도화되지도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것이 정치적 실천의 자발성에 적합하며, 그리고 당신이 비판하는 "원칙에 입각한 추상물들"과 "계획된 정치적 행위"보다 본원적으로 상이한 상황들에 더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SC: 저는 말씀하신 모든 것에 동의합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쓸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완벽합니다! 무정부주의는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행함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점이 있다면, 그것의 약점은 이론적인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것에 관한 거대 이론을 행하는 긴 턱수염을 기른 거대 사상가로 시작하며, 그리고 학문성에 관한 어떤 서양적 관념에 더할 나위 없이 알맞는 반면에,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정부주의는 이론에 대한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떄문에 매우 많은 강단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그것은 항상 좋은 사업이었습니다. 무정부주의는 항상 이론에 대해 의심했고 그런 종류의 총체적 견해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저는 지난 십 년 동안 상황이 많이 변했으며, 이제 강단에 충분히 많은, 즉 소수의 무정부주의자들이 있을 것이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항상 매우 주변적이었습니다. 이제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같은 사람들이 정말 중추적이며, 그와 같은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이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정부주의의 이론에 대한 의심과 관련된 문제도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떤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이라는 원칙에 입각한 추상물에 대한 무정부주의의 반대는 대단하며, 그리고 그것의 실천 지향성은 정치가 행해야만 하는 방식입니다. 무정부주의는 다른 상황에 다른 방식으로 적응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무정부주의의 이론적 기반에 대해 약간 더 관심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많이 좋아하는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정말 약간 더 숙고할 필요가 있는 자유와 합의 등의 매우 고전적인 관념들을 다룹니다.

 

<<무한하게 요구하기>>에서, 그리고 새로운 책에서도 제가 시도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 몇 가지 그런 개념들에 관해 생각하고자 한 것이고, 그리고 고전적 자유방임적 무정부주의에 대립되는 것으로서 제가 몇 년 전에 '무한 책임의 신무정부주의'라고 부른 것에 관해 생각하고자 한 것입니다. 저는 무정부주의가 그저 해방의 문제, 특히, 예를 들면, 성 해방의 문제가 되었던 60년대의 무정부주의 관념으로부터 무정부주의가 역할에 대한 반응이고 역할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다는 입장으로의 전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점거하라' 운동이 그것에 대한 매우 좋은 예입니다. '점거하라' 운동과 관련하여 매우 매혹적이었던 것은 조소받고, 무시당하며, 비실제적이고 말이 안 된다고 간주되었던 기법들이 사용되었던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했습니다. 주코티 파크에서 그 어떤 부연도 없고 그 어떤 명백한 권위주의적 통제 수단도 없이 400명의 사람들이 총회를 개최했습니다. 그리고 인민들은 그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선의에 바탕을 두고 조화롭게 행동하는 인민들은 놀라운 것들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또한, 어떤 공산주의 관념을 위해 '점거하라' 운동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제 생각에 그야말로 오해인 것 같습니다. 그 운동은 대단히 복잡한 일단의 맥락과 집단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폭넓은 직접 민주주의적인 행위입니다.

 

제게 '점거하라' 운동의 압도적인 효과는 인민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꽤 잘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올바른 환경에서 그들은 그것을 점유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점거하라' 운동의 목적들, 그리고 또한 사실상 아랍의 봄의 목적들은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 금융자본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되돌려받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정말로 사회주의적입니다. 그리고 아랍의 봄에서 빼앗겼던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재국유화 계획들의 문제, 재국유화를 다시 요구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의제입니다. 그것을 획득하는 데 사용된 전술들은 무정부주의적이고 이제 인민들은 그것들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 이해합니다. 이 바퀴의 다음 회전이 생각해야 할 흥미로운 문제일 것입니다. 다음에 무엇이 일어나는가? 저는 정확히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S: 국가의 가능한 도구화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한편, 신자유주의적 민영화의 점증하는 대담성은 이미 국가를 위축시켜 점점 더 소수에게 넘겨주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 같은 것은 없으며 국민국가는 이제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지만, 활동가들은 경제 위기와 생태 위기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자신들이 믿고 있는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을 향해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오늘날 진정한 정치적 지형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SC: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다음과 같은 멋진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비행기를 탄 사람들이 비행기 안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어디론가 가며, 영화를 감상하거나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비행기를 조종하는 조종사가 없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 다음 10분 후에 착륙하기로 되어 있는 공항이 개장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건축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건설조차 되지 않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타 등등. 이것이 우리 시대의 이미지입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도 책임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권력의 분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우리가 정치가 권력을 쥐고 있고, 그래서 정치와 권력의 통일 지점이 국가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낭만주의 또는 비겁함일 것이다―는 의미에서 정치와 권력의 이런 분리가 존재한다는 관념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모든 것이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때 정부가 실제로 조치를 취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지난 30-40년 동안, 레이건과 대처 등의 정권 아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점진적으로 과두 정치 체제 또는 금권 정치 체제―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지 간에―로 변화되어온 방식이 정치는 권력에 복무하는 것이고 정치는 아무 정치적 책임도 없다는 믿음을 공표한 듯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국가는 그 어느 국가에도 위치하고 있지 않는 자본의 이해관계이고, 이해관계이어야 하며, 그것에 복무해야 합니다. 자본은 초국가적 유목적 형태인데, 세금을 거두겠다는 위협을 받으면 공장을 어딘가 다른 곳에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치적 지형은 우선 정치적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나의 슬로건으로 표현하면, 그것은 '위치 없는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일 것입니다. 정치는 위치와 관련된 것이고,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뉴욕과 미합중국에서 살면서, 공화당 입후보자들과 민주당 등과 관련된 끔찍한 것은 위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장면의 관객일 뿐이고, 이런저런 식으로 어느 후보자가 최선인지 구경합니다. 주코티 파크와 관련된 전부는 위치입니다. 여기에 저항의 지형, 일련의 정말 꽤 모호하고 매혹적인 무한한 요구들을 둘러싸고 조직된 저항의 지형이 있습니다.

 

제게 정치적 과업은 지형의 건설입니다. 저는 그것이 여러 맥락에서 맞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에서 가장 명료할 것입니다. 특히 정부가 오로지 국제 금융기관들과 유럽연합의 이익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리스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그 어떤 가능한 주장 또는 위선도 절대적으로 타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확실합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무엇이 목적인가? 글쎄요 목적은 지형을 확립하는 것,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저는 무정부주의의 다른 한 요소, 즉 강한 연방주의적 경력으로 되돌아가고 싶습니다. 무정부주의는 국가에 대한 대립물이지만, 무질서라는 명목으로가 아니라, 지역 자치 형태들과 관련된 질서와 조직에 관한 다른 한 관념으로 대립적입니다. 내가 알고 싶은 것―그리고 이것은 제 생각에 대단히 비현실적인 것은 아닙니다―은 다음 10-20년 내에 유럽연합의 모든 국가들이 해체되고 그 영토 내의 인민들이 연방적 자치 통제 형태들을 확립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대단할 것입니다.

 

위치 없는 정치가 없다면, 정치의 목적은 사람이 살고, 생각하고, 일하며, 먹는 장소에 대한 소유와 통제입니다. 그것은 지형의 확립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지형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대표하지 않는 대표자들에게 권력을 양도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지형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현존하는 정치 체계 전체가 불필요할 뿐이고, 그래서 더욱 더 빨리 사라질수록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2011년에 아랍의 봄 등에서 시작하여 가장 멋진 방식으로 드러났던 것은, 일단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또는 다수가 자신들을 지배하는 소수에 맞서서 스스로를 명확히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만사가 끝난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에서 그것은 매우 쉽게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더 이상 정당들에 관해 아무도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1980년대에 저는 극좌파에서 입당한 사람들과 함께 노동당의 당원이었고 노동당에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대처주의를 제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노동당은 여전히 폭넓은 호소력―네 번째 조항 등―을 지닌 사회주의 정당이었습니다. 이런 정당들은 빈 껍데기,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추억인 듯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대담하게 전진하여 그것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S: 사람들이 냉담에 관해 말할 때, 저는 사람들이 잘못된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를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것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냉담적입니다. 그들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있는 하층민, 풀뿌리, 정치적 활동을 보고 있지 않습니다.

 

SC: 그것은 통상적인 정부 또는 정치에 대한 냉담입니다.

 

S: 그것은 정당 정치로부터의 철수이면서 또한 지역 활동과 공동체에 기반을 둔 정치 활동으로의 재진입입니다.

 

SC: 그리고 그런 다른 정치 형식은 전적으로 정념과 관련된 것입니다. 당신이 언급하셨듯이, 그것은 분노 등과 관련된 것입니다. <<무한하게 요구하기>>의 결말에서 제가 장 뤽 낭시로부터 차용한 구절은 이렇습니다. '분노가 첫번째 정치적 감정이다.' 그렇습니다. 분노는 복잡한 감정입니다. 그리고 '점거하라' 운동은 분노라는 정념의 명확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티 파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네델란드에서 자유당에 투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분노합니다. 그래서 분노는 주체를 화나게 하여 행동할 수 있게 만드는 정념이지만, 그것은 분석의 규율을 필요로 합니다. 분노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