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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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물질의 물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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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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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물질에 익숙하다. 많은 방식으로 물질은 세상에서 가장 친숙한 것이다. 우리는 벽의 저항, 발에 떨어지는 바위나 볼링 공의 고통, 환각이 허기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점, 알콜과 다른 약들의 취기에서 오는 황홀, 에너지가 소진되었을 때 우리 신체의 피로, 중력의 끌림 등을 체험한다. 우리는 항상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물질의 물질성을 체험한다. 이런 물질성 또는 물리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하기는 더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름대로 이미 이 쟁점을 명확히 표명했다. 무엇보다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인과 형상인을 구별한다. 질료인은 사물을 구성하는 것(철, 금, 돌, 유리, 얼음 등)이다. 형상인은 사물의 모양이나 유형이다. 그러므로 어떤 공의 질료인은 고무이며, 형상인은 그것의 구상(球狀)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구분은 전적으로 합당하며 그것은 그저 교수법적인 것으로 의도되었을 것이다. 공의 고무는 여러 상이한 형태 또는 모양을 띨 수 있다. 예를 들면, 그것은 자동차 매트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구상은 다양한 상이한 물질―유리 구, 나무, 바위, 금속 등―에서 일어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과 관련된 문제는 그것이 형상과 질료가 별개의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을 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사물의 유형 또는 형상이다. 이것이 내가 내 사유 또는 지성 속에 지니는 것이다. 결국 무언가의 형상 또는 유형은 사유를 비롯하여 다양한 상이한 매체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원에 대한 내 지식은 원의 유형을 구체화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원의 방정식, 형상 또는 유형을 아는 것에 있다. 따라서 그저 교수법적인 것으로 시작되었던 이 구분은 순전히 무형의 물질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낳았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형상이기 때문에 물질은 대단히 불가사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무형의 물질을 결코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무형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공의 고무가 많은 상이한 모양 또는 유형을 띨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형상 또는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문제에 직면한다. 무형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물질의 형상에 대한 지식은 사물 자체를 전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 나는 물질의 구조(형상)를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내가 유리의 화학식을 생각할 때 유리의 유형에 대한 내 사유은 여전히 유리를 산출하지 못한다. 그레이엄 하만과 함께 [...] 우리는 물질의 물질성, 물질의 "개성 원리"는 필연적으로 물러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피자의 화학―그것의 형상 또는 유형―을 아무리 잘 알고 있더라도, 그런 형상 또는 유형에 대한 내 생각은 내 허기를 만족시킬 피자를 여전히 만들어내지 못한다. [...]

 

이것이 바디우와 메이야수(그리고 또한 레디먼과 로스) 같은 사상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신유물론의 문제이다. 그들이 물질의 유형 또는 형상적 구조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물질의 물질성에 관해 중요한 것을 놓친다. 우리가 그런 유형 또는 형상적 구조를 아무리 열심히 생각할지라도, 여전히 우리는 사유를 통해서 그것이 생성되게 할 수 없다. 이런 신유물론과 관련된 문제는 그들이 물질을 그것의 반복 가능한 형상적 유형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물질과 관련된 환원 불가능한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을 놓친다는 점이다. [...] 형상에 관한 그런 지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물질의 물질성과 관련된 것이 있다.

[...]

그런데 물질성에 대한 여지를 마련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물질이란 아무튼 모든 담론성, 의미작용, 또는 사유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시사했다. 우리는 물질의 유형, 구조, 또는 형상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이 그것을 전하지는 못한다. 역설적으로, 물질의 물질성을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칸트이다. 칸트는 "자발성"과 "수용성"을 구별했다. 자발성은 개념, 사유, 기표, 또는 의미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런 것들이 자발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면,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가 원할 떄마다 마음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피타고라스 정리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한 사물이 존재할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원할 때면 언제나 그 정리를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시, 의미, 기표 등과 관련하여 이렇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자발성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수용성"은 일어나기 위해서는 대면해야 하는 영역을 가리킨다. 내가 바바 가노우시에 관해 아무리 많이 생각하더라도, 나는 입 속에 바바 가노우시의 맛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그것의 영양 효과는 더욱 더 그렇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실제로 바바 가노우시를 만나야 한다. 이런 관계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 물질적 만남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자발성이란 없으며, 수용성만이 존재한다. [...]

 

[...] 물질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발성을 벗어나는 것이나 담론성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존재자들 사이의 만남에서만 비롯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존재를 매우 다른 의미로 생각하는 것을 수반한다. 첫째, 이것은 알콜, 비타민, 뇌 화학, 상이한 음식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처럼 우리 의식의 조작들의 결과가 아닌, 우리 신체 내의 생화학적 반응들의 행위주체성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과정들 자체가 아니라 이런 것들의 결과를 체험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과정들을 제어하지 못한다. 비슷하게, 그것은  하부구조[...]의 분석뿐 아니라, 입수 가능한 열량과 연료의 형식으로 에너지적인 요구 사항들에 대한 분석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실천들과 어떤 형식들의 삶과 사회적 조립체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그런 종류들의 에너지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생물학적 육체와 노동하는 육체에 대해 시간이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보통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초급진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끄덕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이데올로기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이 하루에 열두 시간씩 노동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그들을 먹이며, 잡일을 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일 인지적 에너지 또는 시간이 거의 남지 않기 떄문인가[...]? 다시 말해서, 학자, 비판이론가, 교수는 자신의 시간적 구조, 그것이 시간과 에너지의 견지에서 자신에게 부여하는 특권, 그리고 그것이 권력에 대한 담론적 설명을 낳는 방식을 분석했는가? 무엇보다도 유물론적 시각은 우리가 체화되고 모든 종류의 실천들에 생태학적으로 묻어 들어가거나 의존하는 방식을 강조한다.

 

[...] 그런데 수학 방정식과 기표들이 자체적으로는 결코 생태학적 위기들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피타고라스 정리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굶어 죽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담론성과 의미작용의 자발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물질에 대한 물러서 있음과 개성 원리가 있다.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그런 비환원성과 권력 이해에 있어서 그것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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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