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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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통섭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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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3. 22.

 

누가 무엇을 아는가

 

수십 년 동안 과학과 인문학은 지식 패권을 놓고 다투었다. 두 진영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다.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인류의 지식 저장고의 목록을 만들려고 노력할 때마다 우리는 CP 스노우가 '두 문화'라고 부른 것 사이에서 계속되는 전투와 마주친다. 한편에 인문학이 있고, 맞은 편에 과학(자연과학과 물리과학)이 있으며, 사회과학과 철학은 중간 어딘가에 놓여 있다. 이것은 강단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영역 다툼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의 지식이 의미하는 것의 핵심을 때린다.

 

스노우는 1958년에 발표된 자신의 에세이 <문화와 과학혁명(The Two Cultures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으로 이 논쟁을 공론화했다. 그는 과학자로서 경력을 시작한 후에 인문학으로 옮겼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동료들의 태도에 낙담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전통적 문화의 기준에서 볼 때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들은 과학자들의 무지에 대한 불신을 표명하는 일에 상당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참을 수가 없었던 나는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이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반응은 냉담했고 또 부정적이었다. 나는 <당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은 일이 있습니까?>라는 질문과 맞먹는 과학의 질문을 던진 셈이었다.'(27)

 

그 일이 일어난지 반 세기 이상이 지났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1990년대 전체에 걸쳐 탈근대주의 저자들, 해체주의 저자들, 그리고 급진적 여성주의 저자들(미셸 푸코, 쟈크 데리다,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샌드라 하딩 같은 인물들)은 과학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명백히 이해하지 못한 채 과학에 관한 모든 종류의 무의미한 글을 적었다. 언젠가 여성주의 철학자 하딩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나는 우리가 과학과 이론 작업 자체를 재발명해야 할 것이라고는 여태까지 꿈에도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 과학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결과들의 부족을 고려하면 그것은 놀라운 주장이다. 지난 번에 내가 검토했을 때, 고유하게 여성주의적인 에너지원들이 나타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허세를 풍자하기 위해, 1996년에 물리학자 앨런 소칼은 탈근대주의 저널 <<소셜 텍스트(Social Text)>>에 논문 한 편을 투고했다. 그는 그것에 '경계의 침범: 양자중력의 변형해석학을 위하여(Transgressing the Boundaries: Toward a Transformative Hermeunetics of Quantum Gravity)'라는 제목을 붙였다. 변형적이든 아니든 간에 양자중력의 해석학 같은 것은 없으며, 그 논문은 전적으로 계산된 무의미한 글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그 저널을 그 논문을 출판했다. 그 교훈은 과학에 관한 탈근대적 글쓰기가 '두 개의 대안적 독법: 흥미롭고 급진적이며 대단히 그릇된 독법과 지루하며 평범하게 참인 독법'이 주어질 수 있는 '급진적으로 들리는 주장들'에 의존한다는 점이라고 소칼은 결론지었다.

 

그렇지만 문화전쟁에 대한 비난은 인문학자들의 어깨에만 놓이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과학자들도 자신들의 성취를 과장하고 자신들이 읽지 않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을 무시하기 위해 나름대로 도가 지나친 수사법을 채용했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과녁은 흔히 철학이다. 스티븐 호킹은 자신의 2010년 책 <<위대한 설계(The Grand Design)>>에서 철학은 죽었다―그는 그런 놀라운 결론에 대한 증거나 논증을 제시하지 않았지만―고 선언함으로써 시작했다. 2012년 초에 이론물리학자 로렌스 크라우스는 <<아틀란틱(The Atlantic)>> 매거진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은 '제게 우디 앨런의 오래된 농담―실천할 수 없는 자들이여, 가르치라. 가르칠 수 없는 자들이여, 체육을 가르치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철학의 최악의 부분은 과학철학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한, 과학철학자들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다른 과학철학자들뿐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물리학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우선, 이론물리학의 연구결과를 읽는 유일한 사람들은 이론물리학자들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공정한데, 그래서 크라우스 자신의 추론에 의하면 두 분야 모두 다른 모든 사람들과 무관하다(믈론 그렇지 않다). 둘째, 크라우스, 그리고 그 점에 있어서는 호킹도 철학의 과업은 과학적 문제들을 푸는 것―그것을 위해 과학이 있다―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듯 보인다. 이런 근거에서 철학에 반대하는 것은 과학사가들이 이론물리학의 한 문제를 풀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역사가들은 과학이 아니라 역사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이론물리학자들이 마지막으로 역사 문제를 풀었던 게 언제였던가? 그리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 있는 책 <<다윈의 위험한 생각(Darwin's Dangerous Idea)>>(1995)에서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적었듯이, '철학이 없는 과학 같은 것은 없다. 철학적 사고 방식이 아무 검토 없이 적재되어 있는 과학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그것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간에, 호킹과 크라우스는 자신이 수행하는 것에 대한 배경 조건으로 철학을 필요로 한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관계를 재조정하려는 가장 야심만만한 현대의 시도는 생물학자 EO 윌슨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자신의 1998년 책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에서 윌슨은 자연과학의 견지에서 인간 경험 전체를 설명하는 것에 해당하는 것을 제안했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들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하여 그는 우리의 유전적 유산의 견지에서 사회, 예술, 윤리, 그리고 종교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내가 통일된 지식의 꿈에 사로잡혔던 때를 매우 잘 기억한다'고 그는 적었다. '나는 진화를 발견했다. 갑자기―이것은 대단히 강한 낱말이 아니다―나는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윌슨은 우리가 지적으로 그리고 심미적으로 만족스러운 지식의 통일을 낳는 '통섭'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두 가지 판본의 통섭을 이렇게 규정한다. '현상을 그것의 요소들로 분해하는 것은 ... 환원에 의한 통섭이다. 그것을 재구성하는 것, 그리고 특히 환원에 의해 얻어진 지식으로 우선 자연이 그것을 어떻게 조립했는지 예측하는 것은 종합에 의한 통섭이다'.

 

낯선 이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것은 자연과학의 표준적 접근방식이며, 데카르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더 작은 조각들로 분해하여 그것들을 파악한 다음에 전체를 다시 조립한다. 그 전략은 환원주의라고 불리며, 생물학과 다른 자연과학에서는 그것의 성공이 더 제한적이었지만, 기초 물리학에서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윌슨이 염두에 두고 있는 듯 보이는 총체적인 이미지는 인간 문화의 복잡한 측면들―예를 들면, 문학―이 먼저 사회과학(사회학, 심리학)의 견지에서 이해된 다음에 생물과학(신경생물학, 진화생물학)에 의해 더 기계론적으로 이해되고, 마지막으로 물리학으로 환원되는 하향식 나선 이미지이다. 결국 모든 것은 쿼크들(또는 끈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지 않은가?

 

윌슨과 그의 추종자들이 어디서 잘못되는지 알 수 있기 전에 우리는 환원주의의 두 가지 의미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존재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존재론적 환원이 있고, 우리가 아는 것과 관련이 있는 인식론적 환원이 있다. 존재론적 환원주의는 실재의 바닥 층위가 여타의 모든 것(원자, 세포, 여러분과 나, 행성, 은하 등)을 설명하는 데 인과적으로 충분하다는 관념이다. 반면에 인식론적 환원주의는 바닥 층위에 대한 지식이 여타의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재구성하는 데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행성 운동과 셰익스피어에 대한 양자역학적 이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식으로 설득력 있는 아무 증거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론적 환원주의라는 관념은 물리학과 어떤 철학적 진영들에서 널리 수용된다. 진실을 말하자면, 쿼크들의 거동을 제어하는 법칙들이 사회와 은하의 층위까지 확대될 수 있는지 또는 거대한 복잡계들이 하위의 존재론적 층위들로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거동을 나타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론적 환원주의에 대해 불가지론적이다. 운이 좋게도 이 논의를 위해서 그것은 이런저런 식으로 중요하지 않다. 진짜 게임은 다른 방향에 놓여 있다.

 

인식론적 환원주의는 명백히 틀렸다. 우리는 핼성 또는 인간 행동에 관한 양자역학적 이론이 없으며, 결코 있을 가능성도 없다. 원칙적으로 가능할지라도, 그런 이론은 너무 복잡하여 계산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화학은 성공적인 환원을 거쳐서 물리학의 한 분야가 되었을지도 모르며, 확실히 신경생물학은 심리학에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가장 열성적인 물리학자조차도 아원자 입자들의 견지에서, 예를 들면, 생태계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인식론적 환원주의의 불가능성이 윌슨 유형의 통섭에 대한 중요한 한 제약이다. 그렇다면 큰 의문은 우리가 그 프로그램을 얼마나 멀리 밀어붙일 수 있는지이다.

 

명백한 곳에서 시작하자. 생물학의 견지에서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면, 유전자는 그것과 꽤 관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윌슨은 너무 세련되어 직접적인 유전자 결정론에 빠질 수 없다. 그 대신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전자들은 문화 획득을 고무하고 전달하는 감각 지각과 정신 발달의 규칙적인 점들인 후성발생적 규칙들을 처방한다'. 공교롭게도 나는 후성발생학에 관해 연구했다. 사실상 그 낱말은 식물 및 동물 발달 동안 끼치는 유전자들의 영향을 매개하는 모든 분자적 과정들을 가리킨다. 윌슨의 관점에서 비롯되는 문제는 생물학자들이 '후성발생적 규칙들'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것들을 어떻게 수량화해야 할지 또는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설명적 목적에 있어서 그것들은 공허하다.

 

윌슨의 다음 움직임은 리처드 도킨스의 '밈', 즉 문화적 진화의 단위라는 관념에 호소하는 것이다. 문화가 인간 사회의 환경에서 복제할 수 있는 개별적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진화론을 문화에 직접적으로 관련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유전자(또는 후성 유전자) 대신에 우리는 다윈주의적 원리들을 밈에 적용한다. 통섭에게 불행하게도 밈학의 연구 프로그램은 큰 곤란에 처해 있다.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바로 그 개념의 유용성, 심지어 정합성에 대해서 의심한다. 나의 진화생물학 동료인 제리 코인이 말했듯이, 그것은 '전적으로 동어반복적이며, 그것이 확산될 수 있는 성질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사후적으로 주장하는 것 외에는 어떤 밈이 왜 확산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실무 과학자에게 조작적으로 유용한 방식으로 밈을 정의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고, 왜 어떤 밈들은 성공적이고 다른 밈들은 그렇지 않는지 알지 못하며, 그리고 도대체 밈들을 구성하는 물리적 기체에 대해 아무 실마리도 없다. 사실상 <<저널 오브 미메틱스(Journal of Memetics)>>는 투고 논문의 부족으로 몇 년 전에 폐간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그 어느 것도 생물학이 인간 문화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들이고, 그래서 우리가 행하는 것의 많은 부분이 음식, 성,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물리적 존재들이며, 인류는 물리학을 활용하거나 우회하는 문화적 방법들을 찾아내었다. 우리는 중력이 부과하는 제한에도 불구하고 비행하는 비행기들을 제작했고,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서 피카소의 그림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생물학적 주제에 대한 끝없는 변주들을 만들어내었다. 각 경우에, 이른바 기초과학은 우리에게 전체에 대한 매우 부분적인 그림을 제공할 뿐이다.

 

지식의 통일이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우리가 우리의 그림 속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해야 하는 몇 가지 폭넓은 탐구 범주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다. 수학과 논리학을 생각하자. 윌슨은 이 분과학문들에 열중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논리를 사용하여 과학적 진술들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시도했던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철학적 운동, 즉 '논리실증주의와 함께 객관적 진리의 꿈은 절정에 이르렀다'. 수학도 그의 도식에 중요하다. 자연과학에서의 유효성 때문에 수학은 '객관적 진리라는 궁극적 목표을 향해 지향하는 듯 보인다'.

 

인간들이 '궁극적인 객관적 진리'의 과업에 종사하지 않는다는 꽤 잘 입증된 사실은 제쳐두자. 정작 과학적 지식은 수리논리적 지식과 같은 종류의 것인가? 그것들은 전적으로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에서 '사실'로 간주되는 것―예를 들면, 지구에서 작은 망원경을 통해 관찰할 수 있는 목성의 자연적 위성들이 네 개 존재한다는 진술―을 살펴보자. 이 위성들은 17세기에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우리 자신의 태양중심 체계 내의 태양 같은 체계의 최초 사례를 나타내었다. 실제로 갈릴레오는 이것을 그 당시에 매우 논란이 많았던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주요한 이유로 활용했다.

 

다른 한편으로,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 같은 수학적 '사실'을 고려하자. 또는 전제들의 특수한 조합들이 연역 규칙들에 따라서 참 또는 거짓 결론들을 산출하는 조건들을 말해주는 진리표 같은 논리적 사실을 고려하자. 이런 두 종류의 지식은 어떤 면에서 서로 유사하다. 수학은 일종의 논리적 체계로 여기는 철학자들도 있다. 그런데 둘 다 자연과학에서 이해되는 대로의 사실과 전혀 다른 듯 보인다. 그러므로 이 영역에서의 '지식의 통일'은 공허한 목표인 듯 보인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여기에 자연과학이 있고 저기에 수학이 있으며, 수학은 흔히 자연과학에 유용하다(그런데 결코 명료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는 것이다.

 

인문학을 과학으로 환원시키는 기획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한 유형의 사실을 고려하자. 나는 어쩌다 루트비히 반 베토벤의 음악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음악보다 더 훌륭하다고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내게 그것은 심미적 사실이다. 나는, 또한 이것이 논리수학적 사실과 자연과학적 사실 둘 다와 다른 구조와 내용을 갖는 '사실'(나의 음악 '지식'에 근거하는)이라는 점이 분명하기를 희망한다. 사실상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심미적 판단인데, 나는 그것에 강한 감정적 애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나는 심미적 판단 일반을 내릴 수 있는 내 능력이 내가 지금과 같은 종류의 생물학적 존재라는 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베토벤과 스피어스를 듣기 위해서라도 나는 특수한 종류의 청각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그 체계는 음악가들이 어떤 범위의 소리 진동수를 벗어나는 작품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까닭을 설명할 것이다. 그래도 베토벤 대 스피어스에 대한 나의 특수한 판단이 주로 내 문화와 심리와 양육의 결과라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듯 보인다. 상이한 시대와 문화에 속하거나 기질이 다른 사람들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그들은 내가 내 취향과 관련하여 강하게 느끼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취향과 관련하여 그럴 것이다(물론 그들은 '틀릴' 것이다). 명백히 '객관적이고 궁극적인 진리'라는 바로 그 관념이 범주 오류가 되는 인간 문화의 측면들이 있다.

 

모든 지식을 통일하는 것의 목적을 제쳐두자.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수천 년 동안의 탐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그렇게 잘 진행되고 있지 않는 듯 보이는데, 그것은 대체로 소수의 철학자들과 논리학자들, 특히 데이비드 흄, 버트란트 러셀, 그리고 쿠르트 괴델의 치명적인 기여 때문이다.

 

18세기에 흄은 현재 귀납의 문제로 알려져 있는 것을 명확히 표명했다. 그는 과학과 일상 경험 둘 다에서 우리가 철학자들이 귀납이라고 부르는 추리 형식―사례들로부터 일반화하는 것에 놓여 있는―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한 그는 우리가 귀납적 과정 자체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귀납적 추리가 신뢰성이 있다고 믿는가? 대답은 그것이 여태까지 작동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귀납적 추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귀납적 추리를 전개하는 것인데, 그것은 순환 논법인 듯 보인다. 많은 철학자들이 귀납의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문외한들과 직업적 과학자들이 채용하는 가장 흔한 추리 형식에 대한 독립적인 합리적 정당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절망에 빠진 채로 집에 가야 한다고 흄은 말하지 않았다. 사실상 우리는 귀납을 계속 사용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적 지식은 '그것이 작동한다'는 점 외에는 그 어떤 단단한 토대에도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틀림없이 정신이 들게 하는 사유일 것이다.

 

수학과 논리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20세기 초에 많은 논리학자, 수학자, 그리고 수리철학자들이 수학 및 수학과 유사한 형식 체계들에 대한 확고한 논리적 토대를 확립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그런 시도는 버트란트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 시도는 역사상 가장 불가해한 서적들 가운데 하나인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1910-13)을 낳았다. 그것은 실패했다.

 

몇 년 후에 논리학자 쿠르트 괴델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두 가지 '불완정성 정리'는 충분히 복잡한 그 어떤 수학적 또는 논리적 체계도 그 체계 안에서 증명될 수 없는 진리들을 포함할 것일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증명했다. 러셀은 자신의 기획에 대한 치명적인 이 타격뿐 아니라, 수학에서조차도 증명 불가능한 진리들에 만족해야 한다는 더 큰 교훈을 인정했다. 논리적 증명들과 수학적 정리들은 그것들 자체가 증명 불가능한(또는 삼단논법 같은 어떤 귀납적 추리의 경우에는 경험적 관찰들과 일반화―즉, 귀납―에서 도출되는) 가정(또는 공리)들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을 괴델의 결과에 덧붙이면, 객관적인 참 지식에 대한 추구는 환영으로 밝혀지는 듯 보인다.

 

이 지점에서 여기에 정확히 무헛이 걸려 있는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왜 윌슨과 그의 추종자들은 만물에 대한 통일 이론, 즉 인간의 지식을 이해하는 단일한 방식을 찾고 있는가? 윌슨은 자신의 책에서 명시적으로 대답을 제시하며,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의 몇몇 동료 여행자들, 예를 들면, <<최종 이론의 꿈(Dreams of a Final Theory)>>(1992)이라는 책에서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에도 암묵적으로 적용된다도 생각한다. 동기는 철학적이다. 더 구체적으로 그것은 심미적이다. 실제로 일부 과학자들은 설명의 단순성과 우아함을 높이 평가하고, 이 기준을 사용하여 상이한 이론들의 상대적 가치를 평가한다. 윌슨은 이것을 '이오니아의 마법'이라고 부르고, <<통섭>>의 첫번째 장의 제목을 그렇게 붙인다. 그런데 여기서 역설이 명백하다. 단순성도 우아함도 경험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들은 철학적 판단이다. 우주가 단순하고 우아한 이론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을 선험적으로 믿을 이유는 전혀 없으며, 그리고 실제로 물리학의 역사적 기록은 경쟁 이론들 가운데 가장 단순한 이론이 틀린 것으로 판명된 여러 사례들을 포함한다.

 

파괴 공작은 이제 그만 하자. 더 분별 있는 방식으로 윌슨의 통섭 같은 것을 재구성하는 것이 가능한가? 시각 예술에 관해 생각하자. 그것의 역사는 선사 시대 동굴 벽화, 미켈란젤로, 피카소, 그리고 현대 추상미술을 포함한다. 과학―아마도 진화생물학과 인지과학의 조합―이 우선 우리 조상들은 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지, 그뿐 아니라 우리는 왜 어떤 종류들의 유형들―예를 들면, 대칭적 도형들과 어느 정도 복잡한 반복 형태들―을 좋아하는지에 관해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당하다. 그런데 이런 종류들의 설명들은 수 세기 및 여러 문화들에 걸쳐 시각 예술을 수행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대단히 과소결정한다. 예를 들면,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대칭에 관련된 것이 아닌데, 사실상 그것은 대칭의 파괴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말 프랑스의 특정한 문화적 환경과 개별 예술가들의 이력과 심리를 거론하지 않는, 이른바 인상주의 운동의 등장에 관한 설명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수학의 경우에도 상황이 비슷하다고 알아챈다. 수를 세고 단순한 산술을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우리에게 진화적 이점을 부여했고, 그래서 자연선택의 결과였다는 점은 그럴듯하다.(그렇지만 이것은 사변적 논증이라는 점을 인식하자. 우리는 그 가설을 시험하는 데 필요한 그런 종류의 증거를 입수하지 못한다.) 그런데 도대체 대단히 추상적인 수학의 가능한 적응적 가치는 무엇인가? 진화는 왜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 수 있는, 앤드류 와일스의 뇌 같은 뇌들을 만들어내곤 하는가? 생물학은 인간의 독창성의 그런 위업들에 대한 배경 조건을 이루는데, 그것들을 완수하는 데 특수한 유형의 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학은 어떤 인간 문화들이 난해한 수학적 문제들을 푸는 데 자신들의 삷을 바치는, 흔히 사회적으로 서투른 사람들의 소집단을 결국 산출하는 역사적 경로를 어떻게 택했는지에 관해 따로 말할 것이 자체적으로 거의 없다.

 

또는, 마지막으로, 인간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측면일 도덕을 고려하자. 도덕의 진화적 기원에 관하여 많은 글들이 쓰여졌고, 훌륭하고 그럴듯한 많은 착상들이 제시되었다. 우리의 도덕 의식은 지적인 영장류로서의 사회 생활의 맥락에서 당연히 비롯되었다. 다른 사회적 영장류 동물들도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그들이 친족이 아닐 때에도―에 대한 공정성 같은 도덕의 기본 요소들에 부합하는 행동들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것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또는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에 이르는 길은 매우 먼 길이다. 이런 저작들과 개념들이 가능했던 까닭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생물학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문화사, 심리학, 그리고 철학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을 생각하자. 윌슨의 기획은 통일 가능한 범주로서의 인간 지식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그의 경우에, 분과학문 사이의 경계들은 제거될 필요가 있는 역사의 우연한 산물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 이상의 어떤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어쩔 것인가? 한 가지 흥미로운 견해가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언어에 관하여(Reflections on Language)>>(1975)에서―와 철학자 콜린 맥긴―<<의식의 문제(The Problem of Consciousness)>>(1991)에서―에 의해 상이한 맥락에서 제시되었다. 기본 착상은 인간의 뇌가 실재의 궁극적 본성을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홍적세 동안 사바나에서의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여기는 것이다. 이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가 과학이 허용하는 것만큼 많이 배우고 철학이 허용하는 것만큼 많이 숙고한다는 점은 유쾌하게 놀랍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 정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저 백만 자리의 수열을 외우려고 시도해 보라. 수 세기에 걸쳐 진화해 온 분과학문 사이의 경계들 가운데 일부는 우리의 인식적 한계를 반영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바라보면, 철학, 생물학, 물리학, 사회과학 등 사이의 차이점들은 강단 행정가들과 교수진의 자의적인 변덕의 결과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인간들이 세계와 그 속에서 인간의 역할을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을 반영할지도 모른다. 어떤 절대적 의미에서 우리 지식을 조직화하는 더 좋은 방식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고안해낸 것이 어떤 역사를 지닌 생물학적-문화적 존재들로서의 우리에게 잘 작동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포기하라는 제안이 아니며, '과학을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금지 명령은 더욱 더 아니다. 과학을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과학 앞에 중요한 것이 있다. 문학, 음악, 그리고 시각 예술에 의해 표현되는 인간의 감정들이 있다. 문화가 있다. 역사가 있다. 인류가 희망할 수 있는, 전체 골격에 대한 최선의 이해는 우리의 모든 다양한 분과학문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를 포함할 것이다. 이것은 통섭에 대한 추구보다도 인간의 지식에 대한 더 겸손한 자세이지만, 역설적으로 자연과학이 인간이라는 것에 관해 말해주는 것과 더 잘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