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마크 잔느로 : 우리는 우리 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서문

댓글 2

카테고리 없음

2013. 5. 5.

 

―― 아래 글은 마크 잔느로(Marc Jeannerod)가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의 책 <<우리는 우리 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What Should We Do with Our Brain?)>>(2008)에 붙인 서문을 옮긴 것이다.

 

서문

Forward

 

뇌는 항상 기술적 은유로 서술되었다. 빛을 반사하는 거울처럼 정확히 흥분을 전달하는 장치로서, 정기를 근육으로 추동하는 수압 펌프로서, 통신을 연결하거나 단절하는 중앙전화교환국으로서 서술되었으며, 디지털 시대에는 프로그램을 돌리는 컴퓨터로서 서술된다. 카트린 말라부(Catherine Malabou)가 진술하듯이, 이런 은유들은 뇌를 하향식으로 작동하는 기계, 움직임을 명령하고 행동을 통제하며, 마음, 의식, 그리고 인간의 통일체를 생성하는 기계로 간주하는 중앙집중적 개념에서 비롯된다. 예전에는 중앙집중적이고 통일적인 이 견해가 참으로 통치의 이상―모든 것을 명령하고 조직하는 단독 지도자, 단독 수장―을 표상했다. 나폴레옹 통치 시기 동안 프란츠 조셉 골(Franz Josef Gall)이 직면했던 어려운 점들을 회상하자. 마음을 뇌의 상이한 영역들에 분산된 능력들로 분할하는 그의 체계는 지배 권력층에 의해 국가의 통일성과 안정성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뇌 가소성(plasticity)은 이 개념을 산산히 부순다. 그 기계는 학습하고, 스스로 분화하며, 자체를 재구성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그것은 법칙보다 사건에 특권을 부여한다. 도처에 존재하는 가소성은 뇌와 뇌의 기능 작동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바꾼다. 그런데 말라부는 더 나아가서 배선된 뇌에서 조형적 뇌로의 전환이 정말로 "뇌-기계'에서 "뇌-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말라부에 따르면, 이런 시각 변화는 대뇌의 기능 작동에 대한 모형뿐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사회 조직에 관해 우리가 구성하는 개념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대 신경과학에 의해 점진적으로 해명된 새로운 뇌 모형은 특별한 맥락에서 출현한다. 그것은 경제적 및 사회적 환경의 본원적인 수정과 함께 발생한다. 자본주의의 모습이 변했는데, 중앙 당국이 위로부터 관리하고 감독하는 계획 체계에서 역동적이고 다극적인 동시에 환경에 적응하는 자율적 조직으로 이행되었다. 이런 새로운 조직 모형은 명백히 대뇌 현실과의 유사점을 시사한다. "신경의 응집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업 경제 조직과 사회 조직은 중앙집중적 또는 중앙집권적 유형이 아니라, 연결주의적 모형에 따라 배치되는 다수의 유동적이고 원자론적인 중심들에 의존한다"(p. 42). 우리는 우리의 사회경제적 조직에 자체의 모형을 부과할 "신자유주의적" 뇌를 지니고 있지 않는가? 또는 거꾸로, 전지구적 경제의 격변이 뇌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전염을 통해 영향을 미칠 개념적 변화를 야기하지 않는가?

 

현대 기업과 뇌의 기능 작동 사이의 유사성은 정말 현저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사결정 중심들은 분산되어 있으며, 그리고 연결망들은 실행되어야 할 과업과 실현되어야 할 목적에 따라서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런데 이런 유사성은 한계가 있다. 뇌에서는 탈국소화가 전체적이지 않거나, 오히려 국소화가 우발적이지 않다. 뇌는 발생 단계에서 발달하는 연결 조직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각 영역, 특히 대뇌 피질의 각 영역은 자체의 연결들과 정보처리 라인에서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상의 전문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적절한 모형은 다중능력적인 특성보다 부수적인 특성을 가질 것이다. 병리학적 국소 병변들은 특수한 기능(예를 들면, 언어처리)의 변경이 다른 기능들(음악처리)을 그대로 유지시킬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슷하게도, 병변 영역을 보완하기 위해 손상받지 않은 영역을 재활용하는 것은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 작동한다. 교체 수술을 통해 연결망을 복구하는 것은 탈전문화와 성능 상실의 대가를 치른다. 우울증을 유발하는 전신 질환의 경우에, 탈전문화는 탈퇴, 사회적 유대의 단절로 나타나며, 개인을 연결망의 외부로 추방한다. 말라부가 우울증 같은 사회적 연결의 질환들과 알츠하이머 치매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 사이에서 유사성을 끌어내는 것은 올바르다. 두 겅우 모두 연결망의 나머지로부터의 단절을 포함한다. 전자의 경우에는 재연결이 가능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이것 때문에 치매가 가소성의 반대 모형인 듯 보이는데, 대뇌 연결망의 핵심에서의 치료 불가능한 연결들의 손상은 사회적 연결망으로부터의 명확한 단절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대뇌 조직과 사회경제적 조직 사이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는 특히 주체와 그의 뇌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게 된다. 견고한, 미리 결정된, 지시하는 기관이라는 테제를 부드러운, 적응 가능한, 조형적 기관이라는 테제로 대체함으로써 뇌의 정치적 해방, "소비에트적" 뇌에서 "개방적인" 뇌로의 전환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런 개념적 반전이 각 개인에게 미치는 결과는 무엇인가? 뇌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중세 시대의 인간들, 산업혁명 시기의 인간들, 그리고 자유주의 혁명 시기의 인간들은 모두 동일한 학습 능려과 적응 능력을 갖춘 동일한 뇌를 지니고 있었다. 변화하는 것은 사회의 조직, 즉 뇌가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조직적 힘과 거시적 상호작용들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문제는 한 개인의 뇌가 자체의 사회적 환경의 도전들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말라부는 자신의 책을 이런 문제 제기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말라부의 경우에, 뇌는 우리의 성격, 우리 자아의 근본적인 유기적 정합성을 가능하게 한다. 자아는 뇌를 구성하는 신경 연결망들의 질서정연한 기능 작동의 결과물, 반영물이다. 결국 이것은 우리 표상들의 내적인 정합성을 보증한다. 다른 한 층위에서 유기체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내부 환경의 조절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뇌는 신경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의 종합을 보증함으로써 우리의 심리 상태들의 항상성을 조절한다. 명백히 우리는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고 그것의 연속성을 보증하는 조형적 메커니즘들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데, 말라부가 제안하듯이, 우리는 그것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새로운 자유, 즉 환경의 영향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우리 자신의 조직을 부과하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가소성은 유연성(flexibility)이 아니다. 유연성은 순응 메커니즘인 반면에 가소성은 적응 메커니즘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적응은 순응이 아니며,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가소성은 자본주의가 꿈꾸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순응하는 것에 대한 구실로 뢀용되지 말아야 한다.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가 우리 뇌와 관련하여 해야 하는 일이다"(p. 78). 자기 뇌의 가소성을 인식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