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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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 글라이저: 오늘의 에세이-신, 아인슈타인, 그리고 우연의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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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0.

 

신, 아인슈타인, 그리고 우연의 게임

God, Einstein and Games of Chance

 

―― 마르첼로 글라이저(Marcelo Gleise)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나는 독자들이 1926년에 아인슈타인이 동료 물리학자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에 적은 이 유명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확신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인슈타인이 어떤 신 그리고 어떤 주사위를 가리키고 있는지 그렇게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걱정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설명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에 관한 깊은 우려를 반영한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란이 많은 쟁점인 과학의 본질의 핵심을 거론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물리학, 즉 분자, 원자, 그리고 아원자 입자들―전자와 힉스 보존 같은―의 행동을 서술하는 물리학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사위"는 확률, 즉 양자 세계에서는 우리의 고전적 세계관의 안락한 결정론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객체들은 A지점에서 B지점까지 매끈한 역사들을 좇는다. 매우 작은 것들의 영역에서는 이런 결정론이 완전히 파산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어떤 입자가 공간의 이런저런 지점에 있을 것(측정 장치의 정밀도 내에서)이라는 확률을 계산할 수 있다. 훨씬 더 당혹스럽게도, 우리는 어떤 입자를 탐지하기 전에는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도 말할 수 없다. 우리에게 있는 전부는 잠재태다.

 

극단적인 해석에 따르면, 우리는 탐지 행위가 입자를 "만들어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맞다면, 더 큰 객체들의 경우에는 어떠한가? 그것들은 양자 객체들인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가? 산은 우리가 바라볼 때에만 존재하는가? 확실히, 그것은 터무니없다. 보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에베레스트 산이 저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것을 상식에서 추론하는가?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예측적 결정론의 상실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서술에서 최종적인 말일 수가 없었다. 더 깊고 더 넓은 다른 한 이론이 양자 세계의 역설들을 틀림없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옳았는가?

 

팔십 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아마도 대안적 이론에 대한 창을 개방할, 전통적인 양자역학에서 결함을 발견하기 위한 실험들이 거듭 시도되었다. 모든 실험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말로 양자역학이 여기 머물러야 하는 듯 보인다. 자연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며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한 입자의 위치와 속도 둘 다를 임의적으로 정확히 알 수는 없다고 진술하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지식에 대한 장벽을 넘어선다. 그것은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듯 보이며, 그리고 양자물리학의 엄청난 성공은 매우 당혹스러운 사태를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한 증언이다.

 

아인슈타인이 보른에게 보낸 편지 속의 문장은 사실상 위의 단편과 다르다.

 

양자역학은 진지하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면의 목소리는 제게 이것은 진정한 야곱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이론은 많은 것을 달성하지만, 우리를 오랜 일자의 비밀에 더 가까이 데려다 주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나는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오랜 일자"는 유대기독교적 신이 아니라 자연의 내부 정신, 즉 실재의 본질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의 목적은 이 본질을 드러내는 것, 즉 자연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밝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우리의 과학 이론들이 참으로 진행 중인 것에 대한 불완전한 근사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식했다.

 

자연 속에서 내가 보는 것은, 우리가 오직 매우 불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그리고 사유하는 사람의 마음을 겸손의 느낌으로 충만하게 하는 장엄한 구조이다.

 

아인슈타인을 괴롭혔던 것은 양자역학에 대한 해석이 자신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방식이었다. 그에게, 우리가 그것과 상호작용할 때에만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진술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와 슈뢰딩거와 플랑크와 드 브로이는 과학적 실재론자들이었다. 그들은 관찰자에 독립적인 사물들의 근본적인 실재성을 믿었다.

 

하이젠베르크, 보어, 파울리, 요르단, 그리고 디랙은 다른 길을 갔는데, 그들은 양자역학의 기묘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다. 탐지가 실재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매우 작은 것들의 세계를 탐지기들이 존재하는 매우 큰 것들의 세계와 연결한다.

 

전자가 어떻게 원자 핵 주변을 공전하는지 서술하는 방정식인 슈뢰딩거 "파동역학"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파동이 일상에서 관찰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애초에 그것은 온전한 정신으로의 복귀로 찬양받았다. 연못에 돌 하나를 던지면 물 파동이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 바깥으로 전파한다. 진행되는 일을 서술하는 방정식이 있다. 그런데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에서 파동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었다. 슈뢰딩거의 시행착오 후에 보른은 그 파동이 잠재적인 것들의 파동이라는 기묘한 관념을 고안했는데, 일단 적절히 제곱을 취하면(전문가들의 경우에, 파동함수가 복소수의 양이기 때문에 절대값을 취한다) 그 파동은 주변을 공전하는 이런저런 궤도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제시할 것이다. 그 방정식이 적용되는 다른 상황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는 항상 어떤 종류의 확률이다.

 

다시 말해서, 물질에 대한 근본적인 방정식은 물질을 서술하지 않았다!

 

자연의 본질은 어떤 구체적인 물질적 영역이 아니라 수학적 추상물이었다. 그 이론은 멋지게 작동하였으며, 셀 수 없이 많은 실험들에 대한 효율적인 서술들을 제공하였다. 양자물리학은 세계를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그것의 해석은, 여러분이 그것에 관해 생각하려고 한다면, 여전히 불가사의하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과 관련시킨 문제였다. 오늘날에도, 양자역학이 말하고 있는 바에 관해 생각하도록 강하게 압박당했을 때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최소한 불안의 낌새를 나타낼 것이다. "그런 쟁점들은 고려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 일반적인 논평이다. 또는 성가신 대학원생이 제기한다면, "입 닥치고 그냥 계산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확실히, 1686년에 프랑스의 박식가 베르나르 드 퐁트넬이 적었듯이,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알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기에 문제가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큼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