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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코츠코: 오늘의 에세이-당국가로서의 미합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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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17.

 

당국가로서의 미합중국

The U.S. as a party-state

 

―― 애덤 코츠코(Adam Kotsko)

 

어제 트위터 상에서 나는 미합중국의 통치 형태는 가장 근본적으로 입헌 공화국이 아니라 당국가 형태의 한 변양태―차이점은 단 하나의 당 대신이 두 개의 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과감하게 표명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이십 세기의 거대한 당국가 형태들, 즉 파시즘과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지배적인 분석은 "전체주의"라는 잘못된 개념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적 규범을 통해 당국가 현상을 해석함으로써 "전체주의적" 분석은, 시민사회 또는 사적 영역 같은 것이 더 이상 바람직한 자율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일하게 남은 유효한 권력 중심으로서의 국가가 과도하게 지배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에서 푸코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상황을 대단히 오도하는 것이다. 당국가의 문제는 공식적인 국가 조직들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들이 너무나 약하여 그것들을 도구화하는 당 운동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는 공식적인 국가 조직들이 "존재"하지만, 공산당은 본질적으로 그것들을 무시한다―사실상 공산당은 법률에 입각한 조직으로 인식되지도 않는다.

 

미합중국에서 당국가는 자체가 당국가가 아닌 것처럼 가장함으로써 작동한다. 오바마가 공화당이 아니라 "의회"를 신랄하게 비판할 때와 파당을 방지하고자 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바람이 현대 정치의 조작적 규범으로 제시될 때처럼, 입헌적 규범과 권력 분립은 끊임없이 입에 발린 호의를 받는다. 그럼에도, 입헌적 권력 분립은 통치의 기능에 있어서 당 구조보다 덜 중요하다. 사실상, 기회가 제공될 때마다 양대 정당은 미합중국 헌법의 결점들을 이용한다. 더 광범위하게, 양대 정당은 반대당의 불법적인 "당파성"을 겨냥함으로써 자신들의 부패나 무능함을 은폐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야심찬 "초당파주의"는 양대 정당이 미합중국 인민들의 의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자축할 수 있게 하는 메커니즘으로 주로 작동한다.

 

그런데, 수사학적 전략과 정치적 전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양대 정당에 의한 패권이 법을 초월한다―권력 장악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법적 제재를 모면한다는 의미에서―는 의식이다. 두 가지 점 모두에서 미합중국의 양대 정당은 기준에 부합된다. 생존 가능한 제3당의 발전을 가로막는 법적인 제약은 상당하며, 한편으로 공식적인 국가 장치는 정당 활동(예비선거 같은)을 보조하고 조정한다. 한 정당이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한 지역들에서조차도, 결정적인 선거는 당 예비선거의 맥락에서 수행될지라도, 공식적인 선거는 거의 항상 형식상 민주당 후보와 공화당 후보 사이에 벌어진다. [...] 입법 기구들의 규칙들은 양대 정당 사이의 권력 교대를 가정한 상태에서 작성되며, 그 어떤 독립당도 법률을 제안하기 위해서는 양대 정당 가운데 한 정당과 "협의"해야 한다.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양대 정당에 의한 패권이 양대 정당을 법 위에 군림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현재 전개되고 있는 미합중국 국세청 스캔들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세금 문제에 대해서 티파티 조직들이 결코 완전히 정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매우 좋은 이유들이 있지만, 공식적인 국가 장치는 그런 조사를 수행한 요원들을 물러나게 하고 제재할 가능성이 높은데, 법에 의한 지배보다 양대 정당에 대한 중립성이라는 외양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시 정권 시절의 전범들을 기소할 수 없는데, 그것은 불법적인 "당파적" 행위일 것이기 때문이다. 클린턴과 오바마 둘 다 비슷한 잔혹 행위들을 저질렀다는 점을 고려하면, 부시의 기소에 수반될 불가피한 공화당의 불평―그것은 정말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에 꽤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양대 정당이 참으로 법을 초월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왜 부시와 오바마 둘 다를 그냥 기소할 수 없는지 물을 때이다. 외교 정책에 대한 초당파적 동의는 가장 신성한 국제법의 규범도 이긴다.

 

이 상황은 미합중국의 역사에서 최근에 전개된 것이 아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는 전문성은 내게 없지만, 양당 체계는 일찌기 발달했으며, 서부 주들의 연맹 가입 허용 같은 중요한 쟁점들도 지배적인 양대 당파 사이의 균형 유지를 겨냥한 채로 이루어졌다. 그것은 대체로 북부 대 남부의 형식을 취했지만, 20세기에는 상황이 뒤범벅이 되었다. 그 시기 동안 양대 정당은 많은 쟁정들에 대한 입장들을 교환했으며―남부의 지배적인 정당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교체된 점이 가장 유명하다―진정으로 이념적인 다양한 정파들이 양대 정당 사이에 흩어졌다( 두 당 모두 진보파와 보수파가 있다). 이런 이념적 비정합성과 혼란 상태의 결과는, 양대 정당에 의한 패권을 유지하는 것 외에는 실질적 목적이 전혀 없다는 의미에서 미합중국 당국가가 독특하게 허무주의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내 기준에 의하면, 진정한 입헌 공화국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당국가만 존재할 뿐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일지도 모르겠지만, 권력의 형식적 수단들이 그것들을 조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 "중립적"이 되도록 정당 체계가 진정으로 더 개방적인 나라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기본적인 정부 기관들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임명자들의 순환 배치에 대단히 의존하는 미합중국 국가 장치에 비교하면, 거의 모든 근대국가는 정권이 바뀌는 동안 연속성을 유지하는 더 전문화된 국가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대부분의 정부들이 입헌 공화국보다 당국가에 더 가깝다는 점이 참이라면, 그것은 규범적인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분석이 국가의 중요성을 대단히 과장했다는 점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공식적인 국가 장치는 약해지고 소극적으로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거의 아무도 국가 자체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국가는 정치적 투쟁의 여러 현장들 가운데 하나이고, 그들 자신의 선호하는 의제를 위해 동원될 일련의 장치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 장치의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입에 발린 말을 할 것이지만, 그것이 자기 편을 불리한 위치에 처하게 할 때는 거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의사진행 방해 제도의 개혁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인민들이 볼 때 상원의 비효율성이 의회와 연방정부 전체의 신뢰성을 파괴하지만, 양당 모두 절차 개선에 착수할 의도는 전혀 없는데, 양당 모두 자당이 소수당이 되었을 때 의사진행 방해 제도가 주는 잠재적인 이점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적인 경향에 대한 유일한 평형추는 국가가 자체적으로 정치적 행위자가 되어 자체의 권능을 수호할 수 있도록 국가 장치 자체의 강건한 단체 정신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식 정치적 임용 체계는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일어나지 못하게 막으며, 양당 모두 상황을 바꿀 동기가 없다. 그리고 어쨌든 미국인들이 태어날 때부터 주입받게 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그들로 하여금 넓은 범위의 잘 관리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효과적인 국가 관료제를 전체주의적인 파시스트적 공산주의을 향한 첫걸음으로 두려워하도록 가르친다. 사실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양대 정당에 의한 패권이 실제로 행하고 있는 것은 미합중국 체계를 20세기 "전체주의"에 가장 유사하게 만드는 것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