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암흑 존재론과 종교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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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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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틀 속에는 깊은 상처를 입히는, 깊은 절망을 유발하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의미와 목적과 안락에 대한 선험적인 보증을 박탈하고, 사물의 우주적 도식에서 [...] 인간들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하며, 여타 존재자들에 대한 인간들의 우수성에 관한 주장들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틀이다. 나는 루크레티우스, 스피노자, 흄, 니체, 프로이트, 다윈, 마르크스, 데리다, 라캉, 들뢰즈 등과 같은 탈신학적 사상가들이 독자들 사이에서 매우 격렬한 반응들을 끊임없이 초래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그들의 작업의 얼마간 환원주의적이거나 과학주의적인 결점이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자기도취와 인간중심주의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

 

종교 문제에 관하여, 내 입장은 나의 몇 가지 진술이 시사할 것보다 더 복잡하다. 먼저 나는 믿음―종교적 믿음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믿음이든 간에―이 사회적 동학이 현재의 형식을 취하는 데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작은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는 자본주의적 동학은 사람들이 그것과 관련하여 믿는 바와는 무관하게 [...] 그냥 잘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비판들이 자본주의에 이의를 제기함에 있어서 매우 제한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수반한다. 그런 비판들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계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얼마나 반하는지 이해하는 데 [...] 도움이 되는 귀중한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들이 그것을 넘어서는 많은 일을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상 [...] 나는 이런 것들의 효험에 대해 점점 더 냉소적으로 되었다. 비판이나 반대 논변이 얼마나 강력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

 

둘째, 이른바 신(新)무신론자들(도킨스, 히친스, 데닛 등과 같은 사람들)은 종교가 정말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지 오인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종교를 개인들이 지니는 일련의 명제적 태도나 믿음으로 간주한다. 그 결과, 그들은 종교의 정체를 합리적으로 폭로하는 것을 종교를 패퇴시키는 방법으로 여긴다. 그들이 놓치고 있는 점은 대다수의 "종교 신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도대체 진지하게 또는 문자 그대로 간주하지는 않으며, 그리고 흔히 자기 종교의 신학을 알지도 못한다는 것이 참일 것이라는 점이다. [...]

 

종교가 신무신론자들이 생각하는 것―여기서 신무신론은 경제적 활동을 개인의 명제적 태도를 초월하는 사회적 동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별적 행위자들로 간주하는 부르주아 경제 이론을 반영한다―처럼 일차적으로 믿음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면, 종교는 무엇과 관련된 것인가? 나는 종교란 일종의 사회적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종교는 누군가가 믿는 것보다 흔히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적 관계와 정동적 관계들과 훨씬 더 관련이 있다[...]. 이것이 신무신론자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점이다. "신자들"이 흔히 자신의 신학을 의문시하는 것을 혐오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것들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표식들을 버리는 것이 가족 관계, 우정, 사업 관계, 낭만적 관계, 그리고 수 많은 다른 사회적 및 지원 관계들을 단절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셋째, 내가 흔히 기독교와 관련하여 문제가 있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매우 자주 정말로 비기독교적이기 때문이다. [...] 나는 예수가 폭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바라보는 대로의 문제는, 복음서와 <<도마 복음>> 같은 다른 저작들에서 내가 읽은 예수와 제도적 기독교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가 거의 아무런 유사점도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도적 기독교도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고(얼마나 자기도취적인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사람들이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많이 걱정하며, 중독된 사람들을 돕는다. 기타 등등.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가 읽는 예수는 부자들, 독선적인 종교적 근본주의자들, 도덕주의자들에 정말 화를 내고, 성소수자와 불법 이민자들 같은 주변인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타인들을 용서하는 것[...], 평화적인 저항, 무정부주의적 민주주의와 다른 많은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 [...] 기독교의 주요한 분파들 가운데 많은 것에서 우리는 조목조목 그리스도와 그의 윤리적 및 정치적 메시지의 반전을 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과거에 나는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음모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즉시 그의 가르침을 소독하고, 예수가 정말로 우리로 하여금 참전하고, 주변인들을 배제하고, 죄(인)를 증오하고,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확신하며, 왕과 경제적 권력자들에 복종하도록 고무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종류의 지적인 조작에 관여함으로써 그의 가르침의 외상을 근절하기 시작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반전과 그것이 일어났던 방식―근대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 종교라는 점을 잊지 말자[...]―이 서양사 전체에서 가장 매혹적인 심리적-기호적-사회적 드라마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그런데 나는 왜 [과학에] 신경을 쓰는가? [...] 기후 변화, 그리고 특히 기후 변화 부정주의 때문이다. [...] 나는 인간들이 유발한 기후 변화, 그리고 물과 에너지 자원의 부족이 오늘날 우리가 집단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크고 가장 심각한 실존적 위협이라고 믿는다. 나는 미합중국 인구의 상당한 부분이 기후 변화를 믿지 않거나[...] 기후 변화를 지지하는 과학이 저질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이것을 성찰하기 시작했을 때 깨달았던 바는 기후과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도르노, 하이데거, 탈근대주의자들, 라투르 등에서 파생된 그런 종류들의 논변들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나는 나쁜 연구, 연구에 있어서 인종주의적 편견, 과학 연구에서 정치, 군사, 그리고 경제가 담당하는 역할 등을 지적할 수 있는 비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과학 자체를 거부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내가 최근에 옹호한 허무주의(아무 우주적 의미도 없고, 아무 우주적 목적도 없고, 우리는 영혼이 없으며, 우리는 결코 다른 행성들을 식민지로 삼지 못할 것이라는 등의 주장들)는 도대체 무엇과 관련된 것인가? [...] 니체 때문이다. 허무주의의 역사에서 니체는 플라톤적 형상, 자연의 목적, 우리를 살피고 미래의 최선을 겨냥하는 신의 섭리, 사후의 삶의 존재 등에 믿음이 현세, 우리의 육체, 그리고 생명에 대한 일반화된 경멸을 어떻게 낳았는지 보여주었다. 섭리, 플라톤적 형상, 사후의 삶 등으로 이루어진 내세가 참된 실재라면, 현세의 삶, 이 세계, 이 행성 등은 가치가 거의 없거나 전혀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을 내키는 대로 파괴하라. 이 세상은 우리의 다음 목적지, 즉 참된 실재에 이르는 도중에 있는 정거장일 뿐이다.

 

내가 비상구가 전혀 없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원하는 까닭은 모든 것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내세에 대한 믿음이나 현세로부터의 탈출에서 비롯되는 이런 허무주의를 관통하여 이것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전부이기 때문에 현세와 현세의 삶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윤리적 감성에 이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는 충분하다!"라고 말하고 [...] 현세와 현세의 삶에 주목하는 윤리적-존재론적 감성을 계발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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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