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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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접촉, 지각,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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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19.

 

접촉, 지각, 소통

Touch, Perception, Communication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멋진 책인 <<물리학의 탄생(The Birth of Physics)>>에서 세르(Serres)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영상(시뮬라크르) 이론[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4권]은 소통 이론이다. 테두리, 외피, 껍질은 객체로서 또는 전송자에서 수신자로 객체 공간을 통과하여 비행한다. 우리는 전송시에 이런 피막들이 어떻게 발산되는지, 이런 섬세한 껍질들이 어떻게 떨어지게 되는지 안다. 즉, 우리는 그것들이 어떤 속도로 어떻게 소통 공간을 가로지르는지 안다. 마지막에, 수신시에 감각적 장치는 이 섬세한 막과 접촉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각, 후각, 청각 등은 촉각일 뿐이다. 영상 이론은 흐름에 관한 일반 이론의 특수한 일례이고, 소통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순환이며, 지식은 존재와 다를 바 없다.

 

객관적 실재에 열정적으로 관심이 있는 모든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루크레티우스는 시각이 아니라 촉각의 천재였다... 지식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과 직접 접촉하게 되는 것이다[sic.]. 게다가 사물들은 우리에게 온다. (106-7)

 

여기서 우리에게 놓이는 것은 여러분의 입장이 진정으로 유물론인지 관념론인지 결정하는 단층선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4권으로 루크레티우스는 지각과 지식의 문제들을 대면하게 된다. 1권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아무것도 무로부터 생겨날 수 없다"는 원리를 자신의 존재론의 첫번째 공리로 삼았었다. 그에게 이것은 모든 것이 일어나는 데에는 자연적, 물질적, 또는 물리적 원인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이것 때문에 지각(그리고 지각의 한 아종인 소통)이 꽤 불가사의해진다. 내 고양이는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다. 내가 고양이와 직접 접촉하지 않고 있음에도 나는 어떻게 저곳에 있는 것을 지각할 수 있을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에 대한 지각이 가능하려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물과 어떻게든 접촉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불가능한 까닭은 내 고양이는 저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영상 이론을 살펴보자.

 

...이제 그대에게 말하기를 시작하겠노라, 저것들과 긴박하게 연관된 것을, 우리가 사물들의 영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존재함을. 그것은 사물들의 몸 표면에서 벗겨진 막같이, 공기 중에 저쪽으로 이쪽으로 날아다니며...

 

그러므로 나는 말하노라, 사물들의 영상과 섬세한 형상은 사물들로부터, 그것들의 몸체 표면에서 발산된다고. 그것을 우리는 다음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아무리 둔한 가슴을 가진 자라 해도. [...] 먼저, 지각 가능한 사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몸체들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일부는 느슨하게 흩어진 채로, 마치 나무가 연기를, 불이 열기를 내보내듯, 또 일부는 좀 더 짜임새 있고 치밀한 것을, 가령 이따금 여름에 매미들이 매끈한 투니카를 벗어 놓을 때처럼, 그리고 송아지들이 태어나면서 몸 표면에서 막을 떨어낼 때처럼, 또 마찬가지로 미끌미끌한 뱀이 가시에 옷을 벗어버릴 때처럼, 왜냐하면 자주 우리는 보니 말이다, 가시덤불들이 저 뱀들에게서 날아온 전리품들로 더 불어나 있는 것을. [273-5]

 

루크레티우스의 테제는, 지각이 가능한 까닭은 모든 육체 또는 객체들이 공중을 날아서 관련된 감각 기관과 접촉하는 뱀 허물 같은 일종의 막을 발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프란츠 파농(Frantz Fannon)의 사진처럼, 시각적 영상 형식이든 소리 형식이든 냄새 형식이든 전기신호 형식(다른 생명체들 중에 상어와 뱀장이들이 감각한다)이든 간에 모든 존재자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비행하는 영상들이 존재한다. 시각의 경우에, 루크레티우스는 내용에 있어서는 틀렸지만 정신에 있어서는 옳았다. 육체들이 영상들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광자들이 육체들로부터 반사된 후―광자의 파장은 반사 대상의 특성들에 의해 변한다―에 공간을 통과하여 눈에 닿는다.

 

세르가 루크레티우스에 관하여 모든 감각은 촉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것은 시뮬라크르의 매개를 통하여 지각하고 소통하는 주체가 문자 그대로 시뮬라크르와 접촉하기 때문이다. 모든 소통과 지각 행위에서는 문제 그대로 접촉이 일어난다. 여담으로, 현상학적 틀 내에서는 이 모든 것을 식별하기가 불가능해지는데, 현상학적 에포케에서 자연적 태도를 배제함으로써 물질적 관계들이 보이지 않게 되기 떄문이다. 어딘가에서 들뢰즈가 말하듯이, "모든 현상학은 부수현상학(epiphenomenology)이다". 현상학은 원인들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은 채 결과들을 서술한다(원인들은 감각을 부여하는 의식에 현전하지 않기 떄문이다). <<에티카>>에서 스피노자가 매우 끈기 있게 보여주었듯이, 이것은 잠재적으로 매우 파괴적인데, 우리는 흔히 정확히 무엇이 우리의 정동적 상태들을 유발하는지에 대해 혼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내 우울증의 원인이 사실상 내 몸의 화학적 불균형 때문이지만 빚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의식은 이런 원천들 가운데 어느 것이 원인인지에 상관없이 같은 것을 경험한다. 우리는 설명되어야 할 것을 알 필요가 있는 것만큼이나 현상학에 의해 제공되는 것들과 같은 훌륭한 설명들이 필요하지만, 대단히 부정확할 수도 있는 통속심리학적 설명들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예를 들면, 한 여성이 막 출산을 하고 호르몬 변화를 겪고 있을 때 나타나는 우울증을 오이디푸스적 견지에서 설명하는 19세기 의사).

 

루크레티우스의 대담한 테제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자들 사이를 매개하는 영상들이 물질적이거나 물리적인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것들은 무언가이다. 그것들은 질료다. 영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허공을 통과하여 여행하는 실재적인 물질적 존재자다. 그것들은 세 가지 점을 수반할 것이다. 1)영상들은 실재적인 물질적 효과를 낳는다. 2)그런 효과를 낳기 위해서 영상들은 공간 또는 허공을 통과하여 여행해야 한다. 3)영상은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여기서 나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차이로 되돌아간다. 무엇보다도, 관념론자는 소통의 물질성을 간과한다. 관념론자의 경우―이것을 결코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에, 어떤 관념이 순식간에 전 세계에 걸쳐 전파되는 데에는 그것을 표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관념의 물질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관념은 공간, 시간, 그리고 채널들의 모든 제약을 벗어나는 자유로운 것이다.

 

반면에, 유물론자의 경우에는 모든 소통과 지각의 물질성, 즉 촉각이 모든 감각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라는 사실이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물론자는 소통과 지각의 물질성을 단순히 무시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물질성이 만들어내는 차이점들―소통의 내용에 덧붙여―에 주목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권력에 관한 어떤 의문들을 제기하는 일련의 질문들을 낳을 것이다. 1)두 존재자 사이의 소통 시간과 소통 매체는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여러 해 전에 리오타르가 <<분쟁(The Differend)>>에 대한 서문에서 제시한 발언을 반복하면, 권력은 시간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시간을 쥐고 있는 자, 아무 시간도 남기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소진시킬 수 있는 자, 속도를 통해서 시간을 정복할 수 있는자 등이 권력자다. 최근에 내가 논증하려고 노력했듯이, 권력은 담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이며, 의미작용적인 것이라기보다 시간정치적인 것이다.

 

2)유물론자는 관념들의 지리학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관념들이 여행하는 영상들이라면, 그것들은 자체의 장소들, 즉 지리학이 있을 것이다. 기표와 "언어"에 관한 조잡한 논의들에서 관념론자가 암묵적으로 생각하듯이 그것들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곳들에만 존재할 것이다. 이것―관념들이 자연선택의 지배를 받는다는 착상이 아니라―이 모든 사람이 싫어하기를 좋아하는 밈 이론의 중요한 기여점이다. 밈 이론가들은 질병이 지리학을 갖는 것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관념도 지리학을 갖는다는 점을 가르쳐준다. 관념들은 여행해야 하고, 자체의 공동체가 있어야 하며, 세계 속에서 자체의 장소들이 있다. 대륙철학의 학파들에서는 매우 낯설지도 모르는 관념들이 매체 연구나 사회학에서는 속속들이 퍼져 있을 수도 있다. 프랑스와 미합중국 서부 해안 지역에서는 매우 흔할지도 모르는 관념들이 그리스에서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관념들은 공간을 통과하여 여행해야 한다. 관념들이 여행할 고속도로가 존재하는가? 상황이 변하기 위해서는 관념을 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어떤 관념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궁극적인 훌륭한 논증을 구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 관념들은 전 세계에 걸쳐 움직이는 바이킹족이 되어야 한다.

 

3)유물론자는 채널들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할 것이다. 우리는 채널이 무엇인지 여전히 파악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십 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이 언급한 내가 선호하는 발언들 가운데 하나는 때때로 정보가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정보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를 가로지르는 메시지의 물질성이다. 채널이라는 관념은 그 영상을 수신하는 수신자의 용량을 가리킨다. 채널의 물리적 차원과 기호학적 차원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물리적 층위에서 우리는 내 친구 데이브가 "빈도 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예를 들면, 내게 적절한 생물학적 채널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말로 표현되는 메시지와 글로 쓰여진 메시지를 듣고 볼 수 있다. 내 고양이는 나보다 훨씬 더 우수한 청각 능력이 있고, 그래서 부가적인 채널들이 있으며, 그리고 어떤 방이 어두울 때에도 그 방의 가구 주변을 지나는 바람의 흐름과 수염을 통해서 그 방의 지형을 감각한다(그것은 대단히 경이롭다!). 나는 그런 채널들이 없다. 야곱 폰 윅스퀼의 동물행동학, 이언 보고스트의 에일리언 현상학, 그리고 자기생산 이론의 이차 관찰은 모두 비교 현상학(우리의 채널들, 동물들과 생기 없는 존재자들의 채널들과 정부 기관 같은 제도적 장치들의 채널들 사이의)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채널의 다양성에 주목하게 한다. 그렇지만, 채널들에는 기호학적 차원도 존재한다. 예를 들면, 내 학생들(그리고 또한 나!)은 헤겔의 대단한 책 <<논리학>>의 행들을 듣고 읽을 수 있는 물리적 채널들이 있지만, 이런 채널들을 통과하고 있는 유형들을 이해할 수 있는 채널들, 즉 인지적 하부구조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 경우에는 <<논리학>>의 몇몇 부분이 러시아어와 마찬가지로 해독불능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4)유물론자는 소통과 지각의 열역학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관념론자와는 달리, 유물론자는 사유, 소통, 그리고 지각은 모두 일어나는 데 에너지, 즉 칼로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예를 들면, 유물론자는 피로 상태에서 지각, 소통, 그리고 이해가 어떻게 해체되고 무질서해지는 경향이 있는지와 같은 현상에 주목할 것이다. 유물론자는 행하고, 생각하고,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나 칼로리에 주목할 것이다. 유물론자는 상황이 혼돈으로 빠지기 전에 어떤 주어진 시점에서 존재자들의 최대 정보 전달 능력에 대한 의문들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물론자는 내용이 아니라 에너지와 관련된 이런 쟁점들을 권력과 억압이 기능하는 방식과 관련된 중요한 쟁점들로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