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존 그레이: 오늘의 인용-과학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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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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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자연주의자라면 과학을 동물적인 탐색의 세련된 형태라고 생각할 것이다. 인간이 이제까지 경험한 만큼의 우주에서, 그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라고 말이다. 과학을 법칙을 찾는 행위라고 보기보다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처하기 위해 인간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자연주의는 종교에 적대적일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 반대가 맞다. 종교의 적들은 종교가 지성의 오류며 인간은 그 오류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입장은 다윈주의적 과학과 부합하지 않는다. 종교에 진화상의 가치가 없었다면 어떻게 종교가 이렇게 전 인류에 보편적으로 나타났겠는가? 하지만 오늘날의 무신론자들이 보이는 맹목성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 진짜 쟁점은 과학이 아니다. 세상을 '믿지 않음'으로 돌리려는 시도보다 더 종교적이고 더 불합리한 인간 행동은 없다. 과학에서도 종교에서도, 믿음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니 말이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종교는 의미를 위해 필요하고 과학은 통제를 위해 필요하다. 사람들은 과학과 종교가 모두 세계에 대해 상을 그리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맹목적 무신론자들은 세상에 대한 과학적 견해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들은 과학적 방법론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아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어느 한 시대를 풍미한 이론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이다. 과학적 이론들은 세계의 상을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임시변통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다.

 

우리가 과학적 이론들을 믿을 필요는 없다. 만약 그것들이 우리가 환경을 다루어 나가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더 나은 것이 나올 때까지 그것을 사용할 수는 있다. 과학은 더 나은 이론들을 만드는 몇 가지 방법들을 갖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증이다. 일반적으로 반증이 입증보다 유용하다. [...] 어떤 이론을 반증하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반증을 통해 몇몇 이론들을 폐기하게 된다 해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진실한 이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가지고 있는 질문을 다 던지고, 할 수 있는 탐구를 다한 뒤에도 서로 상충하는 이론들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이 이론들 중 어느 것을 사용해도 좋다. [...] 다만 우리는 그 이론이 세계를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과학이 믿음들의 체계가 아니라면 종교도 믿음들의 체계가 아니다. [...]

 

모든 종교의 핵심은 실천, 즉 의례와 명상이다. 그리고 그런 실천을 뒷받침하는 신화들이 있다. [...] 이런 신화들은 인간이 인간으로 남아 있는 한 지속될 것이다. 신화는 인간 경험의 바뀌지 않는 특성들을 다루는 이야기이다. 기독교도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기적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 아니냐를 묻는 무신론자들은 이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과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흔히 그렇지만, 여기에서 합리주의와 근본주의가 결합한다.

 

[...] 현대의 신화들이 전통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떤 신화보다 더 실재에서 동떨어져 있고, 과학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주장들은 신앙의 불합리성보다 더 비이성적이다. 죽은 자가 종말이 오면 부활하리라는 믿음은 인류가 지식으로 무장하고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보다 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아니다.

 

종교는 과학 이론의 원시적 형태가 아니고 과학이 우월한 형태의 신념 체계인 것도 아니다. 합리주의자들은 신화를 과학적 이론의 원형으로 잘못 생각했고 과학적 이론이 말 그대로 진리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종교과 과학은 둘 다 문자 그대로의 용어로는 온전히 들어낼 수 없는 실재에 대한 상징, 은유의 체계들이다. 모든 영적인 추구는 침묵으로 끝난다. 그리고 과학도, 경로는 다를지언정, 끝이 난다. 조지 산타야나가 언급했듯이, "정말로 솔직한 영혼이라면 세계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세계에는 불합리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들도 있을 것이고 미치지 않으려면 지성을 침묵시켜야 하는 어두운 심연들도 있을 것이다."

 

종교처럼 과학도 초월하려는 노력이고, 그 노력은 이 세계가 이해불가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끝이 난다. 우리의 모든 질문들은 기저의 질서를 찾을 수 없는 사실들에서 끝나게 될 것이다. 신앙이 그랬듯이, 이성도 결국 복종할 것이다. 과학의 최종 목적은 불합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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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그레이(John Gray), <<불멸화위원회(The Immortalization Commission)>>(김승진 옮김, 이후, 2012), pp. 2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