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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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데란다: 오늘의 에세이-존재론적 입장들: 관념론, 경험론, 실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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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2.

 

존재론적 입장들

Ontological Commitments

 

――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

 

철학이라면 무엇이든, 명시적으로 또는 암묵적으로, 그것이 서술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는 존재자들의 존재를 단언하는 입장에 선다. 일반적으로 이 진술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철학자들―예를 들면, 어떤 종류들의 존재자들이 자신들의 세계에 거주한다고 특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유 능력을 제한한다고 확언하는 철학자들―은 같은 이유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부실하게 분석되는 암묵적인 존재론을 가정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자신의 존재론적 입장을 선언하는 것이 철학에서 표준적인 절차이어야 한다. 존재론들은 매우 다양하며,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의 엄격한 분류법에 끼워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더라도, 이 짧은 에세이의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은 세 개의 범주―관념론, 경험론, 그리고 실재론―로 분류될 수 있다. 관념론자의 경우에는 인간 마음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들이 전혀 없다. 경험론자의 경우에는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존재자들은 마음에 대해 독립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모든 것(전자, 바이러스, 인과적 역량 등)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있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론적 구성물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실재론자의 경우에는 우리의 감각에 직접 주어지지 않더라도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여러 유형들의 존재자들이 있다.

 

이런 상이한 세 가지 존재론적 태도는 여러 변양태들이 있으며, 그래서 가능한 입장들의 수는 훨씬 더 많다. 관념론자들은 마음에 대해 독립적인 존재자들이 순전히 관행적이며, 경험 세계가 자의적인 기표들에 의해 분절될 때 생성된다고 믿거나, 또는 경험을 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개념들의 일부, 즉 인과율, 공간, 그리고 시간 같은 개념들은 무엇이든 어느 한 특수한 문화를 초월한다고 믿을 것이다. 경험론자들은 관찰할 수 없는 존재자들을 관찰할 수 있는 것들로 변환시킬 때 과학 장비들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해 의견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망원경은 유효한 존재론적 장비(그래서 우리는 토성의 고리의 자율적 존재를 믿을 수 있다)지만 현미경은 그렇지 않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토성에 가서 창문을 통해 토성의 고리를 볼 수 있을 것이지만, 전자나 바이러스를 관찰할 수 있기 위해 우리 몸을 축소할 수는 없다. 그런데 가장 많은 변양태들이 있는 것은 세 번째 범주의 존재론적 입장인데, 마음에 대해 독립적인 세계의 내용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자율적 세계는 천국이나 지옥 같은 초월적 공간들을 포함할 수 있으며, 그리고 인간의 마음이 그런 공간들에 거주하도록 고안할 수 있는 신비한 존재자들의 다양성은 상상력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그러므로, 어떤 철학이 실재론적 존재론을 채택하게 되면 그것의 첫 번째 과업은 그것이 세계의 합법적인 거주자들이라고 여기는 존재자들의 종류들을 제한하는 것이다.

 

게다가, 실재론자는 "마음에 대한 독립성"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중하게 규정해야 한다. 생태계, 기후 유형, 산과 대양, 행성과 항성들은 인간 마음의 존재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다. 사실상 그것들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은 먼저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런데 공동체, 제도적 조직, 그리고 도시들의 경우에는 어떤가? 이런 존재자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공동으로 상호작용하고, 명령을 내리고 준수하거나, 또는 건물과 도로들을 건설하는 마음들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경우에는 존재론적 자율성이 마음이 아니라 마음의 내용으로부터의 독립성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공동체, 조직, 도시, 그리고 다른 사회적 존재자들은 객관적이지만 인간의 마음에 의해서는 부실하게 이해되는 내부의 동역학이 있을 것이다. 실재론자가 처음부터 직면해야 하는 이런 복잡한 점들이 매우 많은 사상가들이 이 입장을 거부해버린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세계의 내용이 외양(인간의 마음에 나타나는 대로의 존재자)들이거나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사물과 사건들일 때 시작하기가 훨씬 더 쉽다. 그리고 이런 동일한 복잡한 점들 때문에 최근에 "실재론"이라는 술어에 "사변적"이라는 술어가 덧불여지게 되었다. 사변적이지 않은 채 자율적 세계의 내용을 특정할 방법이 전혀 없는 까닭은 이 세계가 직접 관찰하기에는 너무나 작거나 너무나 큰 존재자들과 너무나 빠르거나 너무나 느린 생성들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작업에서 사변적이어야 할 필요성은 내가 존재자들의 객관적인 정체성을 그것들의 특성들뿐 아니라 그것들의 경향과 능력들로 규정한다는 사실에 의해 초래된다. 특성들은 항상 현실적인 반면에, 경향과 능력들은 현재 표명되지 않거나 실행되지 않는다면 현실적이지 않은 채 실재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해 독립적인 어떤 주어진 물의 정체성은 그것의 현실적 특성들(부피, 조성의 순도, 온도, 흐름 속도)을 결정함으로써 확립될 수 있지만, 그런 결정이 그것의 실재를 망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물은 현재 액체 상태로 존재할 것이지만, 그 물은 어떤 온도에서는 수증기나 얼음이 될 수 있는, 즉 그 물은 어떤 조건에서는 끓거나 어는 실재적 경향이 있는 자체의 실재의 일부이다. 이 순간에 그것이 기체 상태나 결정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기체나 고체가 되는 그것의 경향을 결코 덜 실재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물의 정체성은 용해시킬 수 있는 능력 같은, 다른 물질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체의 능력에 의해 부분적으로 결정된다. 이런 능력의 실행은 산, 알칼리, 또는 염과의 현실적 상호작용이 필요하지만, 상호작용들의 부재가 그  능력을 결코 덜 실재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경향들과 마찬가지로 능력들도 사건으로서 현실화되지만, 이 경우에 사건들은 항상 이중적으로 용해시키고 용해될 것이다. 그 이유는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은 항상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능력과 결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은 용매이지만, 그 속에서 용해될 수 있는 물질들과 상호작용할 때만 그렇다. 경험론자는 자신의 존재론적 입장 때문에 현재 표현되는 경향들(물이 실제로 녹고 있거나 얼고 있는)과 현재 실행되는 능력들(물이 실제로 다른 한 물질을 용해시키고 있는)의 존재만을 주장할 수 밖에 없지만, 실재론자는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는 존재자들, 즉 잠재적인 존재자들에 관여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럼에도 이런 잠재성을 제대로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주의 깊은 사변적 작업이 많이 행해져야 한다.

 

마음에 대해 독립적인 세계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는 존재자들을 규정하는 것도 사변을 포함하는데, 합법적인 것들과 불법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이 선험적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작업에서 존재론적 타당성을 결정하는 데 사용되는 기준은 초월적인 것들과 내재적인 것들 사이의 구분이다. 천당과 지옥은 초월적 공간인데, 우주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사라지더라도 이 두 공간과 그것의 거주자들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와 천사들은 거부하기가 쉽지만, 덜 명백하게 타당하지 않은 다른 존재자들은 다루기가 더 어렵다.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실재론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와 종을 물질과 에너지로 구성된 기체(基體)가 소멸하더라도 존속할 비역사적인 불변의 본질로 도입했다. 유와 종은 둘 다 특성들의 목록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내 판본에서 특성들은 정체성의 결정자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감안하면, 특성들을 비초월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명백히 최우선적인 사항이다. 이런 점에서 창발적 특성이라는 개념―십팔 세기 화학자들이 자신들의 분과학문을 물리학으로 환원할 수 없게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최초로 개발했던 개념―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특성이 전체의 부분들 사이의 현실적 상호작용들부터 산출되거나 합성된다면 그것은 창발적이다. 그 어떤 특수한 경우에도, 무엇이든 어떤 주어진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또는 사회적 전체에 대해서, 다양한 상호작용들이 창발적 특성을 낳을 수 있으며, 그리고 전체의 특성들을 합성하는 수단에 있어서의 이런 잉여가 전체가 그것의 부분들의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보증하는 것이다. 동시에 문제가 되는 특성들은 이런 저런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상호작용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 특성들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종과 관련된 특성들은 영원하고 필연적인 반면에, 창발적인 것들은 그런 상호작용들의 지속에 대해 우연적이고 역사적이다(그것들은 올바른 상호작용들이 일어나는 순간 생성된다). 요약하면, 창발적 특성들은 기체에 대해 내재적이지만, 기체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경향과 능력들에 대해서 비슷한 논변이 제시될 수 있다.

 

어떤 철학의 존재론적 입장은 그것이 지식의 문제를 구성하는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존재론은 인식론을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존재론은 명백히 인식론에 대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관념론 철학과 경험론 철학에서 이 사실이 은폐되어 있는 까닭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것들은 자체의 존재론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관념론자들은 진리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들을 감각에서 비롯되는 증거에 정초할 방법이 없는데,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관행적이거나 선험적인 개념들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고, 그래서 그들은 선험적 지식에 특권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선험적인 일반적 진술로부터 특수한 진술들로 진리를 전파하는 수단으로서 연역적 논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경험론자들은 감각적 경험이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존재자들의 존재와 특성들에 관한 증거를 제공하며 그것들에 대한 우리 지식을 정초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고, 다수의 특수한 진술로부터 소수의 일반적인 진술로 진리를 전파하는 수단으로서 귀납적 논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실재론자들은 더 다양한 일련의 인식론적 전략들이 있는데, 그들은 객관적 세계의 타당한 내용으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첫째, 창발적 특성이라는 개념은 사회적 특성들이 심리적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심리적 특성들은 생물학적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생물학적 특성들은 화학적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기타 등등. 이것은 세계가 반(半)자율적인 층들로 객관적으로 중층화되어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데, 각 층은 그것으로부터 지식을 추출하는 데 상이한 전략이 필요하다. 모든 층에 들어맞는 단일한 방법은 전혀 없으며, 각 층에 거주하는 존재자들에 관한 참된 진술들을 산출하는 데에는 다양한 접근방식들이 필요하다. 둘째, 이런 존재자들의 정체성은 현실적 특성들뿐 아니라 잠재적 경향과 능력들에 의해서도 결정된다는 사실은 지식이 표상들뿐 아니라 개입들에 의해서도 산출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모형에서 현실적 특성들은 직접 표상될 수 있는 반면에, 잠재적 경향과 능력들은 세계에서 인과적으로 개입함으로써 현실화될 필요가 있다. 경향의 경우에는 이런 개입들이 단순할 수도 있는데, 예를 들면, 액체 물이 끓거나 얼게 하기 위해 주위 온도를 올리거나 낮추는 식으로 개입한다. 그러나 능력의 경우에는 개입들이 대단히 복잡해지는데, 어떤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그것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방법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칼은 치즈, 빵, 또는 야채와 상호작용할 때 벨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지만, 또한 그것은 관통될 수 있는 기관들을 지닌 충분히 큰 동물과 상호작용할 때 살해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존재자들이 가질 수 있는, 영향을 주고/영향을 받는 것의 조합들의 범위를 미리 규정할 방법은 전혀 없으며, 능동적인 실험 작업만이 존재자들의 잠재적 복잡성을 드러낼 수 있다.

 

후속적인 인식론적 결과들은 우리가 연구하는 존재자들이 특성과 능력들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지식의 생산자들인 우리도 그렇다는 인식에서 도출된다. 관념론자와 경험론자들은 모든 지식은 표상적이라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공식은 _라는 점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란이 선언적 문장, 즉 선험적이든 후험적이든 어떤 사실을 진술하는 문장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지식을 산출하기 위한 능동적 개입들의 필요성은 다른 한 공식, 즉 _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서 공란은 부정사로 채워진다. 수영하는 법을 알기, 자전거 타는 법을 알기, 동물을 해부하는 법을 알기, 두 물질을 혼합하는 법을 알기, 조사를 실행하는 법을 알기. 책이나 강의로 전달될 수 있는 사실 알기와는 달리, 방법 알기는 시범으로 가르치고 행함으로써 배우게 된다. 교사는 학생 앞에서 적절한 시범를 보여야 하고, 그 다음에 학생은 그 기술이 습득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한다. 그 두 가지 지식 형태는 서로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기술에 관해 이야기하고 이론화하는 데 언어가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언어를 효율적으로 구사하는 데 기술이 필요하다. 정합적으로 논증하고, 적절한 표상들을 만들어내며, 모형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는 데 기술이 필요하다. 사실상, 읽고 쓸 줄 아는 사회의 기본 토대는 시범으로 가르치고 행함으로써 배우게 되는 기술들로 형성된다. 읽고 쓰는 법을 알기.

 

인식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관련된 구분이 있다. 사실 알기와 방법 알기가 "지식(앎)"이라는 낱말의 두 가지 뜻인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라는 낱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대화 중에 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물을 때 그는 어떤 술어의 정의나 어떤 문장의 명확한 뜻을 요청하고 있을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라는 낱말은 어떤 낱말이나 문장의 의미론적 내용을 가리킨다. 이것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부르자. 그런데 절친한 친구가 조언을 듣고자 찾아와서 "내 삶은 아무 의미도 없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의미론적인 것에 대한 요청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일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것은 "내 삶은 무의미하거나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내 공동체와 무관한 듯 느껴진다. 나는 내 가족의 삶에서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미"라는 낱말의 이 다른 뜻은 의미작용이 아니라 취지(significance)다. 사실 알기는 명백히 의미작용과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방법 알기는 취지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 조각의 나무에 능숙하게 개입하고 있는 목공은 이렇게 물을 수 있다. "나무 결에 맞서지 않은 채 나무 결을 따라 이 나무을 사포로 닦는다면 차이가 있을까?" 화학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염산과 질산의 혼합물(왕수)이 아니라, 염산이나 질산으로 금을 용해시키려고 시도한다면 차이가 있을까?" 두 경우 모두에 대답은 그렇다이다. 결을 따라 사포로 닦는 것은 매끈한 표면을 산출하고, 금을 왕수에 담그면 금이 용해된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산출하는 개입들은 틀림없이 중대하고, 그것들은 틀림없이 차이를 생성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진술들을 공예나 과학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 정치에서 활동가들의 개입 행위들은 틀림없이 중대하고, 중요하며, 적절하다. 훌륭한 연설("저는 꿈이 있습니다")이 큰 차이를 생성한다는 점은 참이지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지역민들에게 납득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황폐한 지역을 재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처럼, 개입 행위들은 완전한 침묵 속에서 행해질 수 있다.

 

물론, 관념론자나 경험론자들이 이런 두 가지 구분(사실 알기/방법 알기, 의미작용/취지)을 지식에 관한 자신들의 이론들에 편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계가 능숙한 개입 행위들로 현실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객관적인 경향과 능력들, 다양한 기회와 위험들을 제공하는 경향과 능력들로 가득 차 있다고 간주하는 실재론자는 이런 통찰들을 이용할 수 있는 훨씬 더 좋은 위치에 처해 있다. 무엇보다도 이것 덕분에 실재론이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생태적, 그리고 기술적 문제들과 맞서는 데 있어서 더 나은 전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