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알바 노에: 오늘의 에세이-마음은 노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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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6. 25.

 

마음은 노출되어 있다

The Mind Is An Open Book

 

―― 알바 노에(Alva Noe)

 

나는 우리가 한편에는 법과 가치,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기술이라는 두 영역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갈등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갈등은 정부와 기업의 부당한 감시로부터의 보호와 사생활을 둘러싼 법과 관련되어 전개되고 있다.

 

나는 미합중국 정부에 의해 자행된 자국 시민들과 관련된 정보 수집의 범위에 관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의 불법적인 정보 공개에 사람들이 왜 그렇게 놀라는지 그 까닭을 정확히 모르겠다. 미합중국이 모든 전자통신을 감시하려고 노력해왔다는 것은 뉴스가 아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 2006년에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에서 보도된 적이 있다. 작년에는 <<와이어드(Wired)>>가 유타 주에 미합중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 될 것―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거나 전송하고 있는지 추적하는 데 필요한 컴퓨터들을 수용하기 위한 전용 복합 건물―의 건설에 관한 기사를 게재했다. 지난 2012년 6월에 나는 여기에서 그 기사를 언급했다.

 

놀랍든 놀랍지 않든 간에, 아무도 실제로 도청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미합중국 대통령의 주장에 안심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누구와, 그리고 언제 통화를 하고 있는 것에 관한 정보가 결코 첩보 기관의 메타자료가 아니라 사적인 자료라고 믿는다. 우리의 통화 기록은 우리에게 개인적인 듯 느껴진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의 말이 안심시키지 못하거나, 또는 틀림없이 안심시키지 못하는 더 심층적인 이유가 있다. 여기서 기술적 변화가 중요하게 된다. 자료와 자료에 관한 자료(메타자료) 사이의 구분은, 피상적으로는 간단하지만, 사실상 매우 미묘하다. 그리고 데이터(Big Data) 시대―순전한 인간 지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유형들을 식별할 수 있는 컴퓨터 체계들의 시대―에 바로 그 구분이 붕괴될 조짐이 보인다. 충분히 강력한 존재자가 메타자료를 안다면, 그것은 최소한 거의 정확하게 자료도 안다.

 

여러분은 몇 년 전에 타겟이 연루된 사건에 관해 읽었을 것이다. 그 상점은 한 십대 소녀에게 임신과 관련된 제품들에 대한 쿠폰들을 보내기 시작했었다. 그 소녀의 부친은 분개했다. 그들은 그 소녀로 하여금 고등학교에서 임신하도록 시도하고 있었던 것일까? 타겟의 경영진은 당황했고 한껏 사과했다. 그 소녀는 정말 임신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소녀의 구매 행동에 관한 정보에 근거하여, 타겟―정확히 말해서, 그 어느 누구도 아니라 컴퓨터화된 유형 탐지기―은 그 소녀가 자신의 부친에게 말하기 전에 이 사실을 짐작했다. 이 사건이 확인해 주듯이, 누군가가 어느 누군가에게 정보를 공개하기 전에 그가 알고 있는 것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

 

조금 더 많은 정보―내려받기, 전자 교통카드, 휴대폰 기록, 전화로 접촉한 사람과 시점에 관한 자료, 소셜네트워킹 소프트웨어 등으로부터 수집한 정보―로 어떤 사람이 스스로 알기 전에 임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쉽다. 또한 우리는 당사자가 아직 그 사실을 모르지만, 틀림없이 알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내가 여러분의 개인사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고, 여러분이 처해 있는 환경에 관해 많이 알고 있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지는 전혀 비밀이 아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상식일 뿐이다. 여러분은 함께 있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주목하고 있는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보행자는 운전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함으로써 정지 신호에 자동차가 자신의 존재를 새겼는지 여부를 판별할 수 있다.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면 마음은 노출된다.

 

바로 그렇다. 빅데이터 시대에는 충분한 정보가 있거나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그 점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이것 저것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것 저것 의도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이 올바른 종류의 방식으로 복잡한 인과적 또는 정보적 연결망에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단히 근거가 확실하다.

 

실제로 그것이 계산 이론의 바로 그 토대다. 내부에 영리한 생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컴퓨터들이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컴퓨터의 마이크로전자적 상태들을 지적인, 또는 바로 내용이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예를 들면, 컴퓨터가 이런 저런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을 사실로 만드는 것―은 그런 내적 상태들이 올바른 종류들의 입력과 출력에 인과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엮여 있는 방식이다. 컴퓨터들은 문제를 풀기 위해 자체의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물리적인 기즈모일 뿐이다. 컴퓨터들이 인지적으로 유의미한 과업들을 수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주변 세계와 엮여 있는 방식―기술적으로 다시 서술하면, 그것들의 내적 상태들의 변화가 계산적으로 유의미한 상태들과 동형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대단히 단순한 사례를 고려하자. 주머니 속의 동전. 그것은 무언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동전이다. 그것은 통화다. 그것은 가치가 있다. 그것은 25센트의 가치가 있다고 하자. 이 가치는 무엇에 놓여 있는가? 한 조각의 금속으로 여겨지거나, 또는 하나의 인공물로 여겨지는 동전 자체에 있지 않다. 그렇지 않다. 대략적으로 가치는 관계, 실천, 그리고 제도들의 복잡한 연결망 속에서 그 동전이 통용되는 방식과 그것의 위치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요점은 이렇다. 여러분이 그 연결망을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동전의 가치에 관해 알기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동전을 구성하는 재료가 무엇인지(나무, 플라스틱, 금속)는 중요하지 않으며, 또는 그 동전이 가상적(대부분의 화폐가 항상 그랬고 현재 그러하듯이)인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이 점은 일반적인 것이다. 의미, 가치 등은 질량이나 모양이 그런 방식으로 사물들의 고유한 특성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관계적 특성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서술했듯이, 의미는 용도다. 데닛이 서술했듯이, 의미는 내재적이지 않다.

 

이것은 동전의 경우에 참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우에도 참이다. 여러분의 머리 속 물질이 도대체 어떻게 나름의 의미를 전할 수 있을까? 뇌는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동전이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뇌도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 뇌는 우리와 우리 뇌가 복잡한 인과적 연결망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방식 덕분에 정보와 의미를 전할 뿐이다.

 

우리는 우리 생각이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 생각을 행위, 언어, 글쓰기, 메시지 등의 형식으로 외부화시킴으로써 타자들에게 생각을 드러낸다. 그것이 일상 생활을 잘 서술한다. 우리는 비밀을 지킬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염원을 공개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내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분이 좋아하는 어떤 도구―외과용 메스에서 뇌 스캔까지―를 사용하면, 동전의 물질적 육체에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머리 속에서 의미, 취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그 내부/외부 구분이 붕괴한다.

 

이런 개념적 요점들이 20세기 철학과 인지과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것들은 컴퓨터과학의 핵심에 놓여 있다.

 

그런데 빅데이터 수집과 처리의 시대에 진입한 오늘날 그것들은 우리의 정치적 문화에 대해 새로운 관련성을 나타낸다. 우리는 충돌 과정에 있다.

 

여러분이 충분한 메타자료를 수집하면, 여러분은 를 수집한 셈이다.

 

나는 내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내 메시지는 읽기 위해 개봉할 필요가 있는 봉인된 봉투와 같은 것이 아니다. 의미는 메시지 내부에 있지 않다.

 

오히려 의미는 메시지가 자체를 지금의 메시지로 만드는 행위, 소통, 반응, 필요, 문제, 그리고 상황들의 연결망에서 자리잡고 머무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것이―빅데이터의 자원을 고려하면―사찰에 노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