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데이비드 로덴: 오늘의 에세이-인간주의, 트랜스인간주의, 탈인간주의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3. 6. 29.

 

인간주의, 트랜스인간주의, 그리고 탈인간주의

Humanism, Transhumanism and Posthumanism

 

―― 데이비드 로덴(David Roden)

 

1.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들은 독특한 종류의 생물체이고 인간과 비인간을 구분하는 몇 가지 능력들이 비인간들에게는 부여되지 않는 도덕적 존엄성을 우리에게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지위는 필경 비인간들에게 확장되지 않는 특별한 보호를 받을 만하며 인간들에게만 유보된 그런 능력들을 계발하기 위한 자원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주장할 만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가 선진(NBIC) 기술들(아래를 보라)을 사용하여 인간의 능력과 복지를 발전시키는 데 개입한다면 다른 인간들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 인간으로 남는 것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가장 중요한 것일 수가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은 그런 정책들이 탈인간들을 낳을 수 있을 것이고 탈인간적 체제에 대한 전망은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히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탈인간들을 배제한다면 평가(고려)가 이루어질 수 없기 십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므로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인간주의적 토대 위에 기술에 의한 인간들의 능력 향상과 재설계를 정당화하는 사람들―은 인간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인간의 복지와 인간의 능력 개발과 결부시킨 우선 사항과 조화시킬 수 없는 탈인간 만들기 또는 탈인간 되기에 대해 도덕적 관심을 보인다.

 

2.

이런 주장을 고무하기 위해 나는 세 가지 관련된 철학적 입장―인간주의, 트랜스인간주의, 그리고 탈인간주의―을 구별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인간주의(H)

 

이 논증의 목적상, 인간들은 비인간들과는 중요하게 구분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철학적 인간주의자다.

 

예를 들면, 많은 인간주의자들이 인간들은 뛰어난 추리 능력으로 비인간적 동물과는 구별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등이 공유하는 한 가지 전통적인 견해는, 동물은 감각적 자극과 느낌에만 반응하는 반면에 인간들은 이유에 민감하다는 것이다. 합리적이라는 것 덕분에 인간들은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정서들을 무시하거나 억제할 수 있으며 (좋든 나쁘든) 규범적으로 용인된 행동 형식과 감정 형식들을 계발할 수 있다.

 

이유에 대한 감수성은 인지적 능력이자 도덕적 능력이다. 내가, 예를 들면, 평등과 자유 같은 원리들을 구별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나는 이것들을 대안적 행위 원리들로 여길 수 있다. "목적―어떤 목적이든 간에―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동물성과 구별되는) 인간성의 특질이다)".

 

대부분의 인간주의자들은 우리를 고양이, 개, 그리고 침팬지와 다르게 만드는 능력들―합리성이나 사회성 같은―덕분에 우리는 지목되어 특별한 취급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칸트의 경우에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선택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이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선한 유일한 것이다.

 

인간의 자기형성 능력이 동등하지만 서로 경합하는 다양한 좋은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인정하는 사상가들조차도 "자율"이 인간들에게 법에 의해 보호받고 발휘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계발되어야 하는 존엄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인간주의자들은 독특한 인간의 삶을 가치있는 삶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어떤 관념을 품고서 이런 소중한 속성들을 보호하고 발달시키기 위한 교훈과 방법들을 개발했다.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것을 성취하기 위한 포괄적인 인간주의적 기법들이 정치교육이다.

 

예를 들면, <<정치학>> 1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 용기, 또는 관용 같은 미덕들은 이런 소중한 특질들을 발달시키고 발휘하기 위한 여가, 훈련, 기회, 그리고 자원을 제공하는 정치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루소와 마르크스도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을 인간들이 전적으로 인간이 되는 환경으로 여긴다.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자들은 정치에 고유한 가치를 귀속시키는 것에 더 신중할 것이지만, 대부분은 그것에 의해 확보되는 사회적 재화들을 품위 있는 현존의 필수 조건으로 여긴다.

 

트랜스인간주의(H+)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핵심적인 인간주의적 가치들과 열망을 공유한다. 그들은 인간의 사회적 정서와 인간의 미학적 감성과 마찬가지로 합리성과 자율성 같은 인간의 독특한 속성들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이런 능력들이 가능하고 보호받는 곳에서, 즉, 기본권들을 보장하고 그것들의 최대한 가능한 발달을 위한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계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인간주의자들이 인간의 능력들을 발달시키는 데 사용한 전통적인 방법들이 인간 생물학의 물질적 제약과 더 일반적으로 자연의 물질적 제약에 의해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생물학적 및 물질적 기체가 비교적 최근까지 정치적 쟁점이 아니었던 까닭은 우리에게 그것을 바꿀 기술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흄, 그리고 칸트 같은 철학자들이 인간 본성에 관한 이론들을 제시하였지만, 이 본성은 본질적으로 캡슐로 둘러싸인 블랙박스였다. 그것이 무엇을 행하고 왜 행하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어떻게 행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상상력과 같은 기본적인 인지 기능은 칸트에 의해 이렇게 서술된다. "인간 마음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기술로서, 우리가 이 기술의 참된 운용 방법을 있는 그대로[자연대로] 알아내서 우리 눈앞에 노정시킨다는 것은 언제고 어려운 일이다".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NBIC 기술이라고 불리는 일단의 기술과 과학에서 예상되는 발전 덕분에 결국에는 인간들이 자신의 형태에 대한 전례없는 통제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NBIC는 나노기술(Nanotechnology), 생명공학기술(Biotechnology),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그리고 인지과학(Cognitve Science)을 나타낸다.

 

- 나노기술: 매우 빠르고 정확한 원자 규모의 제작(프로그램 가능한 물질, 신소재, 탈희소성 경제)

- 생명공학기술: 유전적/아세포적 층위에서 생명과 살아 있는 체계들의 조작, 합성 생명(유전적 능력 향상, 노화 치료제)

- 정보기술: 계산, 사이버네틱스(인공지능, 뇌-기계 인터페이스)

- 인지과학: 인간의 마음과 비인간의 마음의 구조와 구현 세부에 대한 이해(인지 능력 향상, 마음 업로딩)

 

우리가 더 똑똑할수록 우리는 더 효과적으로 인간의 능력들을 발달시키기 위한 기술들을 개발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농경 기술과 제조 기술로 기아나 희소성을 제거하고, 질병들에 대한 치료제들을 찾아내거나, 또는 더 나은 민주주의적 심의자들이 됨으로써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도덕적 우선 사항이고, 인간의 인지 능력들을 확장시키는 것이 이것을 성취하는 최선의 길이라면, 다른 특별한 조건이 없는 한 우리는 NBIC 기술을 사용하여 우리의 인지 능력들을 확장해야 한다(트랜스인간적 정치를 위한 추가적인 논변은 어떤 능력들은 반드시 어떤 목적이나 충족의 견지에서 특징지워진다고 가정한다. 그러므로 그런 능력들은 그것들의 소유자가 그것들을 다듬고 개선하려고 노력할 때 적절히 발휘된다).

 

합리성의 발휘는 많은 인지적 적성들―지각, 작용과 장기 기억, 일반적 지능, 그리고 언어와 추리 방법 같은 문화적 도구들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십 세기 동안 산업화된 국가들에서는 일반적 지능의 수준이 뚜렷하게 향상된 것―특히 척도의 낮은 쪽 부분에서―처럼 보인다. 이것은 페인트와 석유에서 유기 납 성분의 제거, 영양 개선, 그리고 무상 공교육 같은 공적인 보건 계획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향상은 실재적이라면 분명한 사회적 선이다. 그렇지만 우리 뇌의 효율성이 우리 두개골 속에 꽉 찬 신경세포들의 속도, 상호연결성, 소음, 그리고 밀도에 의해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인지에 미치는 환경적 요인들의 영향은 한계가 있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현재 살아 있는 최고의 과학자들, 철학자들이나 예술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또는 칸트보다 더 지성적이거나 창의적이지는 않다. 지구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사상가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그들은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설비를 더 잘 갖추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이 이전의 예술가들, 과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보다 더 유능하지는 않다.

 

닉 보스트롬(Nick Bostrom)과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 같은 트랜스인간주의 사상가들의 경우에 이것은 많은 주요한 지능 개선책들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생각을 계산 장치 같은 비생물학적 플랫폼에 외주화함으로써 인간 생물학을 벗어나기를 요구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가장 빠른 컴퓨터들의 부품들은 인간의 가장 빠른 신경세포(뉴런)의 발화 빈도보다 수억 배 더 빠르게 작동하고, 그래서 이것은 인간들이 우리 뇌에 대한 생물학적 한계를 초월하는 명백한 방식을 제시한다.

 

21세기 초 많은 인간들은 산술, 전화번호 같은 문자열 기억하기, 또는 24시간 영업하는 지역 세탁소 찾기 같은 지루한 일들을 계산 장치들에 떠넘긴다.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우리의 인공적으로 지능화된 장치들이 지능이 더 높아지고 우리의 신경계산적 뇌와 계산 하드웨어를 통합하는 더 영리한 방법들을 고안함에 따라 생물학적 기반을 갖춘 인지를 비생물학적 플랫폼으로 외주화하는 과정은 가속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나노기술, 정보기술, 그리고 생명공학기술의 융합이 핵심이 될 것이다.

 

브레인게이트(BrainGate) BCI 같은 뇌-컴퓨터 인터페이스들은 컴퓨터 조작 체계들과 신경 조직을 직접 접목하여 사지 마비 환자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로봇 팔 같은 장치들을 제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미래 인간들이 지각이나 작동 기억 같은 인지적 기능뿐 아니라 로봇 동체나 팔을 사용하여 물리적 기능들을 확장할 수 있는 민감한 컴퓨터 체계들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미래 인간들 또는 트랜스인간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기술과 구별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 전적으로 가능한 듯 보인다. 인간들은 생각, 지각, 그리고 심지어 의식과 관련되는 많은 기능들이 점점 더 빨라지고 미묘해지는 계산 장치들에 의해 조장되는 TV 연속극 <<스타트렉(Star Trek)>>의 보그(Borg) 종족 같은 "사이보그", 즉 사이버네틱스적인 유기체가 될 것이다.

 

스타트렉 애호가들이 알고 있듯이, 개인의 자율과 이성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주의자에게 보그 종족은 매력적인 이상형을 나타내는 듯 보이지 않는다. 개별 구성원들이 집단의 목적에 종속되어 있는 보그 종족의 기술적 집단 지능―개미나 흰개미 군집 같은―을 생각하면 말이다.

 

보그 종족은 집단적으로 거대한 인지 능력들과 상당한 기술적 솜씨를 소유한다. 이런 능력들은, 그들 각자는 폭력적으로 억압당한 인간적 합리성, 행위주체성, 그리고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고도의 연결망을 갖춘 "수컷들"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이보그의 지위를 비인간화된 기계들의 지위와 관련시키는 것은 소박하다고 주장한다.

 

인지과학자이자 철학자인 앤디 클라크(Andy Clark)는 부싯돌, 글쓰기, 그리고 건축의 발달 이래로 기술과 생물학의 통합은 인간들을 규정해 온 역사적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클라크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심적 생활이 항상 언어와 문서 같은 문화적으로 구성된 적소들로 돌출해 온 "타고난 사이보그들(Natural Born Cyborgs)"이다.

 

인간들과 반(半)지능적인 기기들이 배선된 세계로의 약속된, 또는 아마도 위협적인 전환은 오래된 게임의 또 하나의 움직임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물리적 및 인지적 과정들 속에 비생물학적인 물질과 구조를 집어넣는 데 있어서 달인이다. 이것을 이해하게 되면 무엇이든 탈인간적 미래를 믿지 않게 될 것이고, 우리 자신을 매우 많은 인간들이 살고, 사랑하며, 일하고 있는 바로 그 세계에 대한 틀림없는 대립물로 규정하고 싶은 유혹에 맞서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이 옳다면, 여기서 내가 묘사하고 있는 배선된 트랜스인간적 미래는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그리고 칸트 같은 인간주의자들이 인식할 수 있을 열망과 가치들을 지닌 존재자들이 여전히 거주할 것이다.

 

이런 트랜스인간적 후예들은 자율성, 사회성, 그리고 예술적 표현을 여전히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들은 그저 훨씬 더 뛰어나게 합리적이고, 민감하며, 표현적일 것이다. 또한, 이런 솜씨들은 선진 생명공학기술에 의해 기술적으로 수정되어 우리보다 더 건강하고 노화나 상해에 훨씬 더 저항력이 높은 육체에 의존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런 인간주의적 전통을 규정하는 능력들은 특수한 종류의 물리적 형태에 명백히 의존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은 이주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라는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권리들에 형태학적 자유―물리적 형태의 자유―를 덧붙여야 한다고 믿는다. 자유학예 교육이나 공중보건 입법 같은 전통적인 인간주의적 기법의 결과를 개선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육화 형태들―예를 들면, 우리 자신을 인지 기술과 통합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자유롭게 찾아내어야 한다.

 

[사변적(Speculative)] 탈인간주의(SP)

 

내가 서술했던 많은 인간주의적 가치와 열망들을 공유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트랜스인간주의적 일정이 매혹적이라고 깨닫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구십억 명의 인간들이 거주하는 지구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가정할 때 트랜스인간주의의 어떤 판본은 생태적 및 경제적 필수 사항도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함정이 있다. 내가 제시했던 기술적 전망이 우리와 비슷하다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자들―단지 엄청나게 더 똑똑하고, 더 멋지고, 더 잘 지내며, 더 능력 있는―을 낳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특이한 점에서는 결코 인간적이지 않는 존재자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적으로 생성된 그런 비인간들―즉 탈인간들(posthumans)―은 인간주의적 가치들이 적용되는 그런 종류의 존재자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보다 엄청나게 더 똑똑하고 더 강인할지도 모르지만, 또한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질적인 방식으로 그럴 것이다.

 

이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탈인간주의적 철학들과 구별하기 위해 나는 탈인간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그런 입장을 "사변적 탈인간주의(Speculative Posthumanism)"라고 부른다.

 

사변적 탈인간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신봉한다.

 

(SP) 현재 인간들의 후예들은 기술적 교체의 역사 덕분에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매우 도식적인 진술이며 약간의 해설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이 진술은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이 무엇을 포함할 수 있을지 설명하지 않는다. 클라크와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이 옳다면,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하드웨어나 웨트웨어를 교체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심해나 우주 공간 같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수정된 인간 사이보그는 우리에게 낯선 듯 보일 것이지만, 수정되지 않은 교양 있는 인간들의 언어 형태와 구문을 갖춘 자연 언어를 사용하고, 자신의 자율성을 소중히 여기며, 가족에 대한 배타적인 느낌이나 자부심 같은 인간 특유의 사회적 정서들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을 판별하는 많은 특질들은 형태학을 넘어서 일반화가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가 인간성과 동물성을 구별한다고 생각했던 성찰적 합리성, 자기 형성은 "인간 본질"의 명백한 한 요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종류의 본질적 특성은 그 종류의 그 어떤 구성원도 결여할 수 없는 특성이다. 이것이 옳다면, (보그 종족의 경우처럼) 어떤 기술적 과정에 의해 실천적 합리성의 능력을 상실하는 것은 탈인간성으로 가는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경로다.

 

물론, 성찰적 합리성을 발휘할 능력이 없는 인간 종의 구성원들(매우 어린 아이들)이 있는 한편, 그 능력을 획득할 수 없는 인간들(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있는 개인들)도 있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필연적 조건일 수가 없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도덕적 인간다움에 대한 자격 조건으로 더 잘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은 자신의 삶을 형성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는 합리적 행위자일 뿐이다.

 

이런 저런 기준에 의해 탈인간들이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탈인간주의적 공화주의에 대한 기초를 마련하는 듯 보인다. 다른 존재자들이 보통의 인간들과 상이하게 육화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인간들이 그들과 함께 평등하게 사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적 생명이나 세계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이질적인 생명 형태나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술적 교체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1993년의 논문 "다가오는 기술적 특이점: 탈인간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The Coming Technological Singularity: How to survive in the posthuman era)"에서 컴퓨터과학자 버너 빈지(Vernor Vinge)는 인간의 지능보다 더 높은 지능을 갖춘 존재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술의 발명 때문에 지구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끝나고 우리보다 지능이 엄청나게 더 높은 존재자들이 지배하는 탈인간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빈지의 경우에는 기술의 재귀적인 개선을 통해서 이런 특이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 또는 인간과 동등한 지능을 갖춘 존재자들이 기술을 사용하여 초인간적 지능을 갖춘 존재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결과로 나타난 존재자들은 훨씬 더 지능이 높은 존재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타 등등.

 

그러므로 지능 창출 또는 지능 증강을 위한 기술은 지구에서의 지적 활동 수준이 기하급수적으로 그리고 무제한적으로 증가하게 될 특이한 지점, 즉 "특이점"을 이룰 것이다.

 

빈지의 논증에서 이런 기술의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강력한 인지 향상 기법, 기계 지능 또는 합성 생명의 혁명, 또는 아직 예상되지 않은 어떤 과정일 수 있을 것이다. 기술의 개선은 해당하는 지능 증가를 낳으므로 기술은 "확장될 수" 있을 필요가 있다. 인간과 동등한 지능을 갖춘 존재자를 만들어내는 현재 우리에게 유일한 수단은 확장될 수 없다. "우리가 더 나은 성관계를 맺는다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천재일 것은 아니다".

 

빈지에 따르면, 이런 "지능 폭발"에서 비롯될 "탈인간적" 정신은 매우 방대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변환 능력에 대한 아무 모형도 없다. "이런 초월적 사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이전의 지능 혁명에 비유하는 것이다. 탈인간적 정신의 출현은 지구 생명의 발달에 있어서 "인류의 등장"에 못지 않는 단계적 변화일 것이다.

 

빈지의 특이점 가설―지능체 제작 기술은 재귀적 개선에 의해 탈인간적 지능체을 생성할 것이라는 주장―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이 참이고 그것의 전제 조건이 실행될 수 있다면, 그것의 중요성은 다른 정치적 및 환경적 관심사들보다 더 중요할 것인데, 이것들은 특이점 이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생물학적 육화 같은 인간적 변양태들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이점이 기술적으로 가능하지 않더라도―또는 임박하지 않더라도―그런 특이점 가설(Singularity Hypothesis, SH)은 NBIC 기술 같은 영역에 있어서 우리의 기술적 활동의 장기적인 결과를 평가할 수 있는 우리 능력에 관한 곤란한 쟁점을 여전히 제기한다. 이것은 빈지의 예상이 NBIC 영역에서의 활동이 우리에 대해 두드러지게 이질적이거나 "타자"일 생명 형태들을 생성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취지의 더 약한, 더 일반적인 주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변적 탈인간주의를 취하면 우리는 탈인간적 기획을 향한 두 가지 정책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그것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즉, 우리의 현재 기술적 활동을 통해서 탈인간들의 탄생에 기여하는 행위의 윤리적 함의들을 평가할 수 있다.

 

빈지의 시나리오는 인간과 탈인간 사이의 차이점들이 매우 커서 중요한 사례들에서 평가가 불가능하거나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이유들을 제공한다. 빈지의 에세이에서 강조된 차이점들은 인지적이다. 탈인간들은 인간들보다 훨씬 더 똑똑해서 우리는 그들의 사유를 이해할 수 없거나, 또는 탈인간적 기술의 변환적 효과를 예상할 수 없을 것이다. 매우 본원적인 다른 차이점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탈인간들은 우리와 매우 다른 경험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탈인간적 삶이 가치가 있는 삶일지 아니면 가치가 없는 삶일지 여부는 말할 것도 없이, 탈인간적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일지 예상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탈인간적 마음의 구조는 우리와 같은 종류의 주관성과 매우 다를 것이다.

 

도덕적 인간다움은 거의 틀림없이 행위, 믿음, 그리고 욕망들을 평가하는 능력(실천적 합리성)과 이런 평가들을 특징짓는 정서와 귀속 인정에 대한 능력 같은 인지적 및 정동적 문턱 조건을 전제로 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적 형식의 실천 이성은 비주관적 현상학을 갖는 존재자는 입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존재자는 자신을, 그것 때문에 삶이 더 좋을 수도 있거나 더 나쁠 수도 있는, 경계가 있는 개체로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비인간적 현상학들이 어떤 모습일지 정합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예를 들면, 그런 현상학들이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런 종류들의 경험들에 우리 스스로 개입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무능함은 경험의 필연적 구조에 대한 어떤 성찰이 아니라 인간들이 마음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인간적인 현상학적 변양태들의 중심성을 반영할 뿐일지도 모른다. 토머스 메칭거(Thomas Metzinger)는 우리와 같은 종류의 주관성은 육화된 자아의 시공간적 다발로 오며, 우리의 지각 수용체들과 운동 작동체들이 "단일한 유기체의 육체 안에서 물리적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구조를 갖춘 동역학적 현재로 온다고 주장했다. 다른 종류들의 생명―예를 들면, "의식이 있는 항성간 가스 구름들" 또는 (약간 더 특이하게도) 많은 이동 처리 단위들로 구성되는 탈인간적 집단 지능체들―은 본원적으로 비인간적인 본성을 지닌 경험들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기술적 활동의 함의들을 고려할 때 탈인간성의 가능성을 그저 무시하기로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들 또는 성능이 향상된 트랜스인간적 사촌들에 대한 함의들만 고려할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인간과 트랜스인간들은 좋은 탈인간적 결과의 확률을 최대화하거나 나쁜 결과의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 차이점들을 만들어내는 그들의 기술적 활동들의 결과를 평가할 의무가 있다(평가의 원칙).

 

찰스 스트로스(Charles Stross)의 뛰어난 미래주의 소설 <<악셀란도(Accelerando)>>는 인간의 사회적 체계들이 이코노믹스 2.0(Economics 2.0)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상하는데, 이코노믹스 2.0은 수요와 공급 관계들이 매우 빠르게 계산되어 인간적 의식의 "서사적 연쇄"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이 따라갈 수 없는 자원 할당 체계다. 이코노믹스 2.0 체제에서 일인칭 주관성은 자율적인 소프트웨어 행위자들 사이의 "입찰/청구 거래들의 일기 형식의 파일"로 대체된다. 거주하는 행성들 전체가 분쇄되어 더 "생산적인" 목적으로 변환된다.

 

스트로스의 소설에서 이런 특이점 이후의 시나리오는 희극적으로 무서운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이코노믹스 2.0을 실행하는 엄청나게 가속된 지능체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인간과 트랜스인간들에게 나쁘다.

 

<<악셀란도>>의 미래의 세계 건설자로서 스트로스는 이코노믹스 2.0의 도덕적 특성을 명기할 수 있다. 우리가 탈인간들을 대면했다면, 상황은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간들이 없는 탈인간적 세상이 탈인간들이 없고 인간들이 있는 세상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인간들이 비인간적 유인원들과 다른 것처럼 탈인간들이 인간들과 다르다면, 우리는 그들의 삶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탈인간 만들기에 대한 우리의 기여를 평가하는 것은 의무적인 듯 보이며, 우리의 기여을 무시하는 것은 무책임한 반면에 또한 본원적으로 이질적인 탈인간들과 관련하여 평가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이중 구속을 "탈인간적 교착 상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교착 상태가 겉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라면, NBIC(그리고 관련된) 기술들에 있어서 현재 발전의 가장 중요하고 파괴적인 장기적 결과를 평가할 아무 원칙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사변적 탈인간주의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교착 상태를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지구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의 후속 발전이 두드러지게 비인간적인 생명 형태들의 출현에 결코 기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변적 탈인간주의는 특이성 가설보다 더 약한 주장이고,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빈지의 에세이는 탈인간들을 생성하기 위한 하나의 제조법을 규정한다. 그런데 재귀적인 자기 개선을 요구하지 않는 탈인간적 차이 제작자가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 진화적 과거에서 새로운 생명 형태들을 생성했다고 알고 있는데, 인간들이 그런 것들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역사의 시기와 관련하여 특별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 보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생물학적 요소들이나 기술적 요소들의 어떤 조합에서 비롯되는 상당히 새로운 것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어려운 듯 보인다

 

사변적 탈인간주의와 양립할 수 있는, 교착 상태를 벗어날 어떤 방법이 존재하는가? 최선의 것을 희망하기 같은 더 훌륭한 방법들을 여전히 선호할 윤리학자들이 있겠지만, 나는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3. 탈인간 되기

나는 탈인간들의 이질성이 윤리적 난점을 제시한다고 시사했는데, 탈인간들은 인간들과 매우 많이 달라서 우리는 그들의 삶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파악할 만큼 충분히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난점을 과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 탈인간들은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우리가 올바른 상황에 처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과학의 어떤 영역들은 비이상적인 상황―예를 들면, 수학을 알지 못한다면―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수학을 이해하게 되면 훨씬 더 쉬워진다.

 

게다가, 원칙적으로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생명 형태라는 바로 그 관념이 의문시될 수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어떤 것들은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법칙들을 갖는 인간의 "유리 같은 본질"이 존재한다는 점을 함축한다.

 

확실히,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들―예를 들면, 임의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멈출 것인지 영원히 돌아갈 것인지 여부―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우리가 모른다는 점을 알 수 없는데, 그 점을 알려면 최소한 그것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탈인간들이 매우 본원적으로 기묘할 수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우리는 그것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은 결코 증명될 수 없을 것이다.

 

트랜스인간주의자들이 옳다면, 올바른 인지 능력 향상이나 확대 수단으로 우리가 개량되거나 주의 깊은 관찰과 해석들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파악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많은 것들이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탈인간적인 것들을 그저 본질적으로 기묘하다고 특징짓는 것은 의심스럽다. 기묘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탈인간들의 오랜 비존재가 그들의 가설적 이질성보다 앎에 더 큰 걸림돌이다. 결국 지금까지 탈인간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탈인간들의 출현은 전례가 없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탈인간들이 어떻게 출현할지, 또는 그것들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때 의지할 경험적으로 규칙적인 것들이 전혀 없다.

 

빈지의 특이점 시나리오는 탈인간들에 대한 생각할 수 있는 제조법이지만, 그것이 실행 가능한 것인지 아직 우리는 모른다. 특이점이 가능할지라도, 그 이후에 출현하는 것의 본성은 예측할 수 없다. 그것이 특이점을 특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인간들을 이해하게 되는 이상적인 또는 최선의 상황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탈인간들이 현존하는 상황들일 것이다. 여태까지 탈인간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 평가의 원칙은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평가) 인간과 트랜스인간들은 좋은 탈인간적 결과의 확률을 최대화하거나 나쁜 결과의 확률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자신들의 기술적 활동들의 결과를 평가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강한 인식론적 의무를 가정할 수 있다.

 

(강한 인식론적 의무의 원칙)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a) 평가에 이르는 그럴듯한 경로가 있으며 b)그것을 채택하기 위해 강한 인식론적 의무의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즉,

 

1. 오직 인간적인 인지적 본질이 존재한다면 탈인간들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 인간적인 인지적 본질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가정).

3. 탈인간들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하다(1, 2).

4. 탈인간들의 오랜 비존재를 고려하면, 탈인간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은 우리가 탈인간들을 만드는 데 개입하거나 탈인간적으로 되는 것이다(이것은 부재하는 그 어떤 기술적 인공물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5. 우리는 탈인간들을 이해하려고 시도할 의무가 있다(평가).

6.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강한 인식론적 의무의 원칙).

7. 우리는 탈인간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을 만들어내야 할 의무가 있다(5. 6).

 

결론: 우리는 탈인간들을 만들어내거나 탈인간적으로 될 의무가 있다(4,7).

 

강한 인식론적 의무의 원칙은 과도하게 강한 듯 보인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해야 할 의무는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이 위험하고, 잔인하거나 유해하기 때문에 이것을 행하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최우선의 의무는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원칙을 다음과 같이 약화시킬 수 있다.

 

(온건한 인식론적 의무의 원칙)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필요한 (유일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이해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기보다 오히려 이해하는 데 더 강한 제약을 둠으로써 원래의 결론을 여전히 생성할 수 있다. 탈인간적 본성은 "통시적으로 창발적인(diachronically emergent)" 현상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우리는 이것을 행할 수 있다.

 

통시적으로 창발적인 행동이나 특성은 시간적으로 연장된 과정의 결과로서 일어나지만, 그 과정의 초기 상태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그것은 그 과정이 자체의 행로를 가도록 허용함으로써 파생될 수 있을 뿐이다.

 

탈인간들이 통시적으로 창발적인 현상이라면, 그들의 도덕적으로 특이한 특성과 영향들은 그것들이 출현하기 전에는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탈인간적 제작자들에 관해 미리 알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제약하는 한편, 그들의 인식론의 다른 측면들을 전적으로 미결정 상태로 둔다. 폴 험프리(Paul Humphrey)가 우리에게 환기시키듯이, 통시적 창발은 일회성 사건이다. 일단 우리가 이전의 통시적으로 창발적인 사건을 관찰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그것을 생성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던 인과적 선행자들로부터 같은 유형의 창발적 특성의 표식들을 예측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다.

 

통시적 창발 가설은 탈인간들―그들이 무엇으로 또는 누구로 판명되는 간에―의 출현이 여러가지 면에서 호모 사피엔스 같은 전적으로 새로운 종의 출현과 비슷할 것이라는 주장에서 도출되는 듯 보인다. 발견되기 전에 그 본성이 어느 정도 정확히 예측되었던 "벌거숭이 두더지쥐(naked mole rat)"(단 하나의 가임 암컷을 둘러싸고 조직된 집단으로 살아가는 포유류)  같은 종의 사례들이 있다. 그런데 두더지쥐들의 진(眞)사회성은―포유류에서는 이례적이지만―개미, 흰개미, 그리고 말벌 같은 사회적 곤충에서는 흔하다. 전례 없는 기술유전적 과정에 의해 생성되는 탈인간들은 인간들이 여태까지 만난 적이 있는 그 어떤 역사적 종류도 나타내지 않는 특성들을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탈인간들이 통시적으로 창발적일 것이라는 주장은 지지할 수 있는 듯 보인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탈인간들을 만들어내거나 탈인간적으로 되는 것에 매우 강한 이해관계를 갖는다. 이것은 우리가 상쇄하는 이해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탈인간의 출현 또는 인간적 삶과 사회로부터의 "단절"를 둘러싼 본원적인 불확실성을 감안하면, 일단의 NBIC 기술울 어떻게 개발할지 고려할 때 우리는 예방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서로 상쇄하는 이유들을 감안하면, 탈인간 되기에 대한 관심을 지지하는 논변은 NBIC 기술로 인간의 능력을 계발하는 데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다고 주장하는 트랜스인간주의자들에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므로 인간주의에 대한 트랜스인간주의적 신념은 윤리적으로 유지될 수 없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