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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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크리츨리: 오늘의 인용-인간의 원죄와 신비주의적 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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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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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미트의 경우에, 정치적인 것에 관한 모든 관념은 인간 본성에 대한 어떤 입장을 취한다. 그런 관념은 어떤 종류의 인류학적 입장을 필요로 한다. 인간들은 천성적으로 선하거나 악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이런 견지에서 고려되는,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만연하는 두 가지 정치적 대안은 권위주의와 아나키즘이라고 슈미트는 생각한다―그리고 나도 동의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선함을 믿는다. 아나키스트들의 선구자는 루소이며 그들은 사악함이란 더 큰 수준들의 불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적 발달의 역사적 결과물이라는 루소의 주장에 근거를 둔다. 반면에, 이 견해에 따르면, 정치적 정당성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상상했던 그런 종류의, 사악함에서 선함으로의 "본성 변화"라고 빈번하게 일컬었던 것에 의해 획득될 수 있다. [...] 이것은 루소에 대한 서투른 묘사이지만―그리고 그는 결코 아나키스트로 서술될 수 없을 것이다―이 견해는 바쿠닌에 의해 더 정확하게 전개된다. 즉, 인간들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면, 그들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국가, 종교, 법, 그리고 경찰이라는 기구들이다. 일단 이런 기구들이 제거되고 연합적 구조의 자율적인 자치 코뮨들로 대체되면, 우리는 진정으로 지상천국을 이룩할 것이다. [...] 아나키즘을 지지하는 논변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에게 자연스럽게 귀착되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생명의 힘 자체가 법의 힘을 통해서 작동하는 국가의 치명적인 압제적 활동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다면, 상호부조와 협동을 기반으로 사회를 조직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관념에 항상 의존한다. 후자는 물론 크로포트킨의 견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권위주의자들은 인간 본성이 본질적으로 사악하다고 믿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원죄라는 개념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도노소 코르테스와 메스트르의 경우에, 인간들은 천성적으로 타락했고 본질적으로 비열했다. 인간 본성에는 정치적 층위와 신학적 층위에서 교정책―국가의 권위와 교회의 권위―을 필요로 하는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죄로 규정되기 때문에 권위주의―이를테면, 독재의 형식으로―는 인간들을 그들 자신들로부터 구조할 유일한 수단으로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결함이 있기 때문에 권위의 단단한 지배를 필요로 한다. 이것에 대항하여, 아니키즘은 원죄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정치적 표현이다. 공동체 형식을 통한 타자들과의 죄 없는 연합은 인간의 가장 고상한 가능성의 실현이다. 신비주의적 아나키즘(mystical anarchism)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자유로운 죄 없는 연합이라는 이 관념이다.

 

원죄라는 관념은 시대에 뒤진 종교적 과거로부터의 어떤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오류, 악의, 사악함, 폭력, 그리고 극단적인 잔인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성향을 설명하는 존재론적 결함 또는 부족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개념적 표현이다. 게다가 이런 결함은 우리가 교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권위주의자들은 인간들에게 국가, 신, 법, 그리고 경찰의 속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그들 자신들로부터, 즉 욕망, 잔인함, 그리고 폭력을 지향하는 자신들의 최악의 성향으로부터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홉스가 보여주듯이, 자연 상태로의 그 어떤 복귀도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재을 지지하는 논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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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 <<신앙 없는 자들의 신앙: 정치신학의 실험들(The Faith of the Faithless: Experiments in Political Theology)>>(Verso, 2012), 10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