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매튜 데이비드 시걸: 오늘의 서평-알바 노에의 <<뇌과학의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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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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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머리에 한사코 매달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소식이 아닐 것이다. 특히 이것은 인지과학이라는 분야에서 참인데, 수십 년 동안 인지과학의 지배적인 패러다임 때문에 철학자들(그리고 과학자들)은 사유와 의식에 대한 증거를 찾아서 뇌 속을 들여다 보게 되었다. 이 패러다임을 인도하는 핵심적 은유는 인간 인지는 계산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뇌는 컴퓨터라는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주류적 견해이지만, 이런 분과학문적 바탕에 대한 비판자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데이비드 차머스처럼 의식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철학자들은 뇌 활동에 대한 완전한 계산주의적 설명(그것 자체가 여전히 결코 적합하지 않는)도 앞서 말한 활동이 왜 경험을 수반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뇌가 컴퓨터 프로세서일 뿐이라면―뇌가 자체의 모든 작업들을 기계적인 알고리듬적 형식으로 수행할 수 있다면―세계는 도대체 왜 뇌에 대해 나타나야 하는가?

 

대니얼 데닛 같은 계산주의 옹호자들은 우리가 의식적 경험에 대한 견해를 너무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데닛은 세계에 대한 우리 의식이 우리가 믿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덜 완전하다는 증거로서 변화맹(change blindness)과 부주의맹(inattentional blindness) 같은 어떤 시각적 결점들을 가리킨다. 사실상 데닛은 더 나아가서 풍성한 짜임새의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일인칭 경험이 대체적으로 환영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저곳에 있는 것을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뇌가 우리에 대해 어설프게 구성하는 고르지 못한 저해상도의 환상을 본다.

 

의식을 우선 지각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에 특히 시각적 지각으로 환원시키는 점에 대해 데닛을 비판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을 것이지만, 더 일반적으로 의식의 과도한 과장(현대의 마음 과학뿐 아니라 융의 심층심리학의 통찰)과 관련하여 그가 옳았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의식적 경험이 환상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우리(뇌)가 도대체 왜 그런 외양들을 경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왜 뇌는 "우리"가 세계의 환영을 자각할 필요가 없이 자체의 기능들을 수행하지 못하는가? 계산주의적 인지 이론은 좀비 또는 로봇들만이 거주하는 지구에서도 참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론은 우리가 실제로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세계, 즉 목적 있는 계획들과 타자와 맺는 유의미한 도덕적 관계들의 세계를 적절히 설명하지 못한다.

 

데닛의 견해는 이 책에서 알바 노에가 비판하는 일단의 광적으로 환원주의적인 견해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책은 그저 잉크, 접착제, 그리고 종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최소한 그 책에서 그가 옹호하는 것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가 옳다면, 그리고 의식이 두개골 속에 내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의 책은 문자 그대로 그의 마음의 한 조각이다. <<뇌과학의 함정: 인간에 관한 가장 위험한 착각에 대하여>>라는 책은 인지과학 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는 노에의 논변을 제시한다.

 

노에는, 뇌의 과업은 틀릴 수 있는 오감의 필터를 거쳐야만 그것이 접근할 수 있는 세계를 내부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두개골의 경계 안에서 의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잘 잊어버리는 철학자와 과학자에게 공히 사유와 지각은 행위와 결부되어 있고, 마음은 세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고 육화되어 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감각 기관들은 앞서 존재하는 세계가 정신적으로 재구성될 때 거쳐야 하는 창들이 아니다. 오히려 감각적 지각은 항상 이미 운동 활동이고, 항상 이미 외양과 세계의 사건들의 후속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가 지평선을 보는 까닭은 우리의 시각 피질 속 신경세포들에 의해 코드화된 "정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땅 위에 서서 머리를 돌리고 바라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육체들이기 때문이다.

 

노에는 차머스의 이른바 의식의 "어려운 문제"가 결코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와 데닛은 이 점에 관해 대체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전적으로 상이한 이유 때문이다. 데닛은 "의식"이라는 낱말이 신경과학이 곧 그것의 토대를 무너뜨릴 문화적 우상일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의식적 경험을 무의식적인 신경 활동에 의해 생성되는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어려운 문제"는 해소될 것이라고 그는 우리에게 단언한다.

 

노에의 의견은, 뇌가 의식에 대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어려운 문제"를 잘못 놓여진 구체성(misplaced concreteness)의 산물이라고 일축한다. 마음과 경험이 실제로 뇌, 육체, 그리고 세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을 통해 창발하고, 그래서 결코 먼저 "소유되"지(또는 그저 놓여져 있지) 않을 때, 그 문제는 뇌라는 물질이 어떻게 마음과 경험을 소유하고 있는지 묻는다.

 

내가 의식이 있는 까닭은 그저 내 뇌가 특별한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뇌가 언어, 다양한 층위의 정서 지향성, 그리고 일련의 감각-운동(또는 지각-행위) 고리들을 통해서 타자들과 세계에 결합되기 때문이다. 노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통 속의 뇌는 의식이 없을 것이다. 현실 세계와의 접촉과 그것에 대한 접근만이 의식적 경험에 대한 충분조건이다. 의식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행해야 하는 것, 타자들과 함께 그리고 세계 자체의 도움으로 우리가 끊임없이 달성하는 것이다. 별개의 체계들로서의 유기체들과 주변 환경들은 추상적으로만 연구될 수 있다. 계통발생적 적응이라는 진화 과정, 또는 개체발생적 능숙한 모방(학습)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기체-환경 체계들 전체의 동역학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켜야 한다[...].

 

노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메를로퐁티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우리는 세계를 향해 돌려진 텅 빈 머리들이다. 세계는 뇌가 지은 구조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도 아니다. 세계는 우리가 볼 때 거기에 있고, 우리는 그 안의 여기에 있다. 의식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일종의 능동적인 동조(active attunement), 달성된 통합(achieved integration)이라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의식 경험의 본질을 정하는 것은 도처에 있는 세계 자체다. [p. 216]

 

의식에 대한 계산주의적 접근방식은 의식이 두개골 내의 신경화학적 과정들과 동등하고 그래서 그것들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노에의 반론은, 그런 유아론적인 잘못 놓여진 구체성이 역설적으로 대부분의 주류 이론가들이 비판하는 바로 그 데카르트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을 새롭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뇌 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 의식은 실제 세계에 직접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재적인 관념들의 언어(또는 정신적 표상들)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점... 이것들은 전적으로 데카르트적인 전제들이다. 우리는 고독한 철학자들의 추상적인 사유 실험들이 아니라, 체험되는 육체와 타자들에 둘러싸인 일상적인 세계-내-존재(생활 세계)로 시작한다고 노에는 넌즈시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