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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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힐레포비아 또는 물질 공포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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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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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물질 또는 물리성을 소거하려는 두드러진 경향이 관찰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매우 일찍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유와 존재가 동일하다는 등식을 제시하는 파라메니데스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존재를 외양들의 세계와 형상들의 세계로 이분화하고, 외양들의 세계를 사람들을 호도하는 억견의 원천에 불과한 것으로 다루는 플라톤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물질[힐레(hyle)]를 형상 또는 본질로부터의 기입을 기다리고 있는 텅 빈 수동적인 질료로 다루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볼 수 있다. 나중에 그것은 보편자들에게 개별자들을 넘어서는 특권을 부여하는 스콜라철학적 실재론(현대의 실재론들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근대성의 등장과 함께 우리는 이런 물질의 소거 경향을 여러 합리론들(특히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스피노자는 더 공평하다)과 존재를 "현상화하는" 감각 소여 경험주의들에서 만난다. 20세기 사유에서는 물질의 소거 경향이 현상학의 철학의 주체화와 언어적 전회에서 발견된다. "유물론적"이라고 자처하는 정치 이론의 여러 입장들에서조차도 물질성 자체를 소거하여 그것을 "담론적 실천" 같은 모순어법들로 대체하려는 또렷한 경향이 있다.

 

매우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생물이론가 수전 오야마(Susan Oyama)는 이런 물질의 소거를 "힐레포비아(hylephobia)", 즉 물질 공포증이라고 부른다. 도킨스와 데닛에 의해 옹호되는 이론들 같은 유전자중심적인 생물학적 진화 이론들의 맥락에서 이야기하면서 오야마는 유전자중심적인 진화 이론들이 유전자를 유일한 선택 단위이자 그것의 물질적 기체와는 무관한 순전한 정보로 다룸으로써 사실상 물질을 소거하는 방식을 지적한다. 데닛이 서술하듯이,

 

기체 중립성(substrate neutrality): 장제법 절차는 원하는 어떤 기호를 사용하든, 연필 또는 펜, 종이 또는 양피지, 네온 등 또는 공중 문자로 똑같이 잘 작동한다. 그 절차의 힘은 그것의 논리적 구조 때문이지, 예화에 사용되는 물질들의 인과적 능력들 때문이 아니다. 그런 인과적 능력들이 처방된 단계들을 정확히 따를 수 있게만 한다면 말이다(<<다윈의 위험한 생각>>, 51).

 

어떤 과정이 그것이 일어나는 물질적 매체와 무관하다면 그것은 기체 중립적이다. 이것이 도킨스와 데닛 같은 유전자중심주의적 이론가들이 유전자들에 담겨 있는 정보를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들의 틀 내에서는 특수한 화학 물질이 특수한 시점에 어떤 세포에 이르는지 여부, 환경 속에 존재하는 화학 물질들의 종류들, 온도, 빛의 존재 유무, 기압 등과 같은 쟁점들은 모두 선택과 발달에 대해 아무 관계도 없다. 그들의 경우에 유전자―공교롭게도, 생물학에서 규정하기가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술어이다―는 역동적인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이다. 유전자들은, 발달되는 유기체가 우연히 거주하게 되는 물질적 매체가 무엇이든 간에 불가항력적으로, 불가피하게 전개되며 그것들이 장차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청사진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 매체들은 표현형의 형성에는 자체적으로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은 채 이런 유전자 정보를 나를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생명합리주의(biorationalism) 또는 생명관념론(bioidealism)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무형의 것, 관념적인 것, 가지적인 것을 얻고 물질을 소거한다(모든 존재가 구조 아니면 정보로 환원되는 물리학의 어떤 판본들에서도 비슷한 추세를 볼 수 있다). 철학과 인문학에서는 비슷한 추세를 더 폭넓게 볼 수 있다. 거듭해서 담론적인 것, 의미를 나타내는 것, 체험적인 것, 텍스트적인 것, 기호학적인 것이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특권을 부여받게 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규정에 반대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안경―공교롭게도 하나의 물질적 보조 장치―처럼 이런 관념론이 매우 퍼져 있어서 우리가 식별하는 것조차도 어렵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물질 공포증의 원천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 작업하고 있는 "유물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끊임없는 물질의 소거를 유발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꾸로 나는, 전례 없는 방식으로 "신유물론"이라는 명칭 아래 귀속되는 사상의 변양태들과 사변적 실재론의 어떤 계보들(나는 사변적 실재론의 어떤 다른 계보들은 대단히 물질 공포증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한다)에서 전례 없는 방식들로 갑작스럽게 물질을 전면에 내세우는 현재의 역사적 순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물질이 왜 전례 없는 방식으로 가시적인 것이 되는가? 무엇 때문에 물질이 사유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도록 상황이 바뀌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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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