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빌 미첨: 오늘의 에세이-범심론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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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28.

 

물질, 마음, 그리고 형이상학

Matter, Mind, and Metaphysics

 

―― 빌 미첨(Bill Meacham)

 

지난번에 [...] 물질과 마음 중에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지에 관해 흥미롭게 토론했다. 친물질 진영은, 의식이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들에 근거하고 있고, 그래서 그곳에서 발견되는 신경세포들의 복잡한 연결망이 없다면 우리는 의식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물질이 근본적이다. 친마음 진영은 [...] 사실상 의식이 없다면 그런 의문조차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이며, 여타의 것들은 부차적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므로 마음이 근본적이다.

 

이런 종류의 의문은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은 실험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험들을 수행하고 그것들의 결과들을 해석하게 하는 개념적 도식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와 관련된 의문이다. 자신의 모든 지식이 엄밀한 경험적 탐구에 정초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형이상학은 피할 수 없다.

 

친마음 진영에 의해 흔히 인용되는 양자역학의 발견 결과들을 고려하자. 실험을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따라서 우리는 빛이 이산적인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빛이 결코 이산적인 것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파동이라는 점을 예증할 수 있다. 이런 두 관념은 서로 모순된다. 무언가가 어떻게 별개로 구분되는 동시에 연속적일 수 있는가? 그런데 실험 결과들은 애매하고 거듭해서 재현되었다. 입자를 탐지하는 실험을 구성하면, 빛이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과가 얻어진다. 파동을 탐지하는 실험(예를 들면, 유명한 이중 슬릿 실험)을 구성하면, 빛이 파동이라는 결과가 얻어진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모순되는 특징들 가운데 어느 것이 나타날지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객체의 물리적 현실은 여러분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선택하는 것에 좌우된다."

 

관찰이 이루어지기 전에 여러분의 관찰 대상은 가능한 상태들의 중첩 상태, 즉 미확정 상태에 있다고 한다. 그 대상이 관찰될 때에만 그것의 물리적 상태가 명확해진다(입자 또는 파동). 그리고, [...] 여러분은 그 상태에 대한 정확한 서술(특정한 입자가 어디에서 탐지될 것인지 같은 서술)을 미리 예측할 수 없다. 여러분은 통계적 견지에서 대단히 많은 수의 관찰된 상태들의 배치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친마음 진영은 이 모든 것을 의식의 수위성, 즉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들이 아무튼 물리적 현실의 모습을 결정한다는 점에 대한 증거로 여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제시하지 않은, 양자역학에 대한 다른 해석들이 존재한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양자역학에 대한 많은 해석들 가운데 가장 잘 확립된 것은 이른바 코펜하겐 해석인데, 그 해석은 1920년대에 코펜하겐 대학의 이론물리연구소에서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구성되었다. 여러 가지 판본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관찰이 관찰되는 특성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관찰"이 의식적일 필요는 없다. 미시적인 원자 규모의 객체가 거시적인 대규모의 객체와 상호작용할 때마다 관찰이 이루어진다. 한 장의 필름이 광자의 위치를 기록하거나, 또는 가이거 계수기가 전자를 검출하여 달깍 소리를 낼 때, 이 판본의 코펜하겐 해석은 관찰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물질 진영은 마음이 결코 그렇게 수위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가장 사변적이지 않은 코펜하겐 해석은 결코 존재론(정말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주장)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것은 "양자역학은 ... 에너지 양자들, 즉 고전적인 입자 관념도 고전적인 파동 관념도 적용되지 않는 존재자들의 다양한 측면들을  관찰하거나 측정할 확률을 다룰 뿐"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이런 제한된 견해에 따르면, 양자역학은 사실상 인간 관찰자들에 독립적인 현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어떤 관찰들의 확률을 서술할 뿐이다. 존재론적 사변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여기는 이 견해는 "입 닥치고 계산하라!"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덜 제한적인 형식의 코펜하겐 해석은 정말로 존재하는 것을 서술하지만, 관찰된 객체들이나 사건들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실험 결과들은 일상 생활의 여느 현상들과 꼭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사물과 사실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원자나 기본 입자들 자체는 현실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사물 또는 사실들의 세계가 아니라 잠재태 또는 가능태들의 세계를 구성한다." 존 휠러(John Wheeler)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미시적 특성도 그것이 관찰된 특성일 때까지는 특성이 아니다." 또 다시, 이 해설에서 "관찰"은 원자 규모의 객체와 대규모의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그런데 우리는 의식하는 관찰자를 그렇게 쉽게 제거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된 가이거 계수기도 미확정 상태에 처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가이거 계수기의 상태를 탐지하는 다른 한 장치가 그 옆에 설치되는 한편, 그 장치도 세계의 나머지 부분과 격리되면, 또한 그 장치도 미확정 상태에 처해 있을 것이다. 폰 노이만은 그 어떤 물리적 체계도 중첩 상태에서 붕괴되어 어떤 특수한 결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증명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마다 중첩 상태가 아니라 어떤 특수한 결과를 본다. 폰 노이만은 의식하는 관찰자만이 충첩된 확률들의 미확정 상태를 단일한 확정된 현실태가 되도록 만든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저 거시적인 대규모의 객체가 아니라, 의식하는 관찰자만이 실제로 관찰을 행할 수 있다.

 

코펜하겐 해석은 최소한 이런 세 가지 변양태가 있으며, 다른 해석들도 존재한다. 다세계 해석은, 미확정 양자 사건이 두 가지 길 중에 어느 한 길을 갈 수 있을 때마다 사실상 그것은 두 길 모두를 가며, 각 길은 별개의 우주를 산출한다고 말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각각 서로 인과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세계들이 있으며, 그리고 매 순간에 셀 수 없이 많은 세계가 더 만들어지고 있다. 데이비드 봄(David Bohm)은, 인간의 관찰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개별적인 입자들이 정말로 존재하고, 어떤 "양자 힘" 또는 "양자 포텐셜"이 각 입자를 자체의 목적지로 안내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입자가 관찰되는 지점이 우리에게 무작위적인 듯 보이는 까닭은 우리가 그것의 처음 위치와 속도를 알 수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대한 덜 알려진 다른 해석들도 많이 존재한다.

 

나는 그것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또는 어느 것이 나머지 것들보다 더 옳은지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들 모두가 관찰된 사실들에 부합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그것들 모두가 동일한 현상들을 예측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옳은지 결정하기 위해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실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과학적 설명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적 사변이다.

 

물질과 마음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근본적인지에 관한 논쟁도 그렇다. 대답은 형이상학적일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의식의 "어려운 문제"를 언급한다. 도대체 왜 물리적 과정이 풍요로운 내면 생활을 초래해야 하는가? 친마음 진영은 그 문제에 대답하기 어렵다는 점을 마음의 수위성에 대한 증거로 간주하지만, 그 문제는 똑같이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왜 순전히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을 초래해야 하는가?

 

나는 [...] 제삼의 대안, 즉 범심론(Panpsychism)을 제안하고 싶다. 범심론은 모든 것이 자체의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프시케 또는 마음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는 관념이다. 그것은 마음이 아무튼 물질보다 더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모든 것은 물리적이라고 가정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범심론이라고 불린다. 나는 그것이 사실상 "범물리심론(Panphysicopsychism)"이라고 불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모든 것이 물질과 마음 둘 다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것이 객관적(물리적)인 측면과 주관적(심리적)인, 또는 심적인 측면 둘 다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경험적 증거가 없는 경우에, 우리는 어떻게 이 세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들의 적절성을 판단할 것인가? 사건들에 대한 어떤 이론 또는 어떤 설명을 참으로 간주하는 것이 합당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몇 가지 인자들이 있다. 그 인자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합치성(congruence). 참된 이론은 우리의 경험에 합치된다. 그것은 사실들에 부합된다. 나는 참인 것은 실재에 대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는 실재와 접촉할 수 없고, 그래서 그 대신에 나는 "합치성"이라는 술어를 사용한다. 세 가지 형이상학적 주장들의 경우에 그것들은 모두 사실들에 부합되고, 그래서 이 인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관성(consistency). 참된 이론은 내부적으로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자체 내에 그 어떤 모순점도 없으며, 전적으로 우아하게 짜여져 있다. 여기서 나는 범심론이 이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이 근본적이라고 여긴다면, 물질로부터 주관성, 즉 마음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라는 문제는 사실상 난제가 된다. 마음이 근본적이라고 여긴다면, 뒤짚어진 문제가 난제가 된다. 그런데 마음과 물질이 똑같이 근본적이라고 여긴다면, "어려운 문제"는 해소된다. 물론, 모든 물리적인 것은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측면뿐 아니라 내부의, 주관적인, 또는 심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물리적 과정이 풍부한 내면 생활을 초래한다.

 

정합성(coherence). 참된 이론은 우리가 참이라고 여기는 여느 것들과 정합적이다. 그것은 우리 지식의 나머지 부분을 확증하거나, 또는 최소한 나머지 부분과 모순되지 않는데, 여기서 "지식"은 우리가 참이라고 여길 수 있는 엄밀한 이유들을 부여할 수 있는 믿음들을 의미한다. 범심론은 일견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듯 보이지만, 그런 외양은 거짓이다.

 

범심론에 대한 주요한 반대 의견은, 범심론이 분명히 살아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합당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지식과 정합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일상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 있거나 주변 환경에 대한 어떤 종류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아무 증거도 보여주지 않는 바위, 아스팔트, 은식기류, 탁자, 의자, 그리고 모든 종류들의 다른 것들을 발견한다. 우리의 일상 경험을 진실한 것으로 여기다면, 범심론은 확실히 그것과 정합적이지 않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우리의 일상 경험이 사물들의 궁극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명백히 단단하고 생기 없는 객체들은 주변 공간이 넓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원자와 아원자 객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의 고체성은 다양한 힘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확립된다. 아원자적 층위에서 실재는 활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양자역학에서 발견되듯이, 아원자적 실재는 관찰될 때에만 전적으로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럴듯하다. 범신론적 견해는 관찰이 현실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실재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들을 생기 없는 실체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라고 여기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을 언급한다. 그는 그것들을 "경험의 기회들"이라고 부른다. 각 기회는 경험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이 있는데, 전자는 주변 환경에 대한 그것의 경험이고, 후자는 다른 기회들에 대한 그것의 외양이다. 아원자적 규모의 양자 사건들에서 생성되는, 실재의 근본적인 단위들은 다른 사건들을 관찰하고, 그래서 잠재태로부터 현실태를 끌어내는 것들이다.

 

나는 이것이 대단히 비의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 요점은, 만물의 근원에 경험과 물질성 둘 다를 위치시키는 실재에 대한 이런 형이상적 해석이 양자역학의 발견 결과들과 전적으로 정합적이라는 것이다.

 

유용성(usefulness). 참된 이론은 유용해야 한다. 그것 덕분에 우리는 세계를 통제할 수 있고 세계와 관련하여 정확한 선택들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이론이나 설명에 근거하여 행동할 때 우리의 행위는 성공적이다. 이것은 실용주의적 진리관이며, 지배적인 사회적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조악한 이유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라는 낱말은 물리적인 것들의 세계와 관념들, 이론들의 세계 둘 다를 의미한다. 참인 것은 우리의 실천과 사유 둘 다를 조직하는 데 작동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현실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고 논리적 엄밀성으로 참된 결론을 추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범심론은 상당히 성공적이다. 그것의 유용성은 물리적 세계의 지배에 작용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포괄적인 개념적 틀로 결합시킬 수 있는 능력에 놓여 있다. 그것은 우리의 경험과 지식의 모든 요소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채 통일하는 정합적인 이야기를 제공한다.

 

[환원/소거주의적] 유물론적 견해는 경험을 포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관념론적 견해[...]는 물리적인 것들을 포함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범심론은 둘 다 포함한다.

 

화이트헤드는, 형이상학의 목적은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일반 관념들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해석한다"라는 낱말은 "우리가 향유하고, 지각하고, 의도하거나 사유할 때 의식하는 모든 것이 일반 도식의 특수한 사례라는 특징을 지닐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우리 경험 속 사물들이 물질적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들을 경험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물질과 마음 둘 다 똑같이 근본적이다. 그래서 둘 다 포괄하는 범심론이 그것들을 이해하는 최선의 형이상학적 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