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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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샹주 대 콜린 맥긴: 오늘의 언쟁-신경과학 &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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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7. 31.

 

신경과학 & 철학: 언쟁

Neuroscience & Philosophy: An Exchange

 

― 장 피에르 샹주(Jean Pierre Changeux)

 

제 책에 대한 콜린 맥귄(Colin McGuinn)의 서평["당신의 신경세포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What Can Your Neurons Tell You?)"]에 대한 대응에서 저는 철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 사이의 철학적 논쟁에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논쟁은 상당히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상이한 분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방대한 발달에 대한 내용을 필요로 합니다. 여기서 저는 그의 서평에서 보도된 대로의 사실들에 관심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선 저는 그의 서평의 전체적으로 오만한 문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류"나 "혼동" 같은 속성들은, 몇몇 철학자들이 여전히 사용하더라도, 과학자와 철학자 사이의 대화에서는 사용되지 말아야 합니다. 의견의 차이 또는 해석의 차이가 더 적절한 술어들입니다. 오귀스트 콩트가 분과학문들의 위계를 제안한 이래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늘날에는 철학자가 어느 누구에게도, 특히 과학자들에게 "훈계"를 할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맥귄은 자신의 태도를 문제삼기 위해 "구별짓기"에 관한 부르디외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신경과학자들과 철학자들 사이의 관계를 "마음-뇌"를 공동으로 이해하고 끊임없이 진전되고 있는 신경과학 분야의 결과들―분자적 층위에서 인지적 층위까지―을 인간 산물들의 이론적 측면과 실천적 측면 둘 다에서 평가하기 위한 유익한 협력 관계로서 훨씬 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현재 이런 역할을 수행하는 존 설, 대니얼 데닛, 또는 네드 블록 같은 철학자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판단을 할 때 맥귄이 활용하는 범주들은 발달 중인 신경과학의 현재 맥락에서는 더 이상 최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어떤 주어진 일단의 가치들로 상이한 분과학문에서 비롯되는 다른 일단의 가치들을 판단하는 유아론을 피하기 위해 해체되어 재구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철학에서 비롯되는 더 "본질적인" 가치들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계몽주의 시대의 백과사전적 다학제성을 재건하는 것이 이십일 세기의 난제라고 여깁니다.

 

둘째, 신경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다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을 잠정적으로 계획하기 위해 <<진, 선, 미: 신경세포적 접근(The Good, the True, and the Beautiful: A Neuronal Approach)>>에 의해 제기되는 쟁점들은 그 책 자체를 훨씬 더 넘어서고, 그래서 다른 곳에서 제시될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비판의 첫 번째 목적은 문장들을 맥락에서 떼어 놓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여 저자에 관해 잘못된 결론들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네 가지 사례들이 이런 견해를 예시합니다.

 

(a) 책의 제목과 내용과 관련하여 오해가 있습니다. 책 제목은 "신경세포적 설명"이 아니라 "신경세포적 접근"이라고 특정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목적은, 지난 십 년 동안 콜레주 드 프랑스의 내부에서 논의되었지만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방대한 미래의 노력을 여전히 필요로 하는 "진, 선, 미"에 관한 연구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위한 신경과학적 자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b) 저는 예술을 주체들 간의 상징적 소통으로 환원시킬 의도가 켤코 없었습니다.... 맥귄이 그 책과 이런 문제에 관한 다른 글들을 주의 깊게 읽었더라면, 저는 예술을 이런 식의 정의로 결코 환원시키지 않습니다. 저는 그 책의 여러 장과 다른 글에서 "예술의 규칙들"을 규정하고 서술하는 데 전념하였는데, 그것은 정확히 다른 사회적 활동들과 비교되는 예술적 활동을 특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c) 저는 하등 동물 종들이 의식의 징후를 보이지 않는다고 결코 말하지 않았습니다. 관심을 가진 맥귄이 "유전적으로 조작된 쥐로 탐구된 의식의 분자생물학"이라는 저의 페리어 강연을 <<필로소피컬 트랜스액션즈 오브 더 로얄 소사이어티>>에서 읽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제가 "의식의 층위들"이라고 반복적으로 불렀던 것에 관해 곰곰히 생각했더라면. 벌레, 파리, 또는 쥐도 의식적인 절차의 어떤 속성들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확실히 그것들은 인간들을 특징짓는 층위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d) 저는, "뇌와 마음" 사이의 관계에서 제가 보기에 통념적인 이원론적 입장에 바탕을 두고 있는 "상관물"이라는 낱말을 피하려고 항상 의도적으로 노력했습니다. 분자신경과학자로서 제 목적은 항상, 상당한 난점들에도 불구하고, 뇌 조직의 다중적인 포개진 층위들을 고려하면서 신경 연결망들의 활동 상태들과 심적 또는 행동적 활동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들을 확립하는 방식들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이런 견해를 채택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과학과 현상학 사이의 생산적인 논쟁을 위한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의 마음은 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우리 철학자에 의해 채택된 "신비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는 지성의 교정이 필요합니다. 최근 신경과학의 두드러진 진보는, 아마도 급성 "뉴로포비아(neurophobia)"를 겪는 관찰자를 제외하고는, 단순히 "뉴로매니아(neuromania)"로 묵살될 수 없습니다.

 

― 콜린 맥긴(Colin McGinn)

 

저는 신경과학 자체에 대해 아무 이의도 없습니다. 그것은 매력적이고 유명한 과학적 주제입니다. 제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신경과학의 많은 실무자들이 연루되어 있는 지적인 과도함―신경과학이 자체가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우산 아래 심리학과 철학 둘 다를 포섭하려는 일반적인 운동이 정말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샹주의 책은 틀림없이 이런 포섭 노력의 일환입니다. 그는 진, 선, 미에 대한 플라톤의 관심이 신경과학에 바탕을 둔 접근방식으로 대체되어 전통적인 철학적 탐구 양태들이 파기될 수 있다고 넌지시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그가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 부분에서 명백합니다. "판단을 할 때 맥귄이 활용하는 범주들은 발달 중인 신경과학의 현재 맥락에서는 더 이상 최신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평에서 저는 이런 일반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이른바 신경과학의 패권에 맞서 전통적인 철학적 탐구를 옹호하였습니다. 이것은 신경과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신경과학으로 철학을 대체하려는 시도(패드리셔 처칠랜드가 "신경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샹주는 제가 "오류"와 "혼동"이라는 낱말들을 사용한 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저는 이것들이 거친 낱말들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서평에서 제가 제시한 이유들 때문에 제게는 그 낱말들이 적절한 듯 보입니다. 믿음이나 지각 같은 심리적 상태의 내용과 심리적 상태 자체를 혼동하는 것은 단순한 오류입니다("심리주의"의 오류). 샹주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철학자가 어느 누구에게도, 특히 과학자들에게 "훈계"를 할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사실상, 철학자들이 과학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을 훈계하려고 노력할 아무 이유도 없지만, 철학적 개념과 이론들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을 훈계하려고 노력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문 영역을 벗어나 철학적 영역으로 잘못 들어서며―흔히 과학을 전혀 모르는, 시대에 뒤진 가련한 철학자들을 올바르게 이끌기를 바라면서―그리고 그 결과는 흔히 완전히 철학적으로 순진한 행위입니다. 최근에 심신 문제의 영역에서 이것이 매우 두드러졌는데, 심신 문제는 지금까지 철학이 관련 쟁점들에 대한 매우 정교한 이해를 발달시켜온 영역이며, 그리고 대담한 신경과학자가 약간의 철학적 훈련을 받고 경솔하게 끼어들 수 있었던 영역입니다. 여기서 유익한 협력이 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지만, 철학을 무시하는 태도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신경과학을 따라잡기 위해 철학적 범주들은 "해체되어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는 샹주의 제안이 제가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잘못된 견해의 일례입니다. 이른바 사실-당위 구분은 신경과학에 의해 쓸모 없게 되어버렸다는 관념은 그 쟁점들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전적으로 터무니 없습니다. 이것은 고전 논리학이 식물학에 의해 기반이 약화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는 제가 "문장들을 맥락에서 떼어 놓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샹주는 그의 목적이 신경과학에 바탕을 둔, 진, 선, 미에 관한 "연구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서평에서 제가 주장했듯이, 저는 의심스러운 환원주의와 행위-객체 오류(act-object fallacy)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 "프로그램"이 발상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급될 수 있는 전부는 이런 세 가지 범주들과 관련된 우리의 심리학적 상태들에 대한, 아마도 꽤 구체적인, 신경세포적 기초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저는 서평에서 말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샹주는 "예술을 주체들 간의 상징적 소통으로 환원시킬" 의도가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런데 제가 인용했던 구절에서 그는 "규정한다"라는 낱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합니다. 그는 예술을 ...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자신이 하나의 정의로서 제안하는 것의 규정적 적절성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그가 어떤 그런 "정의"도 거부한다는 말을 듣게 되어 기쁘지만, 제가 이의를 제기한 부분은 그가 그 책에서 적었던 것입니다.

 

또한 저는 샹주가 쥐에게 의식이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어 기쁘지만, 그렇다면 그는 왜 자신의 책에서 "의식은 신경계의 가장 복잡한 최상위 층위에서 출현한다"고 적고 있습니까? 이 두 진술은 서로 모순됩니다. 제가 판단 근거로 삼아야 했던 모든 것은 제가 검토하고 있었던 책에서 사용된 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람들이 의식을 인간들에게만 한정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일인데, 일반적으로 의식과 자의식을 융합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철학자라면 누구나 지적할 것처럼, "상관물"이라는 낱말을 사용하는 것이 이원론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H2O가 아니지만, "상관관계가 있는"이라는 낱말의 기술적 의미에서, 물은 H2O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원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사물 자체에 대해 상관관계가 있는 낱말이나 개념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의미와 지시에 관해 프레게를 보시오). 샹주가 가정하는 듯 보이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심적 존재자들과 물리적 존재자들 사이의 인과적 관계들이라는 관념은 자체적으로 이원론과 일원론 둘 다에 대해 일관성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제 견해가 아닙니다. 저는 의식이 무엇인지는 꽤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의식이 어떻게 뇌의 단순히 전기적이고 화학적인 특성들에서 비롯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제 요점은 신경과학의 진보가 "뉴로매니아"로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제 요점은 신경과학이 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단언하는 것이 일종의 뉴로매니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경세포들을 충분히 좋아합니다. 저는 그것들이 진, 선, 미를 이해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거의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했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