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애덤 제만: 오늘의 인용-현상학적 서술과 인과적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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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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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에 관한 두 가지 묘사

Two sketches on a rainy day

 

글을 쓰면서 나는 정원에 끊임없이 내리는 빗소리를 쉽게 판별할 수 있다. 창문을 통해 회색 빛이 비스듬이 들어온다. 벽난로에서는 불이 타닥타닥 소리내며 타오르며 공기는 나무를 태운 연기 냄새를 풍기고 있다. 내 의자는 딱딱하고, 작업에서 주의가 흩어질 때 나는 의자 팔걸이에서 팔꿈치에 가해지는 압력, 밀짚 좌석으로부터 받는 지지, 돌마루로부터 발바닥에 가해지는 저항을 느낀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따뜻하고 쓰지만, 달콤한 밀크 맛도 느낀다. 난롯불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여름 날은 쌀쌀하고, 내 피부는 냉기 때문에 조금 따끔따금하다. 우리 아이는 난롯불 옆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내 딸이 뒤척이고 낑낑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밖에는 바다 공기 속에 소금기가 있고, 구름이 흩어짐에 따라 무지개가 떠오를 듯 하다.

 

시각과 소리, 맛과 냄새와 촉감의 성질들보다 우리에게 더 실재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들과 같은 감각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 만큼이나 일상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은 붐비고, 그것들이 바로 우리의 세계다.

 

이제 동일한 사건들에 관한 대안적 서술을 고려하자. 그 서술은 불완전하지만, 그것의 특징은 명료하다.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가 어떤 유기체에 닿는다. 공기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진동하며 귀 속의 조개 껍질처럼 꼬인 막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복사 양자들은 각막과 수정체를 안전하게 지나면 눈 속의 또 하나의 민감한 막에 의해 흡수된다. 타고 있는 나무에 의해 방출되어 공중으로 퍼지는 분자들은 코 속의 상보적 분자들로 표류하는데, 그것들은 열쇠와 자물쇠처럼 딱 들어맞는다. 표피에서 작용하는 힘들은 표피 바로 아래의 미세구조들을 변형시킨다.

 

이런 모든 만남들은 단일한 공통 결과를 낳는다. 그것들은 귀, 눈, 코, 그리고 피부에서 뇌로 이어지는 신경들의 전기적 활성을 변화시킨다. 결국 이것은 이런 신경들이 서로 소통하는 말단들에서 일어나는 화학물질들의 방출을 변화시킨다.

 

뇌로 이어지는 신경들은 엄청나게 많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아찔할 정도로 복잡한 유형들로 갈라지고, 분화되며, 서로 얽힌다. 어떤 경로들은 근육이나 선(腺)들로 이어지는 신경들로 재빨리 인도하여 운동이나 분비―예를 들면, 약간의 커피 분자들이 콧구멍에 도착한 후에 이어지는 침의 분비―를 자극한다. 그런데 유기체의 이런 신경계를 통한 빠른 여행들은 예외적이다. 신경들 자체로 되돌아가는 회로적 경로들이 훨씬 더 일반적이다.

 

이것들은 부딪치는 분자와 양자들에 의해 유기체의 뇌 속에서 유발되는 활성이 복잡한 운명을 겪는다를 점을 확실하게 한다. 활성의 일부는 잠깐 동안 반향을 불러 일으킨 후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다. 일부는 마침내 작용에 영향을 미치는데, 첫 단락에서 여러분이 읽은 낱말들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연쇄에 있어서 작은 역할을 수행했다. 일부는 지나가는 행로들에 미묘하지만 오래 가는 흔적을 남기고, 그래서 나중 기회에 같은 자극이 아주 약간 다른 일단의 경로들을 흥분시킬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들이 동일한 일화에 관해 제공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설명인데, 첫 단락에서 서술한 '내부에서 바라본 풍경(view from within)'보다 거의 틀림없이 더 계발적일 것이다. 그런데 모든 예리한 시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첫 번째 설명에서 우리로 하여금 매우 실재적이라고 느끼게 한 경험의 성질들을 정말 생략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뇌 속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들'로부터 매우 다양한 경험, 나무를 태운 연기, 그리고 무지개를 불러 일으키는 데 어떤 종류의 연금술이 필요한지 궁금히 여기게 된다.

 

이런 두 묘사에 의해 초래되는 딜레마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첫 번째 묘사는 우리 마음을 지나가는 것을 서술하며, 두 번째 묘사는 우리 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서술한다. 둘 다 우리 삶에 관한 진리의 핵심적인 측면들을 포착하는 듯 보이지만, 이런 사건들의 두 연쇄 사이의 관계는 대단히 불가사의하다. 우리는 아무런 실제적인 손실도 없이 둘 가운데 하나의 서술 형식이 필요 없는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둘 다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는다면, 그것들은 화해될 수 있는가?

 

[...]

 

사건들에 대한 일인칭 설명과 과학적 설명을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인칭 서술들은 개별적 관점에서 개체의 경험을 보고하는데, 그것들은 '존재한다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말해준다. 그것들은 주관성에 관해 아무 해명도 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전혀 없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고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과학적 서술은 세계에 관한 재현 가능한 '비개인적인' 서술, 즉 불편부당한 모든 관찰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설명을 얻기 위해 주관성을 제거하려는 꼼꼼한 노력을 포함한다. 이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노력 때문에 경험에 관한 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문외한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전문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런 익명성은 성공적인 과학의 한 가지 놀라운 특성에 의해 정당화된다. 믿음직한 예측들을 제시할 때 과학적 서술은 세계에 대한 통제권을 제공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구절을 차용하면, 이런 종류의 지식은 '힘이다'.

 

관대한 견해를 취하면, 이 두 가지 서술 형식 사이에는 아무 경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목적이 다를 뿐이다. 일인칭 설명은 단 하나의 관점을 불러 일으키는 반면에, 과학적 해설은 모든 관점에 공통적인 세계의 특징들을 추출한다. 일인칭 해설이 우리에게 중요한 까닭은 우리는 서로의 생각과 느낌들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교가 불가피한데, 특히 그 두 서술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대안적 판본들을 제공하는 듯 보일 때 그렇다. 자체의 고유한 관심과 실제적인 편익을 감안하면 과학이 명백한 승자인 듯 보일 것이다. 어렵게 확보된 객관성은 아무 노력 없는 주관성보다 확실히 더 바람직하다.

 

이런 열광은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그것을 검토하려고 시도할 두 가지 훌륭한 이유가 있다.

 

우선 과학적 지식은 항상 잠정적이다. 어떤 믿음들이 유지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믿음들이 끊임없는 수정 과정에 처할 것인지 불확실하다. 이십 세기 초에 옥스퍼드 대학의 외과의사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 경은 새로 자격증을 취득한 일단의 의사들에게 경고했다. '제군들, 저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배웠던 것 가운데 절반은 틀렸으며, 그리고 우리는 어느 절반이 틀렸는지 모른다는 점을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두 번째 유보 조항은 더 근본적이고, 이 책의 핵심에 더 가깝다. 과학은 비개인적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자체의 인간적 기원을 초월할 수 없다. 과학은 인간의 관찰과 인간의 사유로 시작하고 끝난다. 우리는 '초월적 입장에 바라본 풍경(view from nowhere)'에 결코 전적으로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보고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점은 일인칭 서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학에 의해 달성된 대단히 규율된 서술 형식의 경우에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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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제만(Adam Zeman), <<의식: 사용 안내서(Consciousness: A User's Guide)>>(2002), pp.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