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애덤 프랭크: 오늘의 에세이-부정의 시대의 도래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3. 8. 31.

 

부정의 시대의 도래

Welcome to the Age of Denial

 

―― 애덤 프랭크(Adam Frank)

 

1982년에 여론 조사는 미합중국인들 가운데 44%가 신이 인간들을 현재의 형상으로 창조했다고 믿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삼십 년이 지난 후에 창조론자인 인구 비율은 46%다.

 

"기후 변화"가 공용 사전에 막 수록되었던 1989년에 63%의 미합중국인들이 그것이 문제라고 이해했다. 거의 25년이 지낭 후에 그 비율은 사실상 약간 줄어서 58%가 되었다.

 

이런 여론 조사들의 연대표는 나 자신의 과학 경력을 규정한다. 1982년에 나는 물리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었다. 1989년에 나는 대학원생이었다. 내 꿈은, 25년이 지나서 천문학 교수가 되어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에게 강력하지만 섬세한 과학적 연구 기예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꿈의 대부분은 실현되었다. 그런데 내 학생들을 과학의 최신 결과를 축하하는 세상으로 내보내는 대신에 나는 그들을 과학의 결실에 관해 양가적인, 심지어 회의적인 사회에 내보내고 있다.

 

이것은 내가 함께 훈련받은 과학자들이 인식하곤 했던 세상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맨해튼 계획에 복무했다. 그 후에 그들은 미합중국의 전후 번영을 추동한 기술들을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20세기 중반이라는 그 시기에 정치인들은 과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지만 과학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과학적 진리를 왜곡했고 러시아의 생물과학을 거의 파괴시켰던 리센코주의의 재앙이 여전히 신선한 기억이었다.

 

서양 과학의 승리 덕분에 나를 가르친 교수들 가운데 대부분은 진보가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과학과 정치 문화 사이의 거래―예를 들면, 1970년대의 핵무기 논쟁―가 때때로 제기되었지만, 그 논쟁들은 과학적 증거를 사용하여 전개되었다. 의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전히 확고하게 금지된 행위였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행위가 정치적으로 효과적이고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다. 협소하게 규정된 "창조론"은 20세기 대부분 동안 미합중국의 사유에서 소수파의 흐름이었다. 그런데 내가 학생이었던 시기부터 여러 해 동안 이루어진, 풍부한 자금을 지원받은 노력으로 그 이데올로기가 "창조과학"으로 능숙하게 재구성되어 미합중국 전역에 걸쳐 교실에 침투하게 되었다. 명백하게 비과학적임에도 불구하고, 진화를 부정하는 행위가 심지어 최고위 직책에 있는 몇몇 보수적 정치인들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그런데, 기후 부정자들은 창조론자들의 홍보 책자들을 인용하면서 수십 년 전에 과학적으로 확립된 기후과학의 근본적인 쟁점들에 관한 의심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은 오래 전에 반증된 몇 가지 연구 결과들을 동원하여 자폐증과 백신 접종 사이의 관련성에 관한 증명되지 않은 주장들을 제기한다.

 

그 목록은 계속된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주 정책 계획자들이 미래의 해수면 높이를 예측할 때 기후 데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오리건 주에서는 대단히 많은 부모들이 백신 접종을 거부하여 자체의 입학 정책을 수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그 어느 시점보다도 지적 추구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에 덜 참여하는 문화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 경험들이 기술적 진보에 의존하게 되었음에도, 미합중국의 많은 지도자들은 과학자 마이클 만(Michcel Mann)의 "정치의 과학화(scientization of politics)"라고 부르는 것을 위해 전후 협상을 폐기해버렸다.

 

나는 내 학생들에 무엇을 말하는가? 그들의 교육적 궤적 전체에 걸쳐 미합중국 사회는 이 아이들에게 과학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이 지구의 기후 역사에 관한 정직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살해 위협을 받는 이 시기의 상황이 그들에게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미합중국인들은 항상 자신들의 아이들이 더 밝은 경제적 미래를 맞을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그리고 미합중국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학생들이 과학이 항상 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는 세상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것은 과학을 종교로 전환시키는 것이나 올해의 최신 연구 추세의 노예적 수용을 요구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미합중국인들은 하나의 사회로서 많은 곤란한 난제들을 직면하며, 그리고 그것들은 더 많은 과학과 수학 교육으로 전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상실해버린 것은 과학의 증거에 기반을 둔 미종결의 과정들―결코 그것의 결과들이 아니라―이 그런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에 대한 이해다.

 

내 교수들의 세대는 창조론 같은 어리석은 관념에 당혹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반응할 수 있었다. 내 학생들은 그런 호사를 누릴 수가 없다. 그 대신에 그들은 관념들의 시장에서 과학의 격렬한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

 

학부 시절 동안 나는 나를 가르친 교수들 가운데 일부가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에 관해 내렸던 낮은 평가에 충격을 받았다. 내 경우에 과학을 대중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고무적이었지만, 그들의 경우에 그런 "봉사 활동"은 일탈 행위였다. 오늘날 그런 견해는 터무니없다.

 

세이건 씨가 과학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열정과 관대한 정신은 이제 우리 모두를 고무해야 한다. 과학 트위터 피드와 블로그들이 운영되고 있으며, 입력을 필요로 하는 시 규모의 과학 축제와 고등학교 과학 박람회들이 있다. 시민 정신을 갖춘 비과학자들의 경우에는 교양 있는 시민들의 참여를 요청하는 학교 이사회 교육과정 모임과 장기적인 기후 대응 계획들이 있다. 그리고 모든 부모와 조부모의 경우에는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과학 박물관에 조금 더 자주 방문할 기회가 있다.

 

거대한 입자 가속기와 우주 관측소들의 배후에 놓여 있는 과학은 세계 속에서 행동하는 방식이다. 간단히 서술하면, 과학은 하나의 전통이다. 그리고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들로부터 알고 있듯이, 가장 계몽된 전통들도 파괴되고 상실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평생의 과학도들이 지금 배워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