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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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다형적으로 도착적인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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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

 

다형적으로 도착적인 자연

Polymorphously Perverse Nature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작년에 나는 이것에 관해 꽤 많이 적었지만, 또 다시 반복할 가치가 있다. 철학과 문화에서 극복할 필요가 있는 것들에 관해 생각할 때, 현전의 철학들은 잊어라, 존재신학은 잊어라, 동일성 사유는 잊어라. 극복될 필요가 있는 한 가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근대적 자연 개념이다. 그렇다. 여기서 나는 조금 과장한다. 존재신학(나는 전근대적 자연 개념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고 여긴다), 현전의 철학들, 그리고 동일성 사유도 역시 정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지만, 나는 전근대적 자연 개념이 여타의 것들을 능가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이 불러 일으키지 않았던 억압과 착취 형식이 존재하는가? "여성은 남성보다 자연적으로 열등하다." "어떤 인간 집단들은 자연적으로 열등하고, 그래서 노예가 될 만하다"(아리스토텔레스). "어떤 인간 집단들은 자연적으로 열등한 지능을 소유하고 있고, 그래서 인종적 계급 분포는 불가피할 뿐 아니라 자연적으로 정당화된다." 사례들은 끊임없다.

 

오늘 나는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 시의 디스트릭트 9(실제로!) 여성 시의회 의원 엘리사 찬(Elisa Chan)의 발언을 읽었을 때 이것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과 관련된 법률을 논의하면서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

 

그것은 사실상, 말하자면, 아이들을 타락시키는 자연에 반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저는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의 더 많은 공격적인 발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전근대적 자연 개념의 본질의 정수를 나타낸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 속에는 존재자들이 되어야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존재자들을 지배하는, 존재자들을 자체의 참된 종착지로 끌고가는 텔로스, 목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존재자들을 분류하고 그것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규범적 힘으로 여겨진다. 자연은 존재자들을 현재의 모습으로 만드는 불가피한 힘으로 여겨지는―도토리는 불가피하게 참나무가 될 수밖에 없다―동시에 존재자들이 이런 목적들부터 벗어나는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자연에 반하는" 것은 비난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이것은 기묘한 종류의 규범성이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이 존재신학, 그리고 특히 유신론적 존재신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런 목적론을 통해서이다. 존재자들이 되어야 하는 텔로스가 존재한다면, 존재자들은 이런 식이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설계자와 입법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화이트헤드의 사유 속에서 이 쟁점에 관한 개선을 거의 찾지 못한다는 점을 서둘러 덧붙인다. 화이트헤드의 신은 확실히 유신론적 신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현실적 기회들에 대한 "유혹"으로 기능하는데, 그것은 현실적 기회들과 현실적 기회들의 사회들을 특수한 목적들 향해 "끌어당기는" 영원한 객체들을 선택한다. 아무리 무시하더라도 이것은 여전히 설계 논증들의 한 변양태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의 이중적 규범성 덕분에 그 개념은 앞에서 언급한 엘리사 찬의 발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권력과 억압에 대한 변호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에서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한 일반화된 의심이 발견된다. 이런 존재론에 대응하는 일반적인 전략은 자연과 문화를 강하게 구분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필연성, 인과성, 그리고 불가피성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이라는 영역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연성 또는 달리 될 수 있는 능력, 역사, 그리고 자유에 의해 규정되는 문화라는 영역이 존재한다. 강한 언어 구성주의와 문화 구성주의 같은 어떤 경우에서는 자연이 전적으로 제거된다. 이런 틀 속에서는 오로지 다양한 방식으로 분할되는 문화만이 존재한다.

 

문화가 자유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한에 있어서 처음에 이 운동은 유망한 듯 보인다.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은 재구성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황은 달리 구성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접근방식에는 문제들이 있다. 한편으로 문화주의는 사회적 조립체들을 언어, 기호, 인간의 의도, 의미, 규범 등과 같은 것들의 산물로 환원시키는 경향이 있다. 문제는 사회적 조립체들이 이것보다 훨씬 더 풍요롭다는 점이다. 도로의 존재와 부재, 사용되는 매체의 종류, 물의 입수 가능성, 날씨 유형과 사건, 유행하는 질병, 소비되는 영양의 종류, 강, 산맥, 사막 같은 지리의 특징 등이 모두 사회적 관계들이 취하는 형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문화적 접근방식에서는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사물과 사람들을 의미하고 의도하는 방식에 주의를 기울이기로 선택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주하는 환경의 물질적 특징들은 보이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다른 곳에서 나는, 강단의 사회학적 배치에 이런 종류의 관념론에 대한 경사를 강하게 고무하는 내재적 특징들이 존재한다고 논증했다). 항상 그렇듯이, 여기서 요점은 담론적인 것, 의미, 기호, 언어 등이 사회적 조립체들의 중요한 구성 성분들이 아니라는 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은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이다.

 

둘째, 기후 변화 때문에 생태가 정치적 투쟁의 현장으로 점점 더 부각됨에 따라 우리는 문화주의적 접근방식들의 한계점들을 점점 더 목격하게 된다. 기후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들은 우리로 하여금 오존 구멍, 수압파쇄(fracking)와 다른 형태들의 폐기물로 인한 강과 호수들의 오염, 날씨 유형의 전환와 농경의 변화, 가뭄, 해양의 데드 존 등을 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사물들을 어떻게 의미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만으로는 기후 변화와 관련된 쟁점들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쟁점들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유의 유물론적 차원과 실재론적 차원 둘 다를 필요로 한다. 명백히 여기서 자연에 관한 서사들의 분석과 해체거 필요할 것이지만, 또한 우리는 지구 온도의 상승과 그것의 효과도 심근경색처럼 실재적이며 결코 사회적 또는 언어적 구성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자연 없는 생태에 대한 요청과 결합된, 자연의 죽음에 관한 공표는 약간 성급한 행위였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연의 제거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자연이라는 개념 없이 지낼 수는 없다.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 찬의 발언 사례에서 그렇듯이 억압적 권력에 대한 변호로서, 유신론적 신학들의 규범성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을 자연화하는 이 개념을 재고할 필요가 있으며, 그리고 어떤 면에서 문화주의자들의 비판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그리고 여기서 문화주의도 비판받을 필요가 있는데, 그럼으로써 문화주의가 제공하는, 과학에서 정치가 담당하는 역할과 관련된 통찰들도 유지하는 한편, 문화주의를 과학에 대한 흔히 반동적이고 자동적인 태도들―인문학에서 만연하는 문제점―로부터 해방시키게 된다). 내가 보기에, 이기는 길은 "자연 없는 생태", 범문화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오직 자연만이 존재하고, 자연은 오래된 신학적 자연 개념보다도 훨씬 더 문화처럼 보이며, 그리고 자연은 본원적으로 내재적이고, 사물들이 되어야 하는 것을 지배하는 목적, 규범, 종, 그리고 원형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다. 자연은 스스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구성자도 없으며 설계자도 없다.

 

요약하면, 우리는 다형적으로 도착적이고 차이생성적인 자연 개념을 구축해야 한다. 물론 다형적인 것은 다양한 상이한 형태들을 띨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생명은 불가피성과 필연성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본질적인 가소성과 창의성을 증언한다. 프로이트의 틀 속에서 "도착적인" 것은 자체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생명 유지가 아니라 구순성의 쾌락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구순적 욕동(oral drive)은 "도착적"이다. 이른바, 구순적 욕동은 입과 혀의 목적을 전복한다. 이런 면에서, 프로이트는 성에 관한 비목적론적 설명을 제공했다. 자체의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해설의 참신성은 성적인 것과 생식적인 것을 분리했다는 데 놓여 있다. 프로이트의 틀 속에서 우리는 성 때문에 생식하는 것―성의 우연한 부산물로서―이지, 생식을 위해 성 관계를 갖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틀 속에서 성은 본질적으로 퀴어적이다. 이성애적 맥락에서도 그렇다.

 

놀랍게도,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본질적으로 도착적이고 퀴어적으로 간주하도록(이 메시지는 흔히 간과되지만) 가르친 사람은 다윈이었다. 진화적 사유는 끊임없이 스펜서의 사회 다윈주의와 진화생물학 같은 것들에 의해 남용되지만, 다윈의 첫 번째 단계는 목적론을 제거하는 데 놓여 있었다. 다윈의 틀 속에서는 기능이 형태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태가 기능을 수반한다. 독수리는 먹이를 잡기 위해 예리한 시각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리한 시각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독수리는 먹이를 더 잘 잡을 수 있다. 첫째, 기능은 특수한 형태, 유기체 형상의 특수한 특징의 결과다. 형태가 먼저 존재하고, 그 다음에 용도가 발견된다. "먹이를 볼 필요" 같은 선재하는 문제점이 먼저 존재한 다음에 육체의 특수한 기관이나 특징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동일한 형태에 대해 하나 이상의 기능이 발견될 수 있다. 예를 들면, 폐는 처음에 해양 유기체들이 부유하는 데 사용한 부레로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폐는 호흡 기능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다윈의 두 번째 단계는 이라는 범주를 전적으로 제거하는 것에 놓여 있다. 그의 저작들 가운데 하나의 제목이 <<종의 기원>>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은 놀라운 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데 다윈의 사유의 세부 사항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가 급진적인 존재론적 유명론자라는 점을 알게될 것이다. 다윈의 경우에는 오직 개별적 유기체들이 존재할 뿐이고 이런 유기체들 가운데 어느 두 개체도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다. 사실상 유기체들 사이에는 유사점들이 존재하지만, 공유된 본질은 전혀 없다. 우리가 어떤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이한 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들의 통계적 일반화일 뿐이라고 다윈은 주장한다. 이런 개체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부가적인 것―본질 또는 형상―은 전혀 없다. 이런 방식으로, 다윈은 전근대적 자연 개념의 핵심에 놓여 있는 목적론적 전제의 중심 토대들 가운데 하나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에서 개체들은 종의 사본들이다. 종은 이상형이고, 그래서 그런 이상형에서 벗어나는 개체적 차이점들은 종의 본질을 배신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방식으로, 종이라는 개념은 개체들의 서술, 규범, 그리고 목적론적 끌개로서 기능한다. 다윈의 틀에서는 모든 것이 반전된다. 여기서 종은 개체들의 통계적 결과이고 자체의 인과적 능력이 전혀 없다. 종은 구성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분류법들을 통해 "문화적으로" 구성될 뿐 아니라, 자연선택 같은 과정들을 통해서 "자연적으로"도 구성된다.

 

우리가 다윈의 진화론의 도착적이고 차이생성적인 차원을 만나게 되는 것은 다윈의 세 번째 단계, 즉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를 통해서이다. 사실상 개체들은 생식을 통해서 자체들의 사본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어떤 사본도 원본, 즉 복사되어지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 물론, "무작위적"이라는 것은 원인이 없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는 환경 속의 화학물질에서 대전된 우주 입자들까지 모든 종류의 것들에 의해 초래된다. 그것은 마치, 생명에 대해 자연이 "자유로운 변형"이라는 후설의 실천처럼 기능하면서 자체적으로 가능한 형태들을 탐색하는 듯 보인다. 이것이 자연의 도착성이다. 형태의 돌연변이, 형태의 다형성은 먹이 찾기 같은 종류의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 탐색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초래되기 때문이다. 끝없는 형태의 탐색을 제외하면 그것은 아무 목적도 없다. 이런 점에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는 양식과 형태의 특징들이 전경에 나타나는 반면에, 주제, 메시지, 목적, 그리고 의미는 배경으로 밀려나는 모더니즘 예술의 어떤 특징들과 유사하다. 자연 자체가 모더니즘적이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은 돌연변이를 종의 규범으로부터의 일탈로 간주하는 반면에, 다윈은 그 대신에 돌연변이 자체가 "종분화"의 동력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므로 개체적 차이는 종의 본질적 차이점들에 접근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노모스로부터 풀려나게 되어 종의 생성 원리가 된다. 근대적 자연 개념이 차이생성적이고 창의적인 것은 이런 면에서이다. 모든 종은 제거될 수밖에 없는데, 개체들이 복제될 때 새로운 차이점들, 새로운 종분화의 벡터들이 끊임없이 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개체들이 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개체들이 육화하거나 예화해야 하는 "자연적" 규범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개별적 유기체들의 "당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찬의 발언과 같은 논변들은 즉각적으로 효력이 상실된다. 자연은 퀴어적이다.

 

문화와 사회가 자연 현상이라는 주장은 흔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심지어 화나게 한다. 이것은 너무나 많은 인문학자들이 여전히 전근대적 자연 개념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테제를 들을 때, 인문학자들은 그것이 생물학과 진화사회학과 진화심리학의 견지에서 문화를 설명하기를 제안하고 있다고 즉각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종류의 것은 전혀 제안되고 있지 않다. 첫째, 그 주장은 자연만이 존재한다는 것, 모든 것이 자연 속에 묻어 들어가 있다는 것, 그리고 플라톤적 형상들과 이원론적 마음 이론들에 의해 제시되는 것과 같은 초월적인 것이 자연의 외부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세계는 자연적 세계 속에 묻어 들어가 있으며 자연적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된 그 어느 것도 사회적 조립체들의 역사적이고 창의적인 본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사회적 조립체들은 독특하고 창의적이지만, 아마존 우림과 하와이 산호초도 그렇다. 둘째, "자연"은 사회적 현상을 비롯한 만물에서 질료인과 작용인이 편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회와 관련된 자연주의는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에 호소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회적 구성체들을 설명하는 인과적 메커니즘들―흔히 기호적이고 언어적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다양한 측면에서, 근대적 자연 개념은 전근대적 자연 개념의 규범성의 효력을 무화시킨다. 종, 형태, 그리고 본질의 규범성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선행자들로부터의 개체들과 변이들 또는 변화의 벡터들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 여러분은 자연을 거스릴 수 없는데, 여러분이 자연을 거스릴 때 그것 역시 자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전환된 자연 개념과 함께 당연히 우리의 생태 개념도 전환해야 한다. 생태론자는 인간들이 실천과 기술을 통해서 개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립체들이 되어야 하는 방식에 더 이상 호소할 수 없는데, 자연이 되어야 하는 그런 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전공학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이 "비자연적인" 것이라고 항의할 수 없다. 이런 종류들의 논변들은 찬의 논변과 동일한 종류의 신빙성을 잃은 논리와 존재론을 정확히 따르고 있다. 오히려, 우리는 세계와 유기체들이 어떠해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우리가 제기하는 규범적 주장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며, 이것들은 "자연"(그리고 암묵적으로 설계자)에 의해 입법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규범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테크네와 퓌시스 사이의 구분은 근대적 자연 개념으로 붕괴되고, 그 대신에 우리에게는, 스피노자의 신처럼, 될 수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찬양하는" 다형적으로 도착적인 자연이 남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동물 분리를 무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며, 그 어떤 종류의 인간혐오주의에서가 아니라 이런 구분이 다양한 다른 인간들을 억압하고 여성들을 모욕하는 것을 지원한 방식뿐 아니라, 어떤 대단히 파괴적인 생태적 실천들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종의 예외주의를 계발한 방식을 인식하면서 인간들이 다른 동물들에 둘러싸인 동물들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