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테드 창: 오늘의 인용-경험의 궤적으로서의 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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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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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가 지금까지 애써 무시해 왔지만 피어슨은 그 문제를 이제 대놓고 지적했다. 엑스포넨셜사의 목표와 그녀의 목표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엑스포넨셜사가 원하는 것은 인간처럼 반응하지만 인간을 대할 때와 같은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존재이며, 애나는 그것을 제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엑스포넨셜사에게 그런 것을 제공할 수는 없다. 불가능한 일이니까. 애나가 잭스를 키우기 위해 보낸 세월은 단지 잭스를 재미있는 대화 상대로 키우고, 잭스에게 취미나 유머 감각을 부여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세월은 엑스포넨셜사가 추구하는 AI의 모든 성질을 잭스에게 부여했다. 현실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때 보이는 창조성, 중요한 결단을 맡길 수 있는 판단력 등을. 인간을 데이터베이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주는 모든 특질은 경험의 산물이었다.

 

[...] 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교사이기도 하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십 년 동안 존재하면서 습득하는 상식을 얻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자기 발견적 방법론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립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듬적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경험 전체를 스냅샷으로 찍어서 무한대로 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또 그 복제들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배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을 통해 태어난 디지언트[디지털 존재자]들은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각자가 과거에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소망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했고,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터득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런 디지언트들 각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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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드 창(Ted Chiang),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The Lifecycle of Software Objects)>>(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2013), pp.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