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생태적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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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4.

 

생태적 윤리(학)

Ecological Ethic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이번 학기에 모턴(Morton)의 <<생태적 사유(The Ecological Thought)>>을 가리치면서 나는 생태적 윤리(학)과 정치(학)에 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겨우 이 시점이 되어서야 우리가 이런 의문들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한다. 문제의 일부는 언어의 바로 그 함축적 의미들의 층위에 존재하며, 사유될 필요가 있는 것을 끊임없이 앗아간다. 많은 면에서 이것은 모턴이 내가 "자연에 관한 공간적 또는 지리적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비판에서 다루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모턴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다면, <<자연 없는 생태학(Ecology Without Nature)>>과 <<생태적 사유>> 같은 저작들에서 그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자연에 관한 공간적 또는 지리적 개념이다. 한편으로는 사회의 세계인 도시, 교외, 촌락, 그리고 농장의 영역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외부에 거대한 산호초, 브라질의 우림, 그리고 유타의 배드랜드의 영역이 있다. 이 모형에 따르면, 자연은 도시와 교외의 바깥으로 가는 장소다. 그것은 지리다. 생태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생태적 관심사들을 관심사들의 위계에서 꽤 낮은 곳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정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공포증 등(도시) 같은 것들에 관해 걱정할 것인가, 아니면 점박이올빼미 같은 것들에 관해 걱정할 것인가? 경제적 부정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동성애 공포증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반목들이 우리의 사회적 세계 또는 지리적 국소성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점박이올빼미에 관해 걱정하는 것은 특권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과 퇴폐적인 사람들의 걱정인 듯 보인다.

 

모턴의 제안―몇몇 환경 활동가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은 자연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연이라는 개념을 폐기하자는 착상에 신경이 쓰인다는 점에서 환경주의자들에 동조하지만, 다른 이유들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들이 모턴의 요점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모턴의 요점은, 점박이올빼미에 관해 더 이상 걱정하지 않기 위해 자연이라는 개념을 폐기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을 사회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우리는 점박이올빼미의 멸종 같은 것들을 사회적 관심사가 전혀 아닌 것으로 다루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자연이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에 신중한 이유는 환경주의자들의 이유들과 다르다. 첫째, 나는 모턴과 다른 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한다. 내게 "자연"은 사회의 외부에 놓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 또는 존재의 동의어이며, 원인들을 통해서 상호작용하는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존재자들로 전적으로 구성된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내게 마음과 사회는 사회 못지 않게 자연의 일부다. 이것은 관념론, 플라톤주의, 유신론적 종교 등에 대한 나의 일반적인 반론의 일부다. 나의 존재론에는 물리적 원인들만 존재하며, 그리고 나는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의 유물론―세계의 "틀지우기(enframing)"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만물 속에 들어가는 에너지(나는 에너지의 소비가 권력과 통제가 기능하는 방식에 관하여 비판 이론이 간과하는 중대한 점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뿐 아니라 육체적인 것, 정동적인 것, 그리고 사물들의 취약성을 인식하게 만드는 유물론―에 대한 모턴의 반론에 괴로워했지만, 모턴이 이 점에 관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기호학적 층위에서 개념들은 대립쌍을 둘러싸고 조직되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개념을 폐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도 모턴의 의도에 반하는 범문화주의(관념론의 한 변양태)를 낳는다는 점을 걱정한다. 다시 말해서, [...] 상호구속적으로 그리고 대립적으로 "자연"이라는 술어가 즉각적으로 "문화"라는 술어를 불러 일으킨다면, 자연의 소거는 모든 것을 문화로 돌릴 위험이 있다. 나는 이것이 모턴의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이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에서 나는 모턴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 장이 기능하는 방식에 의거하여 그를 힐책한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우리는 담론의 의도에 특권을 부여하는 대신에 담론의 효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의 글들은 여타의 것들과 마찬가지로 뇌 및 사회적 세계와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물질적 존재자들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객체지향 존재론과 동의어가 아닌 객체지향 철학의 물러서 있음 논제는 이런 종류의 지향주의(intentionalism)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선택이 주어진다면, 공간적 자연 개념에 대한 모턴의 거부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한편, 그럼에도 나는 범자연주의가 갈 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와 역사도 자연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 나는 이것이 루크레티우스와 스피노자를 계승하는 나의 계보라고 생각한다[...].

 

[...] 자연과 생태학을 탈봉합하려고 노력하면서 모턴은 생태적 존재론을 제안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생태학"이 자연적 생태계들에 관한 연구 또는 탐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는 반면에, 이 시기에 그의 저작에서 드러난 모턴의 논제는 세계는 송두리째 생태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생태학의 독특한 특징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은 사물들이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하며, 서로 의존하는 방식에 관한 탐구이며, 문화적이든 "자연적"이든 모든 존재자는 철두철미하게 생태적이다. 다시 말해서, 관계에 독립적인 존재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태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자들을 그것들이 다른 존재자들과 맺는 관계와 상호작용들의 견지에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제1장에서 모턴이 언급하듯이, 존재자는 실증적 항들이 없는 관계들 또는 차이점들로 이루어진 소쉬르적 체계다. 객체지향 존재자들이 지적했듯이[...] 이 논제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들이 충분히 많지만, 그럼에도 존재자들이 끊임없이 어떤 종류의 관계에 처해 있지 않다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또한 존재자들은 자체를 다른 관계들로 옮겨갈 수 있게 하는, 관계들을 넘어서는 최소한의 존재론적 과잉도 항상 지니고 있지만 말이다. 내게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관계들로부터 격리된 또는 물러서 있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가 새로운 존재자를 만나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또는(or)"의 논리가 아니라 "그리고(and)"의 논리다. 비생태적 존재론에서 우리는 1)존재자의 성질들을 여타의 존재자들에 독립적인 것(예를 들면, 표현형의 특징들을 규정하는 유전자들)의 내부에서 초래되는 것으로 여기거나, 또는 2)효과나 성질들을 단일한 원인에 귀속시킨다. 그물코(mesh) 또는 생태에서는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 다양한 원인들이기 때문에 이런 논리는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태아의 성은 유전자들 그리고 음식물 그리고 호르몬들 그리고 출생 순서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의 산물이다. 그것은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이런 것들 모두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이런 의미에서 내 커피잔의 색깔은 생태적이다. 그것은 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파장의 빛, 신경계, 그리고 그 잔의 화학적 특성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불을 껐을 때, 그 잔은 여전히 청색이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 잔은 빛의 광자 같은 다른 육(물)체들과 상호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자체의 색깔을 정말로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우리는 이제서야 윤리(학)에 대한 생태학의 의미들을 겨우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이어지는 글에 비추어 분명해질 것이다. "생태적 윤리(학)"이라는 술어를 들을 때 우리의 첫 생각(또는 나의 첫 생각)은 이것이 우리가 자연에 순응해야 하는 방법에 전념하는 윤리학의 특수한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박이올빼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는 것―브랜덤주의자들과 셀라스주의자들이 그들의 신칸트주의에서 아직 전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한 점―은 모든 윤리(학)은 어떤 존재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자체가 생태적이고 생태학이 결코 윤리학의 한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 참이라면, 우리가 윤리(학)에 관하여 생각하는 방식에 대한 많은 의문들(내가 해답을 갖고 있지 않는 의문들)을 제기한다. 현대 윤리 사상의 대부분은 책임과 상벌 규정을 둘러싼 관념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행위자에서 비롯되는 단일한 기원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인과관계에 관한 이론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모든 성질이 상호작용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산출되는 사건이라는 점이 참이라면, 이런 견지에서 인과성에 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모든 원인은 하나의 효과이고 모든 효과는 하나의 원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 무엇을 초래하는지 결정할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의문들을 매우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를 촉구한다. 추상적인 언어로 데리다, 바디우, 또는 레비나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강단인들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을 납치하여 10년 동안 성노예로 삼았던 아리엘 카스트로(Ariel Castro) 같은 남성들의 견지에서 생각하기를 촉구한다. 훌륭한 현상학을 실천한 다음에 삶과 실제 환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살아가면서 그리고 세계에 대처하면서 여러분이 다루게 되는 윤리적 쟁점들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하나의 인과적 기원에 귀속시키는 대신에 모든 개체를 하나의 상호작용자로 여기는 생태적 존재론[...]에서 우리는 세상의 아리엘 카스트로 같은 경우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생태적 존재론이 내 자신이 접근하고 있는 방향이기 때문에 나는 이 의문을 생태론적 존재론을 비난할 의도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명백히 책임과 과실을 규정하고 싶은[...] 이와 같은 경우들을 다루는 방법을 묻고 있는 것이다(<<활기찬 물질(Vibrant Matter)>>에서 베닛은 비슷한 쟁점들을 제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윤리적 쟁점들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보존하면서 상호작용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풍성한 개념적 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조차도 결코 확실히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