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존 할스테드: 오늘의 에세이-비환원론적 자연주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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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5.

 

열대우림 존재론: 비환원론적 자연주의를 찾아서

A tropical rainforest ontology: In search of a non-reductive naturalism

 

―― 존 할스테드(John Halstead)

 

"자유인의 신앙(A Free Man's Worship)"에서 분석철학자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과학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는 아무 목적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으며, 그리고 우리의 삶은 "원자들의 우연한 배열들의 결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빅뱅에 관한 책 <<최초의 3분(The First Three Minutes)>>에서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우주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우주는 더 무의미해 보인다." 이것들은 실재에 관한 황량한 견해들이다. 그런데 그런 환원론적 유물론이 자연주의적 이교도들의 유일한 선택지인가?

 

사막와 우림

 

<<자연의 질서들(Orders of Nature)>>(2013)의 저자인 로렌스 카훈(Lawrence Cahoone)은 철학자 윌리엄 윔샛(William Wimsatt)의 작업에 의존하여 인간의 마음과 의미 경험에 대한 여지를 남겨 두는, 현대 과학과 모순이 없는 실재에 대한 체계적 이해를 만들어낸다. 존재론은 존재 또는 실재의 본성에 관한 철학이다. 유물론자들은 최소주의적 존재론―철학자 대니얼 데닛(Daniel Dennett)의 말을 차용하면, "오캄의 면도날에 의해 깔끔하게 면도된" 존재론, 또는 분석철학자 W. V. O. 콰인(Quine)의 말을 차용하면, 미학적으로 "사막의 풍경을 선호하는 취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적합한 존재론―을 선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카훈은 "열대우림 존재론"(윔샛)으로 부를 수 있는 복잡한 비환원론적 자연관을 서술하는데, 그 자연관은 단 하나―물질―가 아니라 다수의 특성들의 견지에서 실재를 서술한다. 카훈의 비환원론적 존재론은 두 가지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첫째, 마음과 물질은 자연의 다양한 존재론적 특성들 가운데 두 가지일 뿐이다. 둘 가운데 어느 것도 토대적이지 않고, 어느 것도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이런 존재론적 양태 또는 특성들은 우주의 진화 속에서 나타난 복잡계들의 창발적인 특성들이다.

 

마음과 물질

 

형이상학의 역사는 마음/정신 대 자연/물질의 수위성에 대한 문제에 시달려왔는데, 관념론자들은 전자를 택하고 유물론자들은 후자를 택한다. 종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자연/물질보다 마음/정신에 특권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철학적 관념론은 자연주의자들에게 불만족스러운 해결책인 반면에, 그것에 대한 대안으로서 환원론적 유물론은 많은 자연주의적 이교도들에게 마찬가지로 매력이 없는 해결책이다. 카훈은 형이상학의 이런 "양극론(bipolarism)"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자연이 물리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들에 상당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자연이 마음과 경험을 초래한다는 것을 수용한다는 점에서 카훈은 철학적 자연주의자다. 그런데 그에게 "자연"은 물질적인 것들에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카훈은 유물론자 또는 "물리주의자"가 아니다. 카훈의 경우에, 마음과 물질 둘 다 자연의 많은 특성들 가운데 두 가지일 뿐이고, 그래서 실재는 둘 가운데 하나의 견지에서만 설명될 수는 없다.

 

환원 불가능성과 창발

 

자연의 전부는 물리학의 견지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한 때 유물론자들의 희망이었다. 최근 신경과학의 발견들은 마음을 뇌로 환원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왓슨과 크릭의 DNA 발견은 생물학이 화학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 보였다. 마찬가지로, 양자물리학이 모든 것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물리학자들이 있다. 그렇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생물의 철학과 화학의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상이한 분야들의 사상가들은 이런 기획을 의문시했다. 이 사상가들은 우주에서 가장 작은 것들의 법칙들이 여타의 것들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관념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생물학, 화학, 그리고 고체물리학에서는 아원자 물리학의 법칙들로부터 연역될 수 없는 현상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복잡한 현상들은 혼돈 체계, 비선형 체계, 자기조직화 체계, 그리고 전환점 현상을 포함한다. 체계의 부분들이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할 때, 환원주의적 설명은 실패한다. 복잡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체계 전체를 언급해야 하고, 전체는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는 특성들이 있다는 점이 발견된다. 이런 특성들은 창발적 특성이라고 불린다.

 

카훈은 존재론 자체가 창발적이라고 상정한다. 그는 자연에는 척도의 층위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복잡성의 위계가 우주 속에 구축되어 있다. 아원자적 층위, 고체물리학적 층위, 생물학적 층위, 심리학적 층위, 그리고 문화적 층위가 점점 증가하는 복잡성의 위계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물리적인 것, 화학적인 것, 생물학적인 것, 심적인 것, 문화적인 것들은 자연의 상이한 존재론적 특성들이다. 각 층위는 그것 "아래의" 층위에 의존하지만 그 층위로 환원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심적인 것들은 생물학적인 것, 또는 화학적인 것, 또는 물리적인 것들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심적인 층위는 생물학적 층위, 화학적 층위, 또는 물리적 층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특성들을 나타내고, 그래서 그런 층위들로 환원될 수 없다. 카훈에 따르면, 이런 이유 때문에 각 층위에 대한 상이한 과학적 분야들이 발달되었다. 과학들을 위계적 형식으로 배열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최소한 19세기 초 오귀스트 콩트(August Comte)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카훈이 기여하는 점은 이 모형을 실재의 본성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존재론적 복잡성의 이런 층위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하고,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가는 자연의 진화에 상응한다. 대략 140억 년 전, 빅뱅 직후에 우주의 유일한 특성들은 오늘날 아원자 물리학에 의해 밝혀진 특성들이었다. 수십억 년 후에는 무거운 원소들이 형성되었고, 그래서 화학을 필요로 하는 화학적 복잡성이 형성되었다. 수십억 년이 더 흐른 후에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행성이 형성되었고, 생물학에 대한 필요가 생성되었다. 점차적으로, 유기체들은 마음을 지지하고 심리학을 필요로 하는 생물학적 구조들을 발달시켰다. 훨씬 더 나중에 인간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문화―종교도 문화의 일부다―와 함께 사회학과 역사학에 대한 필요가 발달되었다.

 

"실재적"인 것

 

카툰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는 개인과 꼭 마찬가지로 "실재적"이고, 개별적 마음은 물리적 뇌와 꼭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생물학적 유기체는 그것을 구성하는 분자들과 동일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고, 분자들은 아원자 입자들과 동일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 모두는 자연의 일부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단지 물리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에 마음과 문화는 자연의 내부로부터 이해될 수 있다. 마음은 물리적 실체(즉, 뇌)가 아니라, 복잡한 물리적 체계들의 창발적 특성이다. 동일한 원리가 언어와 문화에도 적용되고, 종교나 자아초월적 경험에도 적용될 것이다. 카훈은 종교를 간략하게 논의할 뿐이지만, 이 모형은 환원주의를 피하는 종교적 경험과 자아초월적 경험을 위한 장소를 만들어내는 듯 보이며, 그리고 그런 경험들을 자연 자체의 창발적 특성으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카훈은 이런 식으로 자연을 생각하는 유일한 사상가는 아니다. 비판적 실재론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는 사회과학의 철학의 맥락에서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루 발라반(Alexandru Balaban)과 더글러스 클라인(Douglas Klein)는 화학의 철학의 맥락에서 상이한 과학적 분야들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창발적 개념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인지과학자이자 자연선택 비판자인 제리 포더(Jerry Fodor)는 과학에는 설명적 층위들의 위계가 존재하고, 그래서 심리학의 더 높은 층위 이론의 법칙들은 신경세포와 시냅스들의 행동에 관한 더 낮은 층위 이론들의 견지에서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이 이론의 가장 완전한 체계화는 심리학자 그렉 헨릭스(Gregg Henriques)에 의해 창안된 앎의 나무 체계다. 앎의 나무 체계의 가장 참신한 측면은, 지식이 진화적 연대표를 따라 배치된, 과학의 네 가지 집합에 해당하는 복잡성의 네 가지 차원들―물질, 생명, 마음, 그리고 문화―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시각공간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인간 문화의 복잡성에서 초래될 자연의 그 다음 차원은 무엇일지 추측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견해는 인간의 경험―아마도 종교적 경험과 자아초월적 경함을 포함하는―에 물질과 동일한 존재론적 가치를 부여하며, 그리고 양자장, 언어적 기호, 사회적 행위, 그리고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우림 속의 여타 특성들을 부여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종교적 경험은 그것이 유일신이나 정령 같은 어떤 초월적인 지시 대상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속해 있는 자연의 진행 중인 진화에 대해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견지에서 판단될 것이다. 많은 자연주의적 이교도들은 카훈의 "열대우림 존재론"과 헨릭크의 앎의 나무 체계가 설득력이 있다고 인식할 것인데, 그것들은 자연주의적 인과관계에 대한 우리의 신념에 충실한 실재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종교적 경험에 대한 여지를 남겨둘 뿐 아니라 그것을 우주의 창발적 특성으로서 물질과 동등한 지위에 위치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