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루크레티우스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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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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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역사와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것들 중에 속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몰락과 기독교/가톨릭 교회의 등장과 함께 그 텍스트의 현존하는 모든 사본들을 파괴하려는 일치단결된 노력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 동안 그 텍스트는 전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교회는 대단히 성공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십오 세기에, 남아 있던 한 권의 사본이 발견되었고, 그것은 재빨리 유럽의 다양한 언어들로 옮겨졌으며, 그리고, 그린블랫이 옳다면, 그것은 예술, 새롭게 발전하고 있던 과학, 그리고 새롭게 출현하고 있던 정치적 감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역사란!

 

그렇다면 이 책을 그렇게 위험한 책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다. 명백한 것들이 있다. 루크레티우스는 최초의 유물론자들과 자연주의자들에 속했고, 그래서 만물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적 원인들(초자연적 원인들과는 대조적으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철학과 관련하여 반(反)목적론주의가 존재한다. 중세 기독교적 견해에서는 목적론이 지배적이고, 사물들이 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전제에 따라 작동하는 반면에, 루크레티우스의 유물론적 자연주의는 "과거로부터의 원인들"만 허용한다. 이것의 결과들은 심대하다. 머리가 둘인 닭에 대해 중세 기독교적 정신이 생각하는 방식과 유물론적 자연주의자가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차이점을 고려하자. 중세 기독교도의 경우에는 머리가 둘 달린 닭이 괴물인데, "본성"상 닭이 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그래서 머리 둘 달린 닭의 발생은 신에 의해 설계된 이런 자연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루크레티우스주의자의 경우에는 머리 둘 달린 닭이 그것을 만들어낸 원인들의 결과일 뿐이고, 그래서 전적으로 자연적이다. [...]

 

루크레티우스적 우주에서는 그 어떤 자연적 당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현대의 대중정치에서 수많은 논쟁들이 "자연적 당위들" 또는 목적들의 존재를 신봉하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점을 알고 있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결혼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이루어진다." "성은 생식을 위한 것이다." "남자들은 이런 역할이 있고, 여자들은 저런 역할이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들은 그저 창세기의 두 가지 창조 신화들이 문자 그대로 참인지 여부에 관한 논쟁들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에 자리를 할당하고 "자연적인" 성 행위을 규정하는 신이 정한 당위들이 존재할 정도로 세계가 목적론적인지 아니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격렬한 동성애 관계를 갖는 쥐들이 [...] 달걀을 낳는 닭들의 존재에 못지 않게 자연적일 정도로 자연은 아무 목적이나 목적성이 없는지를 둘러싼 논쟁들이다.

 

물론, 진정한 유물론적 자연주의의 반목적론적 정향에 덧붙여,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제3권에서 영혼은 물질적인 것이고 죽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루크레티우스의 놀랄 만큼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예증들도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죽고 나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성직자들의 설교에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논변들은 종교와 미신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들 가운데 하나를 잘라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크레티우스의 치명적인(그리고 내 생각에 흔히 불공정한) 종교 비판이 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 책이 그토록 위험한 책이었는지에 관해 숙고할 때 나는 이 책이 당시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낸 기독교의 정치적 권력이나 약속의 바로 그 핵심을 공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존재의 거대한 연쇄"라는 관념에 바탕을 둔 목적론적 우주 관념 때문에 중세 기독교적 틀 내에서는 민주주의와 혁명적 정치가 불가능했다. 중세적 정신의 경우에, 사회적 역할, 지위, 그리고 정체성들은 인간들과 사회의 발명품이나 창조물들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몸무게처럼 신이 정한 인간 육체들의 객관적 특성들이었다. 왕은 신이 정한 왕이었고, 여성은 사회적 질서에서 신이 정한 지위와 특수한 역할이 있었으며, 농노는 존재의 거대한 연쇄에서 신이 정한 지위를 할당받았다. 왕을 공격하는 것은 그저 왕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의지도 공격하는 것이었다. 농노로서의 지위를 넘어서려는 노력은 그저 부당한 사회적 질서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질서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런 틀 내에서는 민주주의적 정치가 불가능한 까닭은, 민주주의는 우리가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이런 질서는 우연적이거나 달리 될 수 있다는 관념에 전제를 두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러므로, 피터 게이(Peter Gay)가 주장하듯이, 다양한 혁명들(미합중국 혁명, 프랑스 혁명, 아이티 혁명, 러시아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계몽주의는 기독교를 뛰어 넘어 고대 그리스-로마로 복귀해야 했다.

 

루크레티우스가 특성(property)과 상태(state) 사이의 차이를 구별짓는 것을 읽을 때 우리는 신이 정한 이런 사회적 질서의 바로 그 토대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그를 만난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제1권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 항구적 성질[특성]이란, 치명적인 분해가 없이는 결코 분리되거나 따로 떼어내질 수 없는 바의 것이다. 돌의 무거움이나 불의 뜨거움, 물의 유동성, 모든 물체의 접촉성, 빈 공간의 접촉 불가능성과 같이. 반면에 노예 상태, 빈곤함, 그리고 부유함, 자유, 전쟁, 화합, 또 그것이 오고 가는데도 본성이 그대로 유지되는바 그 밖의 것들, 이것들을 우리는 의당 우연적 성질이라고 부르곤 한다.(58-9)

 

특성은 사물에 고유한 것이어서 사물 속에 실제로 존재한다. 나의 온티콜로지(onticology)의 틀 내에서 나는 사물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성질(quality) 또는 특성[나는 이것을 "국소적 표현(local manifestation)"이라고 부른다]이 아니라 능력(power) 또는 성향(disposition)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약간 트집을 잡는다. 어떤 바위의 무게는 그 바위 자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바위가 존재하는 곳과 관련하여 출현하는 관계적 특성이다. 이 무게 또는 국소적 표현은 지구와 달의 상이한 질량 때문에 지구와 달에서 상이하다. 게다가, 이 무게 또는 국소적 표현은 그 바위가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다르다. 나는 대부분의 성질 또는 국소적 표현들이 이런 식으로 관계적이라고 믿는다. 그것들은 사물들 자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향유하는 관계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출현한다.

 

이것을 제쳐두고, 위 행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것은 상태에 관한 루크레티우스의 논의다. 사실상, 루크레티우스는 여성, 프롤레타리아 계급, 소수자, 왕, 부자의 사회적 지위는 이 존재자들의 특성이 아니라, 사라지거나 변화될 수 있는 우연적 상태라고 주장한다. 중세 기독교의 견해는 사회적 지위와 관계들을 사물들 자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사회적 역할과 지위들은 우리가 만들어내거나 발명하는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그것 자체로, 그는 인간 육체들이 음의 엔트로피로 배치되고, 질서정연해지며, 조직되는 방식이 이 육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들이 아니라, 이 육체들의 자연적 특성들이라고 주장하는 사회적 질서의 바로 그 토대에 이의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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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