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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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에너지, 일 그리고 열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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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19.

 

에너지, 일 그리고 열정치학

Energy, Work, and Thermopolitic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존재지도학(Onto-Cartography)>>에서 나는 이 견해를 제시하며, 이 블로그 글뿐 아니라 다른 강연과 논문에서도 이 견해를 제시했지만, 이 견해는 거듭해서 제시할 가치가 있다. 철학과 이론의 세계에서 에너지와 일에 관한 담론이 거의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주장을 할 때 나는 석유정치학과 노동 같은 것들에 관해 다수의 글들이 쓰여졌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자.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나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개념들로서, 존재의 중요한 차원들로서의 에너지와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정말 문자 그대로의 견지에서 에너지와 일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에너지를 지칭할 때 나는 정말 문자 그대로 햇빛, 열, 중력에너지, 화학에너지, 칼로리 등을 지칭하고 있다.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조작의 성능 또는 상태 변환 또는 힘의 인가를 통한 운동과 에너지 흐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자동차 엔진에서 피스톤을 움직이게 하는 방식을 지칭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노동은 상태 변환이나 운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일의 한 형태이지만, 일을 구성하는 것의 작은 부분집합일 뿐이다. 일은 우주 또는 존재의 모든 곳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것―사유 자체까지 포함하여(사유―우리는 이것을 "관념적"이라고 잘못 간주한다―는 우리가 소비하는 칼로리의 1/5정도를 태운다)―에 대해 에너지와 일 둘 다가 필요하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일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육체, 도시, 생태계, 사회적 조립체, 학술 토론 등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든 간에 세계 속에서 에너지와 일을 포함하지 않는 과정―내가 제시하는 존재론에서 "과정"은 "객체"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이름이다―은 단 한순간도 없으며, 자연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든 문화 세계에 관해 이야기하든 간에 에너지와 일은 우리와 관련된 모든 것의 환원 불가능한 차원들이다. 처음에는 일과 에너지를 문학 토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지만, 소설조차도 생산되고, 배송되며, 수용되기 위해서는 일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문학적 인공물들도 열역학적 차원을 갖는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이 블로그 글을 쓰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나는 칼로리와 화석 연료 둘 다를 태우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에너지가 햇빛으로부터 포획되고, 변환된 햇빛이며, 그리고 처음에는 식물에 의해 고체로 변환된 다음에 이 식물을 먹은 동물 육체의 형태든 화석 연료의 형태든 다른 고체로 변환된,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는 오렌지 농축액처럼 농축된 햇빛이라는 점에서 이 블로그 글은 궁극적으로 "태양성(solar)"―아마 네가레스타니(Negarestani)가 서술했듯이―이다. 모든 생명체와 사회적 존재자들의 기원은 태양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존재 전체의 근거가 태양이기 때문에, 아낙사고라스가 태양은 신이 아니라 따뜻한 돌이라고 말했을 때 그리스인들이 왜 당황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철학과 이론이 존재의 근본적인 차원으로서의 일과 에너지를 그렇게 지속적으로 망각하는 듯 보이는 것은 어떤 일인가? 존재의 이 두 가지 차원이 모든 쟁점에 대한 모든 토론에서 포함되지 않는 기본 개념들이라는 것은 어떤 일인가? 철학자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 영역, 즉 사유 또는 정신의 영역과 객체 또는 물질적 사물의 영역이 있는 듯 보인다. 사유 또는 사물. 사유와 사물. 메를로 퐁티(Merleau-Ponty) 같은 사상가들에서 나타나는 육체―이것은 정말 육체가 아니라 육체에 대한 우리의 [신뢰할 수 없는] 의식적 경험에 대한 서술이다―에 대한 멋진 논의에서도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는 없는 듯 보인다. 정말로 삶에서 먹는 것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피로도 사소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자주 피로를 겪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단히 민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유와 사물이 우리의 범주들을 망라하는 듯 보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약간 진부한 주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요, 레비, 모든 것은 일과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에너지와 일에 대한 잘 발달된 담론이 부재하기 때문에 우리의 해방 투쟁의 핵심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인간의 삶과 집단들을 구성하는 권력의 어떤 기능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지젝(Zizek)이 슬로터다이크(Sloterdijk)의 <<냉소적 이성 비판>>을 논의하는 행을 읽을 때 나는 괴롭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데올로기의 지배적인 기능 방식은 냉소적이라는 테제를 제시하는데, 이것은 고전적인 이데올로기 비판 절차를 불가능하게―또는 더 정확하게 헛된 것으로―만든다. 냉소적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가면과 사회적 실재 사이의 거리를 전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그 가면을 고수한다. 그렇다면 슬로터다이크가 제시한 대로 공식은 이럴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다;. 냉소적 이성은 더 이상 소박한 것이 아니라, 계몽된 허위 의식의 역설이다. 거짓됨을 매우 잘 알고 있고, 이데올로기적 보편성 배후에 은폐된 특수 이익을 잘 인식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그것을 행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계속해서 지젝은 이데올로기란 지식과 믿음의 층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행동의 층위에 있다고 넌즈시 말한다. "의식적으로는 돈이 종이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그것이 일종의 불가사의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그것에 대해 행동한다." 의식적으로는 종교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가면 여전히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고, 어떤 낱말들을 피하며, 예배 중 어떤 의식들에서 무릎을 꿇는다. 기타 등등. 나는 내 믿음이 내 머리 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지젝의 주장에 따르면, 믿음의 진실은 내 행위에, 내가 행하는 것에 놓여 있다. 내가 이데올로기를 극복할 수 있으려면, 그것은 그저 나의 내면적 믿음과 확신을 변화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나의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반영하는 행위를 극복하는 문제이다. 나는 내 환상을 횡단해야 한다.

 

나는 지젝의 테제에 진리가 존재한다는 점을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여전히 담론적인 것, 사유, 기표의 층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담론성이 무의식적일지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여전히 담론적인 것이다(그리고 분명히 담론적인 것은 문제의 일부이다). 그 결과, 가설에 따르면, 이런 담론성 또는 환상 구조의 변화가 현재의 사회적 조립체들의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글쎄, 이것은 해가 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일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조작들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 참이라면, 사람들이 억압적 조건에서 계속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해답이 더 단순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대안적 삶의 형식들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에너지 싱크(energy sink)", 즉 에너지 흐름의 유인 영역에 갇혀 있다면 어쩔 것인가? 여기서 지식의 층위에서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폭로하고, 환상의 층위에서 환상을 횡단하면서도 여전히 삶의 형식을 고수하는 까닭은 그들이 특수한 에너지 싱크, 에너지의 지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아가는 데 이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우리는 기호정치학(사람들을 삶의 방식에 묶어두는 담론적 구성체의 해체)이라는 현장 외에 "열정치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정치적인 것들의 다른 한 현장 앞에 있을 것이다. 에너지와 일은 믿음과 이데올로기의 충위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열정치학―그리고 이것은 내가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은 담론적 층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에너지 싱크들의 구성을 필요로 할 열정치학적 차원에서의 개입과 삶에 대한 실제 요건들과 관련되어 있다. 에너지 싱크는 파리를 가두는 거미줄과 유사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내가 도대체 생각할 수 있다면, 때떄로 나는 내 사유의 유일한 주제는 거미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를 삶의 형식들에 붙들어 매는 거미줄에 관해,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짜여지고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관해 조금 알고 싶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끌림의 체제에 돌이킬 수 없게 갇혀 있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즉 거미줄이 해체될 수 있으며, 우리가 버둥거리는 파리처럼 이 거미줄에 더욱 더 깊이 우리를 옭아 매는 개입의 형식들에 연루되지 않도록 이 거미줄에 관해 알고 싶다. 특수한 사회적 조립체에서 에너지가 배치되는 방식―우리 기술을 추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연료, 칼로리의 입수 가능성과 원천, 가정을 난방하고, 여행하며,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연료, 농업이 조직되는 방식, 에너지가 수송되고 분배되는 방식―이 그런 거미줄이다. 사실상, 부분적으로는 돈 자체가 에너지 흐름을 나타내는 일단의 기호적 단위체들이고 자본은 에너지 흐름의 동역학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나는 열정치학이 기호정치학을 대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일단의 다른 정치적 개입책들을 요구하는 정치적 투쟁의 다른 한 현장, 정치적 종속의 다른 한 현장일 뿐이다. 물론, 열정치학이 오늘날 정치적으로 적실한 까닭은 그것이 특수한 에너지 싱크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에 내재하고 그것을 통하는 종속의 현장일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일이 돌이킬 수 없게 폐기물을 산출하고(열역학 제2 법칙) 오늘날 전지구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추동하고 있는 폐기물로 골머리를 앓고 있기 떄문이다. 게다가, 화석 연료가 풍부한 지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항구적인 전쟁에 볼 수 있듯이, 에너지 정치학 역시 전지구적 갈등의 배후에 있는 추동력들 가운데 하나이다. 열정치학에 덧붙여 땅정치학(geopolitics)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땅정치학은 상이한 민족국가들 사이의 국제 정치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땅의 정치학, 즉 기술, 하부구조 그리고 강, 기후, 미생물 등과 같은 물리적 지리의 특징들이 사회적 관계들이 취하는 형식에 기여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시간정치학(chronopolitics) 또는 시간이 구조화되는 방식―예를 들면, 노동일―이 존재할 것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른 활동 형식들을 수행하기 힘들게 될 것이다. 정치적인 것들의 이런 현장들―그리고 나는 다른 현장들도 많이 있다고 확신한다―각각은 나름대로의  활동주의 유형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