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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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제1세계 철학으로서의 존재론적 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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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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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제와 라투르]는, 첫째 모든 존재자들이 현존한다고 인정하고, 둘째 누군가의 소중한 우상(또는 그가 소중히 여기는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전쟁 선언'―스탕제가 흔히 말하듯이 '이것은 전쟁을 의미한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존재/비존재의 의미에서 존재정치적 담론을 지식/믿음의 지형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들의 기본 주장은 "타자성에 대한 존중", 즉 정치적 다원주의는 여러분이 그것들의 존재를 '믿지' 않을지라도 타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자들에게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에서 비롯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저는 그 신을 추종하지 않고, 그는 저를 지배하는 힘이 없습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당신의 신은 무의미하고, 유치하며, 존재하지 않는 환상입니다, 어른이 되세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예의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요점은 타자들의 우상과 신들에 존재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 그것들의 존재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전쟁을 선언하는' 것이고, 시민적 담론, 다원주의적 공존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실재론과 관념론을 화해시키자는 주장은 항상 관념론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인다는 따위의 말로 한때 빈정대었던 사람은 리처드 로티라고 믿고 있다. 사실상 그런 접근방식들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은 실재론이 아니라, 오히려 만연하는 반실재론을 얻게 될 뿐이다.

 

나는 이것이 또한 스탕제와 라투르가 옹호하는 "비논쟁적 다원주의"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다원주의는 실재론이 아니라, 사실상 철저한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이다. 나는 이것이 <<비환원자들(Irreductions)>>에서 제시된 라투르의 논변과 관련된 주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요즈음 나는 이전에 그것을 옹호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 계몽주의적 비판과 그가 "환원"이라고 부르는 것 둘 다를 거부하면서 라투르는 "펜테코스트파(Pentecostal)는 정말 성령으로 가득 차 있다"는 따위의 것을 말하고 싶어하며, 19세기 현업 과학자들에게 열은 실제로 유체이고 플로지스톤은 실제로 사물들이 연소될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인들에게 번개는 실제로 제우스의 분노의 표현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라투르는 다른 집단의 "존재론"에 의해 상정되는 존재자들을 환원시키거나 해명할 것이 아니라 그 존재론의 내부로부터 설명들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상 이것은 다원주의이며, 그리고 그것이 현업 민족지학자나 인류학자에게 합리적인 다원주의이다. 문화인류학을 수행할 때 우리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다른 인간 집단이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세계가 어떠한지에 대한 담론과 전적으로 다르다. 철학자―최소한 실재론자 유형에 속하는―가 관심을 갖는 것은 후자이다. 실재론자에게는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 즉 펜테코스트파, 19세기 과학자, 그리스인, 현대 자연주의자 등이 세계에 대해 갖는 상이한 "이론들"에 독립적으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 있으며, 실재론적 철학 작업의 일부는 세계가 어떠한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이런 세계상들 가운데 일부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세계상들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하거나 또는 그들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입장들이 그르거나 틀렸다고 말할 때 완곡하게 말해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유물론적 실재론자는 방언을 말하고 있는 펜테코스트파 교도와 관련하여 심원하고 유의미한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쉽게 주장하면서도 진행되고 있는 일이 성령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나는 어떤 특수한 세계상이 잘못되었다고 감히 말하는 실재론은 아무튼 비관용적이거나 전체주의적이거나 억압적이라고 간주되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타자"를 용인하는 한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진보적이라고 간주하고, 어떤 세계상과 윤리가 그저 갈못되었거나 틀렸다고 여기는 믿음을 억압적인 불관용, 외국인 혐오증 등의 우파적 사례로 간주하는 듯 보이는 좌파 사상의 모형이 존재한다. 이것은 크리칠리(Critchley)가 옹호하는 것과 같은 형식들을 갖춘 신실용주의가 등장하는 동안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서 특히 지배적인 틀인 듯 보인다. 이 시기 동안 정치는 관용을 어떻게 조장할 것인가라는 형식을 띠었다. 우리는 타자을 인정하고, 자기 견해의 우발성을 인정하며, 그 견해가 세계에 대한 서사적 구성물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틀 안에서는 그저 "진리"라는 낱말을 발설하는 것도 억압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는데, 그것은 배타적인 행위로 여겨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형식의 철학과 정치 이론은 "제1세계 철학"으로 적절히 지칭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적인 것을 생각하는 이런 사유 방식은 특수한 계급 입장을 반영하였다고 생각한다[...]. 1990년대는 (최소한 미국에서는) 특수한 인구 계층에게 상대적인 번영의 시기였다. 그 결과, 경제적 쟁점들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벗어나 있었다(이 시기 동안 경제적 마르크스주의는 거의 보이지 않았으며, 이런 이유 때문에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치는 기호학의 형식, 문화적으로 형성된 정체성의 형식을 띠었다. 좌파 기획은 한 특수한 해방 형식(경제적 해방)에서 다른 한 해방 형식―타자성, 상이한 정체성, 상이한 문화적 실천의 인정―으로 바뀌었다. 결국 이런 인정은 관용을 낳고 주변부를 겨냥한 끔찍한 증오 범죄를 막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달성하는 데에는 모든 정체성의 사회적으로 구성된 본성을 인식하는 것, 즉 다원주의가 필요했다[...]. 여기서 나는 이런 정치적 기획이 대단히 가치가 있었고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재빨리 부언한다. [...] 그럼에도 이런 양식의 정치의 수위성은 꽤 특권적인 사회경제적 조건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할 가치가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어두운 측면이 존재한다. 모든 것이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주장할 때, 다원주의자는 진리에 대한 공적인 숙려의 가능성의 기반을 훼손한다. 모든 것은 자기 기호에 가장 잘 맞는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자유롭게 선택하는 세계에 대한 선택적 서사 또는 이야기, 선택적 세계상이 된다. 1990년대 동안 현상학과 탈구조주의 둘 다에서 철학의 대부분이 신학적 전환으로 귀결되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과학을 비롯한 모든 것이 세계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서사 또는 이야기일 뿐인 상황에서 그냥 더 나아가서 신앙 도약을 하지 않을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신학적 전환은 꽤 무해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9-11 이후에 좌파의 허가 찔렸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전쟁에까지 이르는 도상에서 한 저명한 부시 행정부 관리가 "우리가 현실(실재)을 만들기 때문에 현실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된 사실을 떠올리자. 기본적으로 그는 존재론적 다원주의자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었다. 실재가 환영일 뿐이라면, 실재가 구성물일 뿐이라면, 자신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된다고 생각하는 실재는 무엇이든 서사적으로 그냥 구성하지 않겠는가? 사실들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사실들 자체는 서사적 구성물일 뿐이다. 그것은 라투르의 비환원주의에서 직접 도출되지 않는가? 기후 변화 거부주의의 경우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가 실재를 담론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으로 다룬다면, 기후과학자의 진술은 여타의 주장보다 진리에 대한 더 큰 권리 주장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도대체 왜 그런 진술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또는 마지막으로 경제의 경우에는 어떤가? 경제가 전적으로 구성물일 뿐이라면, 적하 경제는 작동하지 않는다, 긴축은 경제를 죽인다 등등의 주장을 거듭해서 제기하는 다수의 경제학자들에 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 그들의 진술 역시 구성물, 여러 실재들 가운데 한 "실재"일 뿐이다.

 

최근에, 경제, 기후 변화 그리고 전지구적 전쟁과 관련하여 나는 우리가 라캉이 "실재계와의 만남"이라고 부른 것을 점점 더 겪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난 것은 다원주의, 즉 모든 것은 이야기나 서사일 뿐이라는 견해의 한계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은 어떤 시점에 선택해야 한다는 진실, 즉 어떤 문제에 있어서 그저 "견해"가 아닌 중요한 진리가 있으며, 이것은 세계에 대한 다른 설명들을 거부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라는 진실이다. 누군가가 신앙 요법을 열렬히 믿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아이들은 수막염으로 여전히 죽는다. [...] 세계상은 대단히 실제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배타적이고 억압적인가?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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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