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인터뷰-존재론적 아나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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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2.

 

레비 브라이언트와의 인터뷰

An Intervies with Levi Bryant

 

―― 크리스토스 스테르지우(Christos Stergiou)

 

CS: 당신의 존재론과 다른 객체지향 존재론들 사이의 차이점들을 서술해 주시겠습니까?

 

LB: 통상적으로 객체지향 존재론(OOO)은 마음에 독립적인 실체, 존재자 또는 객체의 현존을 단언하는 존재론적 입장이라면 무엇이든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의 존재론,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존재론, 제인 베넷의 존재론,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론 등과 같이 다양한 존재론들이 객체지향 존재론입니다. 물론 이런 존재론들 사이에는 차이점과 불일치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기회(실체를 가리키는 그의 술어)는  그것이 다른 현실적 기회 및 영원한 객체들과 맺는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는 현실적 기회는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OOP)은 객체는 자체의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으며 영속하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존재론에서는 실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합니다.

 

과거에 저는 제 존재론을 "온티콜로지"라고 불렀지만, 최근에는 기계지향 존재론(MOO)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모든 존재자 또는 실체는 하나의 기계라고 주장합니다. 기계는 자체의 작용이나 역능(능력)에 의해 규정됩니다. 이언 보고스트를 좇아서 저는 작용을 하나 이상의 입력물을 취하고 그것에 변환을 실행하여 출력물을 생산하는 활동으로 규정합니다. 예를 들면, 광합성 작용에서 나무는 햇빛, 물 그리고 이산화탄소를 취하여 이런 물질들을 조작한 다음에 세포, 에너지, 산소 등의 형태로 출력물을 생산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업은 물질의 흐름을 취하여 노동과 기호의 조작을 거친 다음에 출력물로서 상품을 생산합니다. 기계지향적 틀로 존재자에 접근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성질이나 특성이 아니라, 그것이 수행할 수 있는 작용, 즉 역능 또는 능력의 견지에서 존재자를 탐구합니다.

 

하만의 객체지향 철학과 함께 저는 기계는 자체의 관계들에 독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기계는 항상 다른 기계들에 의해 제공되는 자체의 입력물(관계)들로부터 단절될 수 있으며, 다른 입력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기계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산소의 입력으로부터 단절된 개구리의 경우에서처럼). 그런데, 화이트헤드와 함께 저는 모든 기계는 과정이라고 주장합니다. 기계는 입력물을 변형시켜 출력물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과정일 뿐 아니라, 시간에 따라 계속 존재하기 위해 영원히 조작에 관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기계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면, 제 육체는 계속 존재하기 위해 매 순간 죽는 구성 세포들을 보충하는 모든 종류의 대사 과정들에 관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가 가르쳤듯이, 자본주의는 과정으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마르크스가 보여주었듯이, 가치는 화폐와 상품의 특성이 아니라, 생산과 교환 작용의 결과입니다. 그런 작용 또는 과정이 멈추게 된다면, 가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9/11 이후에 부시 행정부는 모든 사람이 상품을 구매하도록 부추겼습니다. 테러 공격 후에 소비 또는 교환이 멈춘다면 자본주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점을 그들은 이해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산, 분배 그리고 소비의 이런 작용들에 관여하는 기계로서 존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기계가 과정인 한, 우리는 또한 그것을 사건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기계는 지속되거나 일정 시기 동안 존속하는 우연한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사건입니다. 카피바라의 육체는 오로지 자체의 작용을 지속할 수 있는 한에 있어서 존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봉건주의 기계는 오로지 자체의 작용을 지속하는 한에 있어서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기계의 존재는 루크레티우스의 원자처럼 고정된 실체, 불변의 물질이 아니라, 오히려 활동 또는 과정으로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 과정 또는 작용이 멈추게 되면, 기계도 멈추고 분해됩니다.

 

CS: 브뤼노 라투르는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변형만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에 대해 어떻게 논평하겠습니까?

 

LB: 라투르와 자기생산 체계 이론가들―특히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자기생산 체계 이론가―과 함께 저는 정보가 세계 "저쪽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논제를 거부합니다. 정보는 항상 기계 또는 체계(제 경우에 "기계", "체계", "객체", "실체" 그리고 "과정"은 모두 동의어입니다)를 위한 정보입니다. 예를 들면, 언어 메시지를 구성하는 음파는 그것 자체의 특성으로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음파는 실재적인 물질적 존재자입니다. 정보는 음파 속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증명은, 내가 바위에게 아무리 많은 말을 하더라도 바위는 여전히 내 언설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됩니다. 그것이 정보적 가치를 띠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음파 같은 교란이 특수한 기계와 상호작용을 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란(이 경우에는 음파)을 정보로 구성하는 것은 바로 기계이지, 교란 자체가 아닙니다.

 

입력물로서 기계를 거칠 때 교란은 그 교란을 조작하는 기계의 내부 구조에 의해 정해진 변형을 겪게 됩니다. 예컨대 보험회사와의 소통을 생각합시다. 미합중국에서 보험회사는 정부 서비스 기관이 아니라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입니다. 이것은 보건의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미합중국 시민이 의료 서비스를 요구하는 양식을 채울 때, 그의 발언을 고무하는 동기는 건강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보험-기계가 이 메시지를 수신할 때, 그것은 변형되어 매우 다른 정보적 가치를 띠게 되는데, 그것은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에 관한 쟁점들과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 양식은 보험-기계에 의해 사업 문제 또는 투자로 평가됩니다. 보험-기계는 이 경우에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수익을 창출할 것인지 아니면 손해를 초래할 것인지, 좋은 투자거리인지, 주식 가치를 향상시킬 것인지 등의 문제를 자문합니다. 그 결과, 보험-기계는 요구서를 제시하는 사람의 건강이나 질병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수익의 견지에서 자체 결정을 내립니다. 여기서 메시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 됩니다.

 

정보는 항상 입력물들의 변형입니다. 꽃은 햇빛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꿉니다. 결정은 광물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변형합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발언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기계는 입력물에 선택적으로 열려 있을 뿐입니다. 기계는 세계 속 모든 입력물을 입수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벌은 자외선 전자기파 또는 빛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벌은 꽃 속의 패턴을 보고서 그것에 정보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을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튼 기술의 도움이 없다면 할 수 없습니다. 보험-기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험-기계는 보험 양식에 나타날 수 있는 일단의 범주에 의거하여 주변 세계를 구성합니다. 당신이 미지의 질병을 앓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실제로 당신은 아픕니다. 그런데 이 질병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양식들에 나타나는 범주가 아니기 때문에, 꽃의 자외선 패턴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당신은 보험-기계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정보의 이런 특징들은 정치적 참여에 대한 중요한 함의를 품고 있습니다. 정치적 층위에서 어떤 기계에 효과적으로 관여하기 위해서는 그 기계가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언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기계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기계에 실제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려면, 기계가 개방적인 그런 종류의 입력물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를 들면, 기업 기계와 투쟁하는 데 파업이 역사적으로 성공적이었던 반면에, 정의와 권리의 언어를 외치는 시위는 기업 기계에 거의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파업은 기업 기계가 수익과 손실을 둘러싸고 조직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합니다. 예컨대, 공장의 생산 작용을 중단할 때 그것은 기업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중단시키고, 그래서 공장이 양보할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정의와 권리에 대한 담론은 공장이 들을 수도 없고, 그래서 그저 소음으로 여기는 언어입니다.

 

CS: 객체의 잠재적 가능태는 자체의 국소적 표현을 넘어섭니다. 그러므로 객체는 자체가 표현하는 것 이상을 행할 수 있습니다. 객체의 역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합니까? 이것은 그것의 표현에 영향을 미칩니까?

 

LB: 기계의 잠재적 고유 존재는 그것의 역능 또는 그것이 행할 수 있는 것, 즉 그것의 잠재태를 가리킵니다. 이 역능은 두 가지 이유에서 "잠재적"입니다. 첫째, 역능이 잠재적인 까닭은 그것이 행사되지 않은 채 기계 속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성냥은 켜지지 않은 채로 있을 때에도 연소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둘째, 역능이 잠재적인 까닭은 그것이 어떤 특수한 환경에서 우연히 행사되는 방식보다 항상 더 많은 방식으로 행사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입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방이 춥기 때문에 지금 당장 제 팔의 피부는 소름이 돋아 있습니다. 매우 더운 날씨의 경우처럼 다른 환경에서는 피부가 팽창할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소적 표현은 특수한 환경에서 이루어진 작용의 출력물을 가리킵니다. 내 피부의 소름돋음은 국소적 표현입니다. 가을에 나무의 단풍잎은 국소적 표현입니다.

 

존재자의 역능 또는 잠재적 고유 존재는 사실상 다른 존재자들과의 만남뿐 아니라 그 존재자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결과로서 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식습관의 변화를 생각합시다. 식습관의 변화는, 우리 피부 세포와 털 세포가 만들어지는 방식에서 우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음식을 대사하는지와 우리의 기분과 인지의 본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무가 질병에 걸리면, 잎과 껍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변할 것입니다. 학습은 역능의 변화에 대한 다른 일례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정신분석 훈련을 받으면, 그는 다르게 듣고 다르게 목격합니다. 어떤 행위가 더 이상 단순히 불행한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된 욕망의 표현과 충족으로 기입됩니다. 마찬가지로, 고무줄이 반복적으로 늘어나면 그것은 점차 탄성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존재자의 역능 또는 잠재적 고유 존재는 그 존재자의 삶 또는 현존에 걸쳐 가변적입니다. 존재자는 역능을 획득할 수 있고 상실할 수 있으며, 역능을 행사하는 능력도 강해질 수 있고 약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피로하거나 피곤하면 인지에 관여하는 우리 능력은 약합니다. 역능을 획득하거나 상실할 때마다, 능력이 강해지거나 약해질 때마다, 존재자가 나타낼 수 있는 국소적 표현에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된다면, 저는 제가 연주할 수 있는 곡들의 형태로 국소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역능을  획득한 셈입니다. 제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워서 떨고 있다면,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는 이 역능은 약해지고, 그래서 저는 최적의 조건에서 연주할 때처럼 효과적으로 곡들을 국소적으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CS: 객체는 무한한 표현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모든 표현은 독특합니까?

 

LB: 저는 모든 객체가 무한히 다양한 국소적 표현을 나타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미해결 상태로 남겨 두겠지만, 그럼에도 모든 기계는 대단히 다양한 국소적 표현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중요한 점은, 기계는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자체의 국소적 표현을 나타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돌은 숲이 행하는 방식으로 국소적 표현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물은 수소가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국소적 표현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무, 물 그리고 수소는 다양한 방식으로 자체의 국소적 표현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어, 에메랄드를 생각합시다. 에메랄드는 그것이 만나게 되는 조명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색깔을 국소적으로 표현할 것입니다. 때로는 밝은 녹색일 것이고, 때로는 어두운 이끼색일 것이고, 때로는 검정색일 것이고, 때로는 다양한 상이한 색조의 녹색으로 반짝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에메랄드가 국소적 표현 형태로 출력물을 생산하는 작용을 위한 입력물로서 작동하는 다른 기계들―이 경우에는 빛 또는 전자기파의 광자들―과 결합하거나 관계를 맺게 되는 방식의 함수입니다.

 

저는, 어떤 국소적 표현들은 "일반적인" 반면에 다른 것들은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용이 다른 시점에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방식으로 반복될 수 있을 때 그 작용은 일반적입니다. 같은 파장의 빛에 노출되는 한, 에메랄드는 다양한 시점에 특수한 색조의 녹색을 나타낼 것입니다. 여기서 국소적 표현은 반복 가능하며 입력물들은 에메랄드의 역능을 변화시키지 않은 듯 보입니다. 어떤 국소적 표현이 특이한 일단의 환경에서만 발생하고, 비가역적이며, 반복될 수 없을 때 그것은 독특합니다. 나무가 성장하는 방식은 독특함의 층위에 속합니다. 나무가 만나게 되는 자양분과 빛, 그 지역에서 성장하고 있는 다른 식물들 그리고 그것이 처해 있는 날씨 환경이 그것의 모양, 껍질의 배치, 잎과 열매의 강인함 등의 층위에서 반복 불가능한 절대적으로 독특한 일단의 국소적 표현을 나타내게 합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유전체를 지닌 나무가 성장하더라도, 발달 환경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그 나무는 상이한 특징 또는 국소적 표현들을 나타낼 것입니다.

 

CS: 국소적 표현들이 동일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공통 특성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LB: 기계의 역능은 대체로 동일할 수 있는 반면에 국소적 표현들은 상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두 개의 에메랄드는 동일한 역능 또는 잠재적 고유 존재를 지닐 수 있는 반면에, 그것들은 처해 있는 상이한 조명 환경의 결과로서 상이한 방식으로 국소적 표현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기계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피타고라스 정리 같은 무형적 기계는 항상 동일할 것이고, 동일한 입력물이 주어지면 동일한 국소적 표현을 산출할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자들은 동일성이 아니라 유사성만 지닐 것인데, 그것은 그들의 유전체가 동일한 경우에도 환경이 이 기계들이 발달하거나 전개되는 방식을 수정하기 때문입니다.

 

CS: 다음과 같은 진술에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행하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되는 사회를 위해 싸울 것이다.

 

LB: 이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어떤 사회적 기계도 기계를 구성하는 동일자입니다. 예를 들면, 문화는 믿음, 활동 유형, 신념 등의 형태로 공통의 특징을 지닌 인간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기 위해 작동하는 기계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육적 기계의 목적은 공통의 에피스테메의 노선을 따라 인간의 사유 성향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저는 유사성의 절대적 부재는 꽤 견딜 수 없는 삶을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공통의 움직임 성향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회전 신호가 누군가가 회전할지 또는 회전하지 않을지를 똑같이 의미하고 사람들이 어디든 원하는 차선으로 운전할 수 있는 붐비는 고속도로에서 차를 모는 것이 어떠할지 상상합시다. 우리는 집단적 습관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태에서 어떤 규칙성들을 예상할 수 있는 능력 덕분에 우리는 항상 주변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으며 우리의 인지 능력을 다른 일들에 자유롭게 쓸 수도 있습니다. 습관은 구속적인 것만큼이나 해방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기계도 다른 기계를 결코 완전히 통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회적 기계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려고 노력할 때, 그럼에도 통합을 벗어나는 몸과 마음의 여분이 항상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 몸과 기표 사이의 관계에 대해 라캉이 말했던 오브제 아(objet a)라는 여분입니다. 무언가가 항상 빠져 나갑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체주의와 당 정치는 항상 매우 슬픈 열정을 생성합니다. 이런 체계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당 또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완전한 복속을 꿈꿉니다. 그런데 여분은 항상 지속하고 재현합니다. 완전한 통제의 꿈은 항상 실패합니다. 그 결과, 이런 기계들은 편집증에 걸립니다. 완전한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대신에 자신들이 내부와 외부의 적들로 포위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 다음에 그것들은 순결 맹세를 요구하고, 숙청에 착수하고, 이중 간첩으로 인식하는 자들을 박해하며, 자체의 기계에 위협으로 간주하는 외부의 적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필요한 것은 이런 종류의 편집증과 이어지는 박해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가소성이 충분한 정치적 기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