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존재의 차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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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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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어떤 가능한 의미, 목적 또는 가치가 있을 수 있는지 묻는다. 그것은 니체적 문제일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역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가치, 목적 그리고 의미는 애초에 결코 신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가치, 목적 그리고 의미가 신 없이 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인간에게는 항상 그것들이 있었다―오히려 일단 우리가 이 점을 의식하게 될 때에도 어떻게 여전히 그것들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 의미와 목적을 둘러싼 문제들의 견지에서 바라보면 유물론과 자연주의는 힘든 신조들이다. 확실히 이런 이유 때문에,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런 입장들이 참이라고 알고 있을지라도[...], 그것들에 대해 매우 과민한 반응을 나타낸다.

 

[...] 텔레비전 쇼에서 [...] 한 이론은, 그들이 우주의 끝에 이르러 미쳐버린 까닭은 그들이 본 전부는 텅빈 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물론과 자연주의와 관련된 상황이다. 그 상황은 전적인 무의미함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되는 광기를 초래한다. 우리의 저주는, 우리는 이것을 넘어서는 것,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악취, 쇠퇴, 갈망하는 육체에 갇혀 있고, 지리, 욕구, 열망, 피로에 붙잡혀 있지만, 이 조건을 넘어서 엿볼 수 있다.

 

그런데 물질과 자연의 이런 공포를 낳는 것은 악취를 풍기고, 갈망하고, 쇠퇴하며, 피로에 찌든 자신의 육체만이 아니다. 타자들의 육체도 그렇다. 우리는 소중한 이들의 죽음, 그들이 죽을 때 고통을 겪는 것을 지켜보는 것, 그들을 결코 되살릴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며 우리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과 겪는 공간 상의 거리에 미쳐버린다. 사랑이 그런 고뇌를 초래하고 우리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지라도, 사랑은 우리가 타자들과 맺는 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인간 관계들의 어두운 측면은, 집단적으로 지배권을 움켜지고 어리석고 잔인한 방식으로 행동하며, 우리로 하여금 거의 속수무책으로 그런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견디도록 강요하는 타자들이 거주하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인류의 공포와 잔인함에 미쳐버리고, 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는 채로 상황이 더 낫고, 더 친절하고, 더 공감적이고, 덜 어리석을 수 있는 세상을 엿봄으로써 미쳐버린다. 어리석음과 허위로 인해 인구 전체에 걸쳐 완전히 옮겨지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에 가장 고귀한 목적에 기반을 둔 우리의 유토피아적 갈망이 매후 흔히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잔인함을 초래하는 방식에 우리는 미쳐버린다.

 

[...] 철학 전체에 걸쳐 우리는 도처에서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관념, 이상적인 것, 예지적인 것, 의의, 의미, 물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의 특권화를 만난다. 또는 이 세계는 정말 환영, 외양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듣는다. 육체의 공포, 물리적인 것의 공포. 우리는 육체와 그것의 유한성에 미쳐버린다. 물질적인 것에 미쳐버린다. 그것의 무의미함에 미쳐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는 어떤 형식의 초월성이 있기 때문에 미쳐버린다. 그리고 세계―즉, 물질과 일원론의 진리―에 대한 지식이 점점 늘어나는 결과로서 이런 이원론을 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약화됨에 따라 우리에게는 거의 절망밖에 남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육체에 불과한 상황에서 어떤 의미, 희망 그리고 목적을 지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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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