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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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변칙 코뮨주의/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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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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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신학(Atheology)에 관한 [...] 강좌를 준비하면서 나는 슈미트(Schmitt)의 <<정치신학>>을 읽게 되었다. 내가 이 강좌와 관련하여 하고 싶은 것들 가운데 하나는 유신론이 어떻게 통속적 신무신론자들의 저작 같은 표상들이 곧잘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유에 스며들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 핵심은, 유신론이 그저 신성한 초자연적 존재자가 존재한다는 논제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적 변양태와 세속적 변양태 둘 다에 진입할 수 있는 사유의 구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라플라스의 열렬한 무신론에도 불구하고, 결정론을 옹호하기 위해 고안된 가상적 사고 실험에서 그가 관찰자에 부여하는 입장 때문에 라플라스의 사유가 유신론적 구조의 한 변양태라고 간주한다. 완전히 결정론적인 우주를 상상하면서 라플라스는, 모든 존재자들을 초월하여 외부에 존재하며, 그리고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입자의 궤적, 속도 그리고 위치를 알고 있는 이상적인 관찰자를 가정하도록 요청한다.

 

구조적으로 이것은 전통적 유신론들에서 나타나는 유일신의 입장과 동일하고, 그래서 라플라스의 사유와 이런 유신론들 사이의 동형성을 단언할 수 있다. 요약하면, 라플라스는 세속적 신학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당연히 철저한 무신론―그리고 나는 도킨스, 데닛, 히친스 그리고 해리스의 저작은 모두 세속적 신학이라는 점을 주장할 것이다―은 신성한 초자연적 존재자의 비존재를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철저한 비신학은 종교적 및 세속적인 존재론적 사유, 인식론적 사유, 정치 사상 그리고 윤리 사상 모두에 스며들어 있는 특수한 유신론적인 프랙탈[자기유사성] 패턴[...]을 진단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권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둘러싸고 있는 개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들이 사실상 세속화된 신학적 개념들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시도했던 슈미트의 적실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신학이라는 기획의 일부는 주권에 대한 어떤 틀을 극복함으로써 아나키즘적이고 코뮨주의적인 사회적 틀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여기서 구조적 동형 관계는 주권자와 유일신 사이에 존재하는데, 유일신과 마찬가지로 주권자는 "예외상태를 결정한다". 주권자의 결정[...]이 아무 근거도 없거나 그 어떤 궁극적인 정당화도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세속화된 기적이라는 형식을 갖는다.

 

여기서 비신학자가 취할 수 있는 움직임은 많이 존재하고, 나는 어느 것이 가야할 길인지 결코 확신하지 못한다. 한 전략은 주권의 자리 또는 위치[...]를 전적으로 폐기하는 것일 것이다. [...] 다른 한 선택지는, 주권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한 군주 또는 독재자―예외상태를 결정하는 한 개인 또는 표상―의 손에 한정될 때에만 유신론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일 것이다. 주권이라는 개념의 탈신학화는 주권을 한 군주 또는 독재자의 손이 아니라 다중의 손에 맡기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이 코뮨주의와 아니키즘 둘 다의 기본 관념이다. 주권을 소유하고 행사하는 것은 공통체 또는 공동체이다. 이런 점에서, "무-지배(an-archy)"는 "무법 상태"가 아니라 "법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또는 초월적인 권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규범―항상 잠정적이며 폐기되고 수정되는―은 한 군주의 변덕이 아니라 공통체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주권이라는 개념을 유지하는가? 슈미트의 주권 개념의 특징들에서 매력적인 것이 존재한다면, 나는 그것이 예외상태와 결정이라는 개념들의 방향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그리고 이와 같은 것에 관해 많은 사람들(랑시에르, 바디우, 라클라우 그리고 무페)이 이미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은 "변칙 코뮨주의 또는 아나키즘" 같은 것이다. 물질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모든 존재자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는 변칙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변칙 코뮨주의는 정치적 주체의 자리는 반드시 열려 있고, 동일성이 없고, 텅 비어 있고, 유동적이며, 그리고 그것은 항상 그러하다는 전제로 시작할 것이다. 이런 변칙 아나키즘에서는 사실상 집단적인 정치적 주체의 자리는 존재할 것이지만, 세계의 구조 또는 상황에 따라 상이한 다양한 내용들이 이 자리를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첫 번째 요점은, 정치의 자리 또는 현장은 [...] 규범 또는 지배의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대한 아무 규범도 존재하지 않는 [...] 예외상태일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

 

[...] 이런 진정한 예외상태의 현장은 결국 순수한 결단―탁월한 정치 행위―과 연관될 것인데, 거기서 사유와 실천의 작업이 출현하여 그 예외상태를 인정하고 그 예외상태에 근거하여 세계 전제를 재배치하기로 결정한다. 예를 들면, 성전환자라는 예외상태를 성별 존재자들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정할 때, 그것은 그저 배제된 채로 존재했던 새로운 한 존재자가 성별의 세계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별 자체도 [...] 이전과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성애 자체가 [...] 퀴어적인 것이 된다. [...] 그런데 근저에 놓여 있는 전제는, 우리는 정치의 주체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결코 모른다는 점이다. 또는 오히려 그 주체는 항구적으로 열려 있으며, 상이한 세계 또는 정치적 배치들에서 다양한 상이한 행위자들에 의해 채워진다는 점이다. [...] 심지어 우리는 정치의 주체가 항상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데, 때때로 동물, 광물 그리고 기체도 정치의 주체라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되기 때문이다... [...] 이런 정치적 주체들은 결국 "남성" 또는 "인간"의 바로 그 의미를 변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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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