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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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푹스: 오늘의 인용-양자역학에 대한 나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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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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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말할(힐베르트 공간 등을 할당함으로써) 물리적 계를 상정할 때, 나는 거의 소박한 실재론적 방식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다. 즉, 내가 작성하는 해밀토니안 H는 나와 독립적으로 저쪽에 존재하는 세계의 한 조각을 나타낸다.

 

2. 힐베르트 공간에 차원 d를 할당할 때, 나는 그 계의 내재적 특성을 가정하고 있다. 내가 옳을지도 모르거나, 아니면 틀릴지도 모르지만, d는 단지 잠정적일지라도 내가 그것에 관해 가정하는 것이다. 또 다시 실재론.

 

3. 그렇지만 내가 H에 의해 규정되는 연산자들의 공간에서 양자상태를 도출할 때, 나는 내 예상들의 다발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들은 그 계에 내재하는 특성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묘사에 도입하는(추정컨대, 그것들이 과거에 내게 도움이 되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아무 해도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주관적 예상들이다. 그 묘사에서 나 자신을 개념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면, 이 예상들은 나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런 취지에서, 이 견해는 약간 관념론처럼 들릴 것이다―또는 최소한 관념론과 혼동될 것이다(그런데 그것은 위의 요소 1과 2 그리고 아래에 계속 제시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망각할 때에만 그렇다).

 

4. 이런 예상들의 주제, 즉 그것들의 대상은 나와 내가 상정하는 계 둘 다를 가리킨다. 그것들은 그 계와 관련된 나의 상호작용의 (에 대한) 결과들에 대한 나의 예상들이다. 그것은 일종의 조작주의(operationalism)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그 묘사에서 나 자신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런 상호작용들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5.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양자역학의 형식적 구조를 사용하여 우리 예상들을 채비하고, 그것들을 조작하고 갱신하며, 그것들과 관련된 모든 것을 행하는 이유는 세계를 더 잘 헤쳐나가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 종이 생존하고 확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이다. 그것은 일종의 도구주의이다. 양자역학의 그런 부분은 망치 같은 도구인데, 그것은 많은 것들을 고치는 데 사용될 수 있거나, 아니면 그저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보조물일 수 있다.

 

6. 그런데 각각의 양자 측정 결과의 궁극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본성―그리고, 최소한 내 관점에 따르면, 코헨-스페커(Cohen-Specker)를 통한 그런 "결과들"의 비선재성(非先在性)―을 결코 망각할 수는 없다. 그것은 가장 오래된, 가장 유서 깊은 방식으로 실재론적인 경향이 있다. 실재론으로의 복귀 ... 그러나 반전은, 각각의 개별 사용자에 의해 사용될 때, 양자역학은 그가 생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결과물들을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연금술적인 경향이 있다 ... 그렇게 말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나는 그것을 그렇게 부른다.)

 

7.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로부터 약간 배웠듯이, 우리는 궁극적으로 세계와의 이런 개인적 만남들을 (그것들에 대한 도박과 관련된 형식적 표현으로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낸 다음에)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매우 작은 계와 내가 서로 접속할 때 세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면, 즉 새로운 생성물 또는 새로운 사실을 초래한다면, 내게는 그 어떤 두 사물도 서로 접속할 때 생성물을 초래할 가능성이 틀림없이 높은 듯 보인다. 그것은 "F-이론" 또는 "양자역학에 대한 성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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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푹스(Christopher Fuchs), <<블록 우주와의 고투(My Struggles with the Block Universe)>>, pp. 118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