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범심론과 제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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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16.

 

범심론과 소거주의

Panpsychism and/or Eliminativism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오늘 나는,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적 틀에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으로 알려진 최근의 철학적 운동에 관해 생각하고 싶다. 사실상, 복수으로, 사변적 실재론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인데, 2007년에 런던의 골드스미스(Goldsmiths) 대학에서 개최된 최초의 사변적 실재론 학술회의에서 강연했던 네 명의 사상가들은 사실상 대단히 다른 입장과 프로그램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훨씬 더 다양한 사변적 실재론이 발표되었다. 이런 다양한 새로운 사유 양태들의 통일을 정당화하는 것은 그것들이 공통의 출발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네 명의 원래 사변적 실재론자들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그리고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은 모두 메이야수가 상관주의(correlationism)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하만이 "객체를 그것에 대한 우리 인간의 접근으로 환원시키는 지루한 기본적 형이상학"으로 특징짓는 것을 거부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이런 애초의 거부가 어떤 긍정적 입장들로 이어지는지 고찰할 것이다.

 

메이야수에 의하면 상관주의는 "우리는 주체에 대한 객체의 관계와는 별개로 객체 '자체'를 결코 파악하지 못한다"는 신조로 정의된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상관주의적이고, 후설의 노에시스(noesis)-노에마(noema) 구조도 그렇다. 상관주의의 경우에, 마음에 독립적인 실재는 현존할 수 없는데, 우리가 그런 실재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결국 실재는 마음에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메이야수는 이렇게 말한다. 상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를 '우리에 대해'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와 비교하기 위해 사유는 자체를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세계에 대한 우리 관계의 함수로서 주어지는 것과 세계에만 속하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브래시어가 서술하듯이, 상관주의에서는 "주체를 객체로부터 분리하는 것, 또는 인간을 비인간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과 관계를 맺는 것과 무관하게 무언가가 자체적으로 무엇인지 묻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또는 하만의 말대로, 상관주의에 따르면 "모든 것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접근 문제로 환원되고, 그래서 비인간 관계들은 자연과학에게 내맡긴다." 다시 말해서, "상관주의자는 우리는 세계 없는 인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고, 인간 없는 세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둘 사이의 근원적 관계 또는 상관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관주의자의 경우에는 인간에 선재하는 세계 자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에 선재하는 세계가 인간에 대해서 어떠한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만이 그런 입장을 빈정대며 요약하듯이, 상관주의는 "사유되는 것은 그럼으로써 전적으로 사유로 변환되고, 그래서 사유의 외부에 놓여 있는 것은 항상 사유할 수 없는 것으로 틀림없이 남게 된다"고 가정한다.

 

상관주의는 화이트헤드(Whitehead)가 비난한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와 같은 것이 아닌데, 상관관계에 대한 비판과 이분화에 대한 비판은 상이한 필요와 관심에서 초래된다. 그럼에도, 그 둘은 무관하지 않다. 우리 체험을 다시 결합시키기 위해 상관주의적 구조에 대한 필요성을 도대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체험이 둘로 분리되어 있을 때이다. 데카르트에서 로크 등을 거쳐 흄에 이르기까지 근대 서양 사상은 세계를 일차적 성질과 이차적 성질, 또는 한편으로는 객관적으로 연장된 객체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주관적인 "정신적 부가물들"로 분할했다. 이것은 흄의 회의주의의 위기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칸트는 "저쪽"에 존재하는 미지의 실재들은 우리 마음에 의해 부가된 조건에 부합되게 조직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소한다. 그때 이래로 우리는 세계를 상관주의적 렌즈를 통해서 보게 되었다.

 

상관주의는 일상적 상식과 어긋나는 듯 보일지도 모른다. 대부분들의 사람들은 질문을 받으면 망설이지 않고 우리 외부의 사물들은 실재적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바위를 발로 차고, 그래서 버컬리를 논박했다고 주장했던 존슨 박사를 기억하자. 그럼에도,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구성하고 처리하는 방식들에 필연적으로 신세를 지고 있다는 관념은 사실상 칸트 이래로 이 세기 동안 항상 서양의 "기본 형이상학"이었다. 상관주의적 합의를 거부하는 것은 "소박한 실재론'으로 비난받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상 사변적 실재론의 그 어떤 판본도 우리가 아무튼 우리와 별개로 그저 "저쪽"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해 아무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소박한" 테제를 실제로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또한 나는 무언가를 "소박한" 것으로 특징지움으로써 비난하는 논증이라면 무엇이든 의심해야 한다는 하만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런 비난과 관련하여 음흉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소박한 실재론"의 비판가들은 그 대신에 더 견고하거나 복잡한 종류의 실재론을 채택하도록 촉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실재론은 불가피하게 소박하다는 은밀한 수사적 암시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비판적 술책은 사실상 자체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사유의 유아론적 수위성을 강화하기 위해 작동한다. 그것은 메이야수가 "그것의 존재가 사유되는지 여부와는 무관한 거대한 야외, 영원한 것 자체"라고 부르는 것을 향한 그 어떤 운동도 거부하고 부정하는 방식이다.

 

어쨌든, 기본적인 사변적 실재론 테제는 우리가 사물 자체에 직접 접근할 수 있다는 "소박한" 주장의 정반대이다. 오히려 요점은 세계 자체―우리와 별개로 실존하는 대로의 세계―는 그 어떤 식으로도 그것에 대한 우리의 접근 문제에 의해 구속되거나 속박될 수 없다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우리 자신이 미리 부과한 개념들의 견지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세계 속 사물들의 기묘함, 즉 우리들에 의해 "상정되"지 않은 채,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거나 "현시되"지 않은 채 그것들이 실존하는 방식들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런 습관을 버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스스로 제작한 것들도 나름의 기묘하고 독립적인 실존을 갖추고 있다. 철학이 놀라움에서 시작한다면―그리고 화이드헤드가 역설하는 대로 또한 놀라움으로 끝이 난다면―철학의 목표는 인지적 규범, 또는 오성의 개념들을 도출하고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실재가 이런 규범을 어떻게 벗어나고 뒤집는지 더 완전하게 깨닫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참된 실재론이라면 무엇이든 사변적―이십 세기 대부분 동안 "사변"은 평판이 나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이어야 한다. 실재계를 대면할 때 우리는 추측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칸트가 우리가 할 수 없으며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로 그것을 행할 수 밖에 없다. 칸트에게는 실례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유 바깥을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개념들 바깥에 놓인 그것들의 실존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유진 대커(Eugene Thacker)의 술어로, (주관적인) 우리에-대한-세계(world-for-us)와는 다른 (객관적인) 세계-자체(world-in-itself)를 고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또한 우리는 대커가 우리-없는-세계(world-without-us)―우리 자신의 고려에서 빠져 있고 우리가 다룰 수 없는 한에 있어서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을 적극적으로 탐구해야 한다. 우리는 내성을 통해서 우리에-대한-세계에 대해 알게 되고,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세계-자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변의 역설적 운동을 통해서만 우리-없는-세계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변적 실재론은, 그것이 "소박한" 또는 무반성적 사유에서 떨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칸트 이후의 "비판적" 사유에서도 떨여져 있다. 사변적 실재론은 대륙 반실재론이라는 "기본 형이상학"뿐 아니라, (그리고 아마도 더 중요하게도) 존 코그번(John Cogburn)이 "신칸트주의적 '잔여의 실재론'이라고 부르는 것, 즉 실재계는 표명되지 않고 표명할 수 없는 어떤 덩어리라는 견해"를 거부한다. 예를 들면, 슬라보예 지젝은 인간의 주체성이 세계의 얼개 속에 독특한 균열을 새긴다고 제안한다. 이런 지속하는 인간 예외주의의 견지에서 실재계는 부정적으로만 고려될 수 있다. 그것은 원초적 분리의 외상적 잔여일 따름이다. 실재계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분리에서 남겨지는 것이다. 이런 실재계는 우리의 상징적 표현들 모두에 저항하기 때문에 결코 특징지워질 수 없다고 지젝은 말한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지젝의 경우에도, 표명과 결정은 인간 접근의 측면에서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결국 칸트는 비인간적 실재계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물자체가 정말로 실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지 그는 물자체와 관련하여 우리는 긍정적인 것을 전혀 알 수 없거나, 또는 그것에 대해 유의미한 것을 전혀 말할 수 없다고 역설했을 뿐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표현으로 재서술할 것이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상관주의적 순환을 서술했을 뿐인데, 그렇지만 핵심은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다. 메이야수가 서술하듯이, 사변적 실재론의 목표는 그 순환을 깨는 것이고, 그래서 또 다시 "거대한 야외, 비판 이전의 사상가들의 절대적 외부"에 이르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같은 초기 근대 철학자들은 오늘날에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자유, 대담함 그리고 용기를 과시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변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은 어느 종류의 비판 이전의 또는 칸트 이전의 형이상학적 "독단주의"로도 되돌아가지 않은 채―메이야수가 우리는 되돌아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듯이―이런 "비판 이전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이다. 메이야수는 묻는다. 우리는 어떻게 "지난 이 세기 동안 근대 철학이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우리 자신을 벗어나는 것, 물자체를 파악하는 것, 우리가 존재하든 하지 않든 간에 존재하는 것을 아는 것―을 달성할 수 있는가"?

 

칸트의 비가지성 주장, 또는 현대 철학의 실망스러운 "잔여의 실재론"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부정적인(반상관주의적) 테제와 함께 어떤 종류의 긍정적인 사변적 테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변적 실재론의 모든 변양태는 긍정적인 존재론적 테제와 긍정적인 인식론적 테제 둘 다를 주장해야 한다. 존재론적 테제는, 실재계는 우리가 없어도 그리고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화와는 별개로 실존할 뿐 아니라, 그것은 사실상 어떤 방식으로, 우리로부터의 아무 도움도 없이 자체적으로 조직되거나 표명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테제는, 우리가 이 조직화된 우리-없는-세계를 우리 자신의 개념적 도식들로 다시 환원시키지 않은 채 가리키고 그것에 관해 말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사변적 실재론을 서로 구별짓는 것은 그것들이 모두 상관주의적 순환을 벗어나는 상이한 방식들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 모든 접근방식들이 정말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모두 상관주의의 바로 그 출발점―칸트의 이른바 철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돌아가서 칸트의 원래 술어들을 상이하게 재분배한다. 이런 술어들의 재분배가 갱신된 사변을 위한 여지를 개방한다.

 

메이야수 자신은 그런 전략을 좇는다. 그는 사유와 세계의 칸트적 상관관계가 필연적이라기보다 자체적으로 우연적(또는 '사실적')이라는 점을 입증함으로써 내부에서 상관주의를 붕괴시킨다.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들에서 칸트가 어떤 근본적인 형이상적 명제들은 결정 불가능하다고 예증하는 반면에, 메이야수는 이런 결정 불가능성을 더 근본적인 우연성―자체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 판명되는―에 귀속시킨다. 칸트는 특수한 한정된 경험적 환경에서 작동하는 그런 종류의 논리는 전체로서 간주되는 세계에 적용하게 되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메이야수가 "우리 우주에 내재하는 객체들"에 적용될 때 유효한 확률론적 추론이 우주 자체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할 때 그는 거의 동일한 논증 노선을 좇는다. 물론 차이점은, 어떤 종류의 전체화도 선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메이야수는 칸토르의 초한수 이론(칸트는 알지 못한)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의 논증의 이런 급진화는 새로운 종류의 절대적 지식, 그것에 대한 칸트의 비난에서 자유로운 것에 이르는 길을 개방한다.

 

마찬가지로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도 칸트의 결단의 순간으로 돌아가는데, 그가 칸트에 대한 셸링의 비판을 재구성하고 활성화시킬 때 그것을 다르게 정향한다. 칸트의 선험적 논증은 선험적 필연성의 원리라기보다 생성과 생산의 원리가 된다. 그 결과, 사유는 외양의 본성을 상정하거나 제정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오히려 사유는 그것에 선행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체적으로 생성되고, 그래서 그것은 영원히 파악될 수 없다. "선행은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은 "필연적 진리"라고 그랜트는 말한다. 메이야수의 선조성과 얼마간 비슷하게도, 그랜트의 선행은 어떤 종류의 상관관계에서도 반복될 수 없다. 그럼에도, 무한히 생산적인 대자연의 "무사유"가 순전한 부정성(헤겔과 지젝의 경우에는 여전히 그렇듯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역능 또는 힘들의 적극적인 구성이다.

 

한편, 하만은 내가 (바타이유에 관한 데리다를 모방하여) "유보 없는 칸트주의"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의 간극을 모든 존재자들의 체험들에 확대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특별하게 인간들(또는 합리적 존재자들 일반)에 특권을 부여할 수 없는데, 모든 객체는 다른 모든 객체들을 오직 현상적으로, "감각적 객체"로서 만날 뿐이고,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대로, 본체적으로, "실재적 객체"로서 그런 존재자들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객체도 무엇이든 다른 객체를 결코 전적으로 (파악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사실상 객체는 자체조차도 정말로 "알" 수 없다. 그런데 하만은, 우리는 객체들을 암시할 수 있고 암시한다―사실상 우리는 이것을 거의 항상 행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객체들을 은유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가리킴으로써 언급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객체들을 실제로 알지 못하는(그리고 알 수 없는) 경우에도 객체들에 의해 심미적으로 감동받을 수 있다. 사실상 그런 "대리적" 정동이 존재자들 사이의 중요한 접촉 양태이다. (그것은 대충 화이트헤드가 "개념적 파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한다). 이런 식으로, 화이트헤드의 경우처럼 하만의 경우에도, "미학(감각학)이 제일 철학이 된다.

 

현상계와 본체계 사이의 칸트적 구별짓기에 대한 브래시어의 물리주의적 수정은 하만의 심미주의적 수정과 대조될 수 있다. "개념과 객체 사이의 개념 외의 차이점에 대한 선험적 전제"를 주장함으로써 브래시어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선험적 실재론"으로 변환시킨다. 말하자면, 실재계 자체는 비개념적이며, 그리고 실재계와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들 사이의 차이는 자체적으로 개념화될 수 없다. 우리의 개념은 그것이 가리키고, 그래서 헛되이 제한하려고 하는 객체에 항상 부적합하다. 물리과학은 개념과 지시 사이의 이런 간극을 탐구하는 한 방식―그것이 그 거리를 결코 연결할 수 없을지라도―이다. 실재계에 자체의 범주들을 부과하는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객체의 실재가 자체 개념의 의미를 결정하며, 그리고 그 실재와 그것이 측정되도록 개념적으로 제한되는 방식 사이의 간극을 허용한다"고 브래시어는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객관성에 대한 칸트 자신의 옹호는 칸트 자신이 제공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견고하게 실재론적인 형식으로 변형된다. 물리과학은 사유와 세계 사이의 상관관계의 필연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관관계의 불가피한 실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칸트와 지젝의 경우에 그런 것처럼, 비개념적 잔여는 더 이상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실험이 그것으로 하여금 말할 수 있게 한다(말하도록 강요한다).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은 스스로 흔히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을 매우 상이한 방식들로 서술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이 모든 사변적 실재론 기획들의 칸트주의적 배경을 역설했다. 내가 이렇게 한 까닭은, 철학에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아니면 오히려, 메이야수가 주장하듯이, 칸트의 "프톨레마이오스적 반혁명"―자체가 그것 자체의 비판적 자기성찰성에 근거를 두고 상관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기묘한지 잠깐 생각하기 위해 멈추어야 한다. 칸트에 따르면, 사유는 세계를 향해 손을 뻗음으로써 세계와의 합치성을 발견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유가 갑자기 세계와 상관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사유가 자체를 성찰하는 바로 그때, 즉 사유가 자체의 역능과 한계점들에 대한 비판에 관여하는 바로 그때이다. 사유가 그것의 외부에 놓여 있고,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와 일치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한 채 자체에 집중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변적 실재론이 무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유와 세계의 기묘한 매듭―내부로 정향된 자기반성과 외부로 정향된 지향성 사이에 미리 확립된 조화에 의해 사유 자체에 반영되어 있는―이다.

 

사유와 세계 사이의 이런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이런 저런 방식으로 사유의 자기성찰성을 몰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자체 정화적인 자기비판으로 자체에 근거를 제공하고 자체를 확증하는 대신에, 사유는 외부로부터 본원적으로 문제화될 필요가 있다. 올바르게도 하만이 반대할 수 있는 것으로 알아채는 우리의 "기본 형이상학"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간들이 독특하게 합리적이고, 독특하게 주체성과 내면성을 갖추고 있으며, 독특하게 사유와 언어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심스러운 전제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한다. 그런 입장은 다윈에 의해 본원적으로 기반이 약화되었다. 화이트헤드는 모든 현실적 존재자들에 평등하게 적용되는 파악의 분석으로 정교화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전적으로 제거했다. 그리고 오늘날 인간 예외주의는 훨씬 더 유지될 수 없는데, 이제 우리는 침팬지와 앵무새뿐 아니라 점균류와 박테리아도 소통하고 계산하며 자의적 결정을 내린다는 점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상관주의는 인간주의로 환원될 수 없으며, 주체성에 대한 관념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메이야수가 적고 있듯이, "사유와 세계의 상관관계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관관계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사유를 주체성과 표상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메이야수는 하이데거의 사례를 제시한다―도 상관주의를 무화시키는 데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나아가서, 인간주의적 주체의 해체와 용해도 정말로 우리를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는데, 기껏해야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비개인적인 인지중심주의 또는 지성중심주의로 대체할 뿐이다.

 

상관주의적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유(그리고 언어)를 전적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메이야수는 주장한다. "무기적 영역에서는 살아 있거나 의지하는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자체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세계의 소여"라는 현상학적 관념을 거부할 수 있으려면, 우리 또는 그 어떤 다른 인식자에게 "현시되지 않은 채 지속할 수 있는 세계", 즉 "우리가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존재할 수 있는" 세계의 실존을 인정해야 한다. 메이야수에게 실재는 전적으로 비주체적이다." 우리는 "사유 없이 존속할 수 있는 세계, 즉 누군가가 그것을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간에 본질적으로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세계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세계로부터 사유의 이런 본원적인 추방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메이야수의 표현 형식들이 제시하듯이, 그리고 브래시어가 훨씬 더 강력하고 직설적으로 주장하듯이, 반상관주의는 급진적 제거주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설명의 경우에, 사유에 의해 아무 영향도 받지 않도록 물질은 전적으로 수동적―생명, 계획 또는 적극적인 힘이 결여된―이어야 한다. 그리고 감각과 지각은 등급이 하향될―또는 심지어 폐기될―필요가 있는데, (무엇이든 육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관찰자와 관찰되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을 수반하기 떄문이다.

 

사유로부터의 세계의 독립성울 보증하기 위한 탐색을 수행하면서 메이야수는 일차 성질과 이차 성질의 명시적 구별짓기를 철학에 다시 도입할 정도까지 나아가게 된다. 메이야수는 지각과 감각을 희생하여 수학적 형식에 특권을 부여하는데, 이것이 객체가 자체적으로 그리고 단독으로 지니는 바로 그런 특성들을 남겨둔 채 "관찰자를 제거하는" 유일한 길이다. "수학적 술어들로 표현될 수 있는 객체의 모든 측면들은"―그리고 오직 그런 측면들만이라고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객체 자체의 특성으로 의미 있게 간주될 수 있다"고 메이야수는 적고 있다. 수학은 존재론이라는 바디우의 격언을 급진화함으로써 메이야수는, 물리과학이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동안 존재할 수 있는 것을 " 수 있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연의 수학화"를 통해서 그렇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메이야수는 이원성의 주체적 측면을 노골적으로 잘라냄으로써 자연의 이분화를 해소한다.

 

브래시어의 논증은 메이야수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하다. 객체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개념 사이의 차이는 자체적으로 비개념적이며, 사유에 의해 포섭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고 원래는 의미가 주입되어 있지 않는 세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불가피하게 "소멸의 진실", 즉 우주의 미래 과정에서 모든 사유의 불가피한 절멸로 이어지게 된다. 브래시어의 경우에는, 메이야수의 경우보다 훨씬 더, 사유 없는 시간(과거 또는 미래)에 대한 인식이 틀림없이 현재 사유―이런 인식 자체에 대한 사유도 포함하여―의 가치를 본원적으로 낮게 평가한다. 어떤 당혹스러운 형식의 극단적인 관념론(세계 없는 사유)을 포용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상관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사유 없는 세계라는 체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듯 보일 것이다. 이 경우에, 사유와 세계의 칸트적 연결을 무화시키는 것은 사유는 부수현상적이고, 환상적이며, 전적으로 아무 효험도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서양 과학은 전통적으로 물질을 그저 수동적이고 생기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왔는데, 브래시어―토머스 메칭거와 처칠랜드 부부를 좇아서―는 일단 정당화되지 않은 인간중심주의와 자기중심주의을 제거하게 되면 우리는 틀림 없이 인간들도 이런 식으로 보게 된다고 주장한다.

 

브래시어는 이 우울한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소멸의 이해 가능성을 위한 길을 닦는 의미의 소멸"을 주창한다. "무의미성과 무목적성은 결코 사사로운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이해 가능성에 있어서 이득을 나타낸다." 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런 강경한 허무주의를 인상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일단 반상관주의적 논증을 수용하면, 어떤 다른 대안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의미와 목적의 본원적인 소멸이 실재계를 우리와 별개로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치르는 댓가인가?

 

브래시어와는 대조적으로 메이야수는, 우주 역사의 어떤 시점에 무로부터 처음에는 생명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사유의 터무니없는 급진적 창발을 옹호하는 논증을 전개함으로써 제거주의의 급진적인 결과들을 빠져나간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출판되지 않았을 메이야수의 원고 <<신성한 비존재(The Divine Inexitence)>>에 대한 최근의 해설과 부분적 번역에서 하만이 명백히 하듯이, 메이야수는 생명은 본원적으로 단순한 물질과 불연속적이고, 사유는 본원적으로 단순한 생명과 불연속적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메이야수는 처음에는 생명 그리고 다음에는 사유의 절대적으로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생성이라는 형식으로 면책 조항을 제공하는 한편, 수동적이고 활성 없는 것으로서의 물질 또는 연장에 대한 데카르트적 견해를 고수한다. 이것은 인간 예외주의를 격심하게 회복시킨다. 메이야수의 반전의 격렬한 대담함은 나로 하여금 또 다시 칸트를 떠올리게 한다. 이를테면, 칸트가 제1 비판서에서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논증을 파괴함으로써 신을 제거한 후에 제2 비판서에서 신을 뒷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게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메이야수는 <<유한성 이후>>에서 충족이유율과 더불어 생명과 사유를 추방한 후에 <<신성한 비존재>>에서 그것들을 부활시킨다.

 

내 자신은 메이야수와 함께 이 길을 여행하고 싶지 않다. 상관관계의 우연성과 초한수적 전체화의 불가능성에 대한 그의 예증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족이유율의 포기에 대한 그 어떤 정당화도 찾을 수 없다. 하만은 메이야수가 그 원리에 대해 두 가지 반대 논증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반대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제일 원인 또는 부동의 원동자를 상정함으로써 끝내지 않는다면 그것이 원인들의 무한 퇴행을 함축한다는 점이다. 두 번째 반대는, 그것이 결과가 자체의 원인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이 맞다면, 참신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하만은 무한 퇴행을 생각하는 것과 관련하여 잘못된 것은 전혀 없으며, 효과는 자체의 원인들에 전적으로 독립되지 않은 채 그것들을 훌쩍 넘어설 수 있다고 응대한다.

 

하만의 두 주장은 모두 화이트헤드가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라고 부르는 것의 형식으로 제시한 충족이유율의 수정 및 재서술과 일치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실존하는 모든 것―모든 현실적 존재자―는 지금의 모습에 대한 하나의(또는 하나 이상의) 이유가 있으며, 그리고 이런 이유들은 자체적으로 나름의 현실적 존재자들이다. "현실적 존재자들이 유일한 이유들이다. 그래서 어떤 이유를 찾는 것은 하나 이상의 현실적 존재자들을 찾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 독립적인 제일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조차도 한 특수한 현실적 존재자이며, 그것의 실존에 대한 이유들은 다른 현실적 존재자들 속에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는 아무 것도 자체의 원인들에 의해 결코 전적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고 역설한다. 현실적 존재자는 자체에 제공되는 원인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그것들에 어떻게 반응할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그런 결정은 최소한 우주에 약간의 참신성을 도입한다. 그런데 또한 존재론적 원리는 그 어떤 존재자도 자체의 선행 이유들로부터 결코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진술한다.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세계로 유입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 외에, 메이야수의 설명과 브래시어의 설명의 진짜 문제는 둘 다 사물 자체―상관관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로의―는 틀림없이 아무 의미나 가치도 없이 그저 수동적이고 불활성적이라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가정 자체가 자연의 이분화의 결과가 아닐까? 사물들은 인간 없이 나름대로 생생하고 능동적이며 유념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편견일 뿐이다. 우리는 왜 이것들은 인간만이 갖는 성질들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 외부의 "사물들의 우주"에 투사할 뿐이라고 가정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제거주의적 논증들은 자체의 명시적 목표가 인간 예외주의를 꺾고 모욕하는 것일 때에도 이런 예외주의를 전제함으로써 개시된다. 가치와 의미들은 인간의 주관적인 부과물일 뿐이라고 당연히 여긴다면, 다른 존재자들뿐 아니라 인간들의 경우에도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환상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필요한 것은 사유와 세계에 대한 칸트의 매듭을 푸는 대안적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물리적 우주에서 사유 같은 것을 노골적으로 추방하기―궁극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터무니 없는 기획―보다, 제임스와 화이트헤드는 사유의 공통성일상성을 인식하도록 촉구한다. 그들은 제거주의자들이 그러듯이 사유 자체에 대해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자기성찰성의 특권화, 특별함과 뛰어남의 주장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한다. 이사벨 스탕제(Isabelle Stengers)는 제임스가 "주체와 그것의 객체 사이의 명료한 구별짓기를 승인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의식적인 지향적 체험으로서의 체험을 '탈심리학화'하는 주도면밀한 기획"에 관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제임스는 "성찰적 의식과 그것의 불변성의 가식에 중심 무대를 내어주는 특권을 부인한다." 또는, 제임스 자신이 서술하듯이, 의식으로 알려져 있는 물화된 존재자는 "허구적인 반면에, 구체적인 것 속의 사유들이 전적으로 실재적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것 속의 사유들은 사물들과 동일한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제임스의 테제는 일원론적(모든 것은 "동일한 질료로 이루어져 있기" 떄문에)인 동시에 다원론적(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많은 사유들과 많은 사물들이 존재하기 때문에)이다. 그런데 그것은 반이원론적이고, 그래서 자연의 이분화에 대립한다. 사실상, 제임스는 자신의 입장을 "주체가 아니라, 객체가 아니라, 객체 더하기 주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최소이다"라는 "신칸트주의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명시적으로 대립적인 위치에 놓는다. 이런 식으로, 제임스는 상관주의라는 문자 이전의 반상관주의자이다.

 

스탕제가 말하듯이, 체험에 대한 제임스의 규정은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기회"에 대한 "원형"을 제공한다. 현실적 기회는 항상 "양극성"인데, "물리적" 극과 "정신적" 극이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사유가 세계 자체와 실존하는 각각의 개별적 존재자의 내재적 속성―또는 역능―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외부로부터 세계에 접근하고 그것에 적합하려고(성공적이든 아니든 간에) 노력할 무언가로서의 사유에 대한 칸트 이후의(또는 상관주의적인) 의미에서 더 발전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경우에, 모든 존재자는 무언가를 내재적으로 체험한다. 또는 더 좋게 말하자면, 모든 존재자는 바로 체험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모든 존재자가 의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이트헤드는 "의식은 체험을 전제하지만, 체험은 의식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티모시 모턴(Timorthy Morton)이 "연필이 탁자 위에 놓여 있을 때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무언가를 마음이 행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연필이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연필과 비슷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더 구체적이지만 얼마간 흡사한 주장을 제시한다. 이런 식으로, 사유는 희귀하고 뛰어나기보다 흔하고 소박하다.

 

무의식적 체험은 모순어법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더 많은 것들이 인식되기보다 느껴진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원초적 형식의 체험은 정서적인 것, 맹목적인 정서이다"라고 적고 있다. 이런 정서가 이어서 자의식적인 인지로 구성되는 것은 소수의 드문 사례들에서 나타날 뿐이다. 정서적 느낌은 항상 "외부 세계와 관련하여 느껴진"다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그런데 "느낌은 무의식적이고 관련성은 모호하다". 원초적인 "벡터 느낌", 한 사물에서 다른 한 사물로의 물리적 움직임 또는 "전달"은 분명히 상관주의의 전체 드라마를 구성하는 원료이다. 그런데 비인지적인, 또는 전인지적인 무의식성과 모호성 속에서 화이트헤드가 서술하는 대로의 사유가 그 어떤 인식론적 보장도 없이 일어나거나, 또는 지나간다. 사유가 자체 외부의 세계에 상관되어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 사유는 이미 그것이 "지향"해야 하는 객체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바로 그 세계의 한 구성 요소―사유를 일종의 향신료로 간주하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이 물리적 지향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실존을 옹호하는 조지 몰나르(George Molnar)의 주장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브렌타노(Brentano)에서 비롯된, 일반적으로 견지되는 신조는 지향성이 정신적인 것 또는 심리적인 것의 배타적인 표식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지향성은 일반적으로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구획짓기"의 규정 원리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것에 맞서 몰나르는 "지향성과 매우 흡사한 무언가가 물리적 세계에 널리 퍼져 있는 제거할 수 없는 특징이다"라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견지되는 흄적인 또는 유명론적인 가정들을 거부하는 몰나르는 사물들의 물리적 역능 또는 성향들에 대해 철저한 실재론자이다. 그는 "용해성 또는 전하 같은 물리적 역능들도 심리적 속성들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자체 외부의 무언가를 향하는 방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게 서술되는 물리적 지향성은 의식적일 수가 없다. 그것은 그 어떤 의미론적 또는 표상적 내용도 갖지 않는다. 그런데 몰나르는 정신적 지향 상태들이 반드시 의미론적이거나 표상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고통은 "자체의 대상을 표상하지(기호화하지) 않은 채 지향적 대상"―고통이 느껴지는 위치―"을 향해 정향된다." 몰나르 스스로는 이런 식으로 서술하지 않지만, 그의 논증의 결과는 지향성을 탈초월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향성은 상관관계의 근본 원리 또는 구조이기보다 세계 내부에서 형성되는 암묵적 관계, 즉 생성을 위한 잠재적인 것이 된다.

 

몰나르는 이런 관점이 그가 "범심론의 위협"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는 지향성을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획짓기의 다른 한 기준으로" 대체함으로써 이런 "위협"을 제거한다. 그렇지만 유일한 다른 가용 기준은 바로 "의식 능력"―몰나르가 "이 입장은 나름의 독특한 난점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수용하는―이다. 사유(또는 느낌, 또는 체험)가 의식적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면,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획짓기에 대한 포기로 이어질 것이다.

 

몰나르는 범심론을 수용하기를 꺼려하지만, 나는 범심론이 의식과 현상학적 지향성 둘 다의 문제 다발을 피하는 좋은 길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범심론은 "위협"이기보다 약속이 될 것이다. 상관주의적 순환을 벗어나는 비제거주의적 방식은 우주 속 사유의 순전한 편재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획짓기의 기준은 필요하지 않는데, 구획하거나 분리할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칸트의 거대한 의미가 아니라 화이트헤드의 축소된 의미에서 "사유"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메이야수로부터 도치된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무로부터 사유의 급진적 창발이라는 그의 테제를 거부하면, 오히려 우리는 그가 "살아 있거나 의지하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곳에 사유가 항상 이미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려야만 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갈렌 스트로슨(Galen Strawson)의 입장이다. 스트로슨은 급진적 창발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체험 현상은 전적으로 비체험적인 현상에서 창발될 수 없다." 스트로슨은 제거주의를 터무니 없는 것으로 여기는데. "체험은 자체적으로 근본적인 주어진 자연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체험의 실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체험은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세계로 유입될 수 없기 때문에 유일한 대안은 실재가 위에서 아래까지 빠짐없이 체험적이라는 점을 수용하는 것이다.

 

범심론은 제거주의에 못지 않게 칸트의 매듭을 푼다. 범심론은 사유는 항상 이미 도처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유에 그 어떤 특별한 토대적 또는 성찰적 특권도 부여하지 않는다. 마음이 존재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과 상관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그 어떤 의문과도 별개로 마음은 자체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범심론의 경우에, 모든 것은 유념하는 존재자. 즉 마음을 지닌 존재자이지만, 이것이 반드시 모든 것은 마음에 "주어지"거나 "현시된"다는 점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논의를 애초의 사변적 실재론 사상가들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 하만도 그랜트도 전면적인 범심론자가 아니지만, 그들은 둘 다 범심론적 방향으로 강하게 경사되어 있다. 이것은 현대 범심론적 사유에 대한 데이비드 스커비나(David Skrbina)의 모음집인  <<머무르는 마음(Mind That Abides)>>에 실린 그들의 에세이들에서 자명하다. 사실상 그랜트는 "위에서 아래까지 빠짐없는, 즉 아무 예외도 없는 범심론"을 옹호하는 주장을 제시하지만, 그렇게 할 때 그는 창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것은 마음이 있거나 유념하지만, 이런 마음 있음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선행하는 자연의 생산력에서 필연적이지만 나중에 비롯된다. 한편, 하만은 심성, 즉 체험을 객체들 사이의 관계 또는 상호작용의 불가피한 성분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는 객체들은 "물러서" 있다고, 즉 모든 관계들과 별개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심성 또는 체험을 이런 객체들 자체에 독립적으로 귀속시키지 않는다. 다른 어느 것과도 결코 관계를 맺지 않은 "동면 상태"에 머무르는 객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하만의 경우에, "모든 존재자들이 체험을 포함하고 있더라도, 모든 존재자들이 체험을 겪지는 않는다."

 

이런 유보 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에게 분명한 대안이 남게 된다고 생각한다. 상관주의를 거부하고, 그래서 사유와 세계에 대한 칸트의 매듭을 풀 수 있으려면, 그 어떤 중도 노선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하만과 그랜트와 더불어) 모든 존재자들은 나름대로 최소한 어느 정도 능동적이고, 지향적이고, 활발하며, 역능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메이야수와 브래시어와 더불어) 세계는 본원적으로 사유와 분리되어 있는데, 이 경우에 사물 또는 객체들은 이른바 인간형상적 성질들을 전적으로 발탁당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상관주의적 순환을 벗어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범심론, 다른 한편으로는 제거주의를 대면하게 된다.

 

결말 부분으로서 최소한 나는 2007년 골드스미스 학술회의에서 제시되었던 네 가지 판본 외에 사변적 실재론의 더 새로운 판본들 가운데 몇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벤 우다드(Ben Woodard)의 "암흑 생기론"(dark vitalism),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의 "암흑 유물론"(dark materialism) 그리고 유진 대커(Eugene Thacker)의 "철학의 공포"(horror of philosophy) 모두 사실상 범심론과 제거주의 둘 다의 가장 극단적인 경향들을 결합하는 듯 보이는데, 그런 결합이 아무리 자가당착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사상가들의 경우에, 우리-없는-세계는 인간의 삶과 사유에 이질적이고 무척 적대적이다. 최소한 그런 기획들은 우리가 또 다시 사변적으로 그리고 우주론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후속 징조들인데, 유일하게 화이트헤드를 제외하고 그런 노력들이 의심스러운 조소의 대상으로 간주된지 일 세기 지난 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