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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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엠피리시즘: 오늘의 에세이-직접적 실재론과 소박한 실재론이 비과학적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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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1.

 

직접적 실재론과 소박한 실재론이 비과학적인 이유

Why Direct Realism and Naive Realism are Unscientific

 

뉴 엠피리시즘(New Empiricism)

 

직접적 실재론(Direct Realism)은 우리가 만지고 보는 것이 직접적으로 세계 속 사물이라는 관념이다. 직접적 실재론자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는 자신이 자기 망막에 맺힌 영상 또는 자기 뇌 속의 어떤 활동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직접적으로 보고 있다고 믿는다.

 

물리학으로부터 우리는, 시각은 주변 세계 속 객체들에서 반사되는 빛에 의해 매개되며 이런 객체들은 그것들이 행하는 근거리 전기력의 결과로서 다른 것들과 분리된다는 점을 안다. 직접적 실재론자가 직접적 지각을 제시할 때 그는, 자기 체험은 직접적으로 광자들과 이런 광자들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단거리 전기력 사이의 상호작용이며 촉각은 자기 손가락에 작용하는 단거리 힘이라는 등의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직접적 실재론은, 아무튼 지각은 광자의 경로를 따라 관찰자의 일반적 방향으로 광자의 방향을 바꾸는 전기장까지 미친다는 점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직접적 실재론자가 소리를 들을 때 그는 이 소리가 화자의 성대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데, 이것은 어떤 불가사의한 영향이 공기 분자들 사이를 가로질러 그의 지각을 누군가의 후두 내부와 직접 접촉하게 확장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 그리고 심지어 몇몇 신경과학자들도 직접적 실재론자라는 사실이 없다면 이런 함축된 믿음들은 재미있을 것이다.

 

지각의 과학은 우리가 객체를 직접적으로 지각한다고 가정할 때 무엇이든 아무 이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타자의 성대로의 인간 마음의 확장을 지지하는 그 어떤 종류의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 저쪽에, 빛살이 휘어지는 지점에 사람들의 마음 또는 사유가 미치는 인과적 효과들에 대한 증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각이 뇌 속의 표상에 의거한다는 점에 대한 강한 증거가 존재한다. 이런 증거는 지각적 "채움"에 대한 신경생리학에서 꿈의 신경적 기초를 거쳐 운동에 대한 대뇌 피질 모형화에까지 이른다.

 

지각의 신경적 위치는 신경생리학적 실험 없이도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응시를 빨리 전환할 때 전체 시야는 열성적인 아마츄어의 무비 카메라로부터의 영상처럼 혼란스럽게 변화하지 않는데,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뇌에서 데이터의 갱신이 응시 전환 동안 중단되기 때문이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결코 우리 눈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 응시가 전환될 때 거울 속에 나타나는 부동의 반사된 눈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우리 육체 바깥의 객체들과 직접적 연결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 갱신되는 안정된 내부 시야가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거울 속을 바라보며 여러분의 눈이 움직이는 동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 어떤가? 여러분은 정말 세계 자체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여러분 뇌 속의 모형, 즉 반영의 표상을 보고 있는가?

 

직접적 실재론자들은 우리가 관찰하는 사물들과 우리 사이의 외관상 분리를 우리 감각 기관들과 이런 기관들을 흥분시키는 교란을 유발하는 사물들 사이의 실제 공간의 견지에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세계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를 공간 속 3차원 객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분리되어 있는 영상처럼 본다. 그런 이유 때문에 텔레비전과 사진들이 그토록 이해 가능한 것인데, 그것들은 우리의 망막 영상들과 비슷한 형태로 세계를 제시한다. 우리는 소리를 화자의 성대 깊은 곳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머리 방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지각하며, 게다가 헤드폰을 통해서 소리를 듣더라도, 그리고 화자가 스크린 위의 영상일 뿐이더라도 소리가 사람의 머리에서 비롯된다고 지각한다. 우리 뇌 속의 어떤 물리학이 소리 감각을 영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기학학적 형태에 결합시킨다.

 

직접적/간접적 실재론 논쟁과 관련하여 나를 혼란케 하는 것은 애초에 "실제 세계"는 우리 체험과 비슷하다는 가정이다. 직접적 실재론자들은 실재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렇지 않다. 측정 결과들은 세계 자체가 주로 공간이며 최소간 3+1 차원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말해 준다. 우리 체험이 도대체 무언가와 "비슷하"다면, 그것은 세계 자체와 비슷한 것이 아니라 빛으로 불리는 세계의 매우 작은 성분이 렌즈 체계를 사용하여 표면에 투사되면 발생하는 이차원 영상과 비슷하다.

 

직접적 실재론자들은 체험의 내용이 세계 저쪽에 직접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직접적 실재론/간접적 실재론 논쟁은 항상 "의식적 체험 속에 있는 이런 것들을 볼 때, 직접적 실재론자로서 나는 이것들이 사실상 저 거리 바로 저쪽에 있는 일종의 전기력이라고 믿는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직겁적 실재론은 여전히 설명적 간극이 있다는 점이 명백해질 것이다. 시각과 청각의 두 경우 모두에서 근거리 힘들이 유사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떻게 어떤 근거리 힘들이 "빨간" 색이고 다른 힘들은 "거친" 결이 되는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퇴행과 관련된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도 명백해질 것이다. 그렇다. 저쪽에 일단의 힘들이 존재하지만, 이것들이 어떻게 재귀 또는 퇴행 없이 보여지게 되는가? 그렇지만, 더 중요하게도, 그 관념은 애초에 터무니없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인데, 물론 여러분의 마음은 거리까지 뻗지 않는다.

 

직접적 실재론이 특히 불성실한 까닭은 그것이 빛살을 구부리는 전기 활동의 패턴이 어떻게 주변 세계를 포함하는 시야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퇴행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내용을 뇌 속이 아니라 세계 속에 위치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다른 한 장소로 이동시킬 뿐이다. 직접적 실재론이 참이더라도 그것은 신경과학과 마음의 철학에서 대면하는 문제들에 아무런 해답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실재론은 터무니없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우리 지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우리 지각이 직접적으로 세계 속 사물이라는 편견에서 시작하여 지각을 이 모형에 끼워 맟춰려고 시도하면서 직접적 실재론을 비물리적인 것으로 반박하는 그 어떤 특징도 부정할 뿐이다. 왜 그런 비과학적인 접근방식을 채택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직접적 실재론이 다른 관념들보다 신학에 더 부합된다는 그릇된 인상[리드(Reid)]에서부터 "강한 AI"의 주장들을 정당화하고 싶은 욕망[데닛(Dennett)]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데닛은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일종의 "논리적 공간"에 속한다는 불가사의한 제안을 제기하지만 말이다[...]. 직접적 실재론자들이 복음주의적이고 다른 모든 관념들을 억압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고 믿는 듯 보인다는 사실이 없다면 이것은 모두 꽤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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