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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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루크레티우스와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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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26.

 

루크레티우스와의 대화

A Conversation with Lucretius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나는 하나의 허구로 시작할 것이다. 나는 루크레티우스를 에피쿠로스 학파에 속하는 1세기 로마 철학자이자 시인으로 이해하는 대신에 현대 미국 철학자로 다룰 것이다. 이것은 진실과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역사적 루크레티우스가 로마 제국의 환경에서 자신의 시를 지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의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미제국의 시대에 글을 적는다. 역사적 루크레티우스가 자신의 시를 실각한 친구 멤미우스(Memmius)에게 바쳤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의 시를 환경과학자 제임스 한센(James Hansen)―부시 행정부로부터 대단히 홀대당한―과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렌(Elizabeth Warren)―소비자금융보호국을 설립하기 위해 일하고 있을 때 오바마 행정부로부터 대단히 홀대당했으며, 그리고 금융산업계와 은행들로부터 대단히 가혹한 대접을 겪은―에게 바친다.

 

대륙철학적 전통에서 작업하고 있는 현대의 미국 철학자들에게 나의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매우 낯선 존재다. 많은 대륙적 이론가들과는 달리, 그는 당대의 생물학, 물리학, 그리고 신경학에 철저히 익숙하다. 그는 특히 기상학에 관심이 많다. 나는 기상학에 대한 그의 매혹이 과정, 압력과 열의 차이, 그리고 자기조직화를 비롯한 모든 것들에 대한 그의 사랑에서 유래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구조주의자들이 날씨 유형들이 아니라 구조를 자신들의 지침이 되는 은유로 선택한 사실을 한탄하곤 했다. 그는 말했다. "집단 이론이 아니라 기상학을 우리의 주인 과학으로 간주했었더라면, 사회에 관해 얼마나 다르게 생각했었을 것인가!" 자연주의자 또는 유물론자인 것이 유행에 매우 뒤떨어지는 시기에 그는 자연주의자이자 유물론자였지만, 그의 자연주의와 유물론은 진화사회학자들이나 영미 이론가들의 관념들과는 거의 유사점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론적, 탈인간주의적, 그리고 푸코주의적 전통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것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들은 항의한다. "우리는 유물론자들이 아닌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유물론적 자격을 강조하지 않는가?" 허구적 루크레티우스가 오늘날 유물론으로 통하는 것은 대체로 일종의 관념론이고, 그래서 진정한 물질성 또는 물리성을 대체로 무시하면서 실천에 집중한다고 넌지시 말했을 때, 엄청난 논란이 초래되었다. 어떤 인터뷰에서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진술했다. "이들 신유물론자들은 모든 것을 해석되고, 해독되며, 폭로되어야 하는 텍스트로 다룬다. 이런 이론가들이 그 어떤 물리적인 것에 대해서도 결코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의미로 취급하며, 모든 권력이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간주할 때, 어떻게 그들은 스스로를 유물론자로 부를 수 있겠는가?" 그는 "유물론"이라는 술어가 대단히 손상되어 거의 모든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고 믿었다.

 

이런 논평들, 그리고 허구적 루크레티우스가 자신의 출판물과 강연들에서 제시한 많은 다른 논평들은 많은 논란과 상당히 신랄한 반응들을 야기했다. 비판이론가들과 알튀세르(Althusser) 계보의 네오마르크스주의자들은 소리를 높이며 물질은 루크레티우스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 이론가들은 유물론자들이라고 선언했다. 결국, 그들은 언제나 자칭 유물론자들이다. 이것에 대해, 시를 짓는 솜씨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재능이 전혀 없었던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당신 자신을 무언가로 부르는 것이 당신이 그런 것이라고 입증하지는 않는다고 응답했으며, 그리고 이 이론가들은 유물론자라는 칭호를 수용하는 한편, 권력의 조직화에 대해 물리적 현상이 기여하는 점들을 확실히 무시하는 듯 보이고, 그들은 과학에 대해 많은 적대감―창조론자들과 기후 변화 부정자들의 적대감과 유사한―을 지니고 있는 듯 보이고, 그래서 끊임없이 과학은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권력과 수사학의 한 구성체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리고 자신들은 유물론자들이라는 그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 전체를 의미와 언어의 구성물들로 파악하는 듯 보인다고 담담하게 지적했다. "그것 참, 흥미로운 유물론이야"라고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어느 학술회의에서 진술했다. 물론 그는 과장하고 있었지만, 그런 혐의는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주장이 충분히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 세르(Serres), 그리고 소수의 다른 사람들처럼 이런 규정에 벗어나는 대륙적 이론가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데, 강단 내에서 이런 인물들은 통계적 아웃라이어들이며 확실히 이론의 지배적인 패러다임들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허구적 루크레티우스가 모든 것을 물리학, 생물학, 그리고 신경학으로 환원시킨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여기서 상황이 정말로 이상해진다. 자신의 자연주의와 유물론에서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만물이 물리학 법칙들을 틀림없이 준수하고 생물학과 생리학의 제약을 받는다고 주장한 것은 참이지만, 또한 그는 기상학의 탐구 대상들이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처럼 사회 현상들은 신경학이나 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회과학과 역사를 대체로 무시하면서 사회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이는 진화사회학자들―그들에 대해 그는 많은 경멸감을 품고 있다―과는 달리,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사회학, 정신분석학, 언어학, 민족지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방대한 배경 지식을 갖추고 있으며, 그리고 이런 분과학문들의 발견 결과와 도구들이 없다면 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믿었다.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스스로를 생태학자로 간주했지만, "생태학"을 심해 화산 분화구 또는 아마존 우림 주변에서 발견되는 것들과 같은 자연적 생태계들―이것들도 포함되지만―에 관한 탐구가 아니라 관계들의 연결망 또는 역동적 체계들에 관한 연구로 이해했다.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생태학은 서로 상호작용하는, 서로 에너지를 교환하는 존재자들의 연결망들, 이런 상호작용들에 대응하는 작용의 결과로서 이런 존재자들의 행동과 활성이 어떻게 수정되는지, 그리고 이런 연결망들이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의존하는 에너지와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폐기물에 관한 탐구다. 이런 틀 안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사회 또는 사회적 조립체를 그저 또 하나의 생태계로 이해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사회는 다른 생태계들과 다르고 독특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생태계가 다른 생태계들과 다르고 독특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종교적 믿음을 낳는 심리적 메커니즘들뿐 아니라 미덕과 정치에 미치는 종교의 유해한 효과를 분석한, 종교에 대한 격심한 비판을 전개한 역사적 루크레티우스와는 달리,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관해 많은 글을 적었다. 그의 저작은 알튀세르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알튀세르는 생산 조건을 재생산하는 제도와 실천들의 집합체로서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을 전개했다. 많이 당혹스럽게도, 루크레티우스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에 흥분하여 생산 조건을 만들어낼 때 정치경제, 물리적 지리, 그리고 기술이 담당하는 역할을 무시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띠-오이디푸스>>를 적고 있었을 때, 그는 침묵의 저자로서 그들이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욕망하게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탐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그리고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스피노자, 니체,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작업하는 그들을 도왔다. 그는 피에르 부르디외의 위대한 친구였고, 그 두 사람은 권력을 조직하게 되는 메커니즘들로서의 실천, 상징 권력, 스콜라철학적 오류, 그리고 아비투스에 대해 무수히 많이 논의했다. 예측 가능하게도, 자칭 자연주의자인 사람들은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를 생물학과 신경학을 무시하는, 생각이 흐릿한 문화적 관념론자라고 비난했다.

 

그런 것이 허구적 루크레티우스의 지적 전기다. 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자신에 대한 비판 이론적 비판과 이른바 "자연주의적" 비판 둘 다에 대한 대응으로 저술했다. 나는 라틴어 제목을 사용하겠다는 그의 결단이 아무 의미도 없지는 않다고 추측한다. 그가 사우스 텍사스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서 일하는 동안 살인벌에 쏘인 결과로 요절하기 전에 우리가 나눈 많은 토론들에서 그는 항상 내게 로마―원자론적이고 에피쿠로스주의적 철학의 로마―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두 가지 그리스적 선택지 사이에 난 제3의 길, 잊혀진 길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유전자 조작 벌로 인한 이 죽음은 하나의 슬픈 역설이었는데, 그는 문화와 기술이 비인간들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글을 쓰는 데 대단히 많은 잉크를 소모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가 그리스인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제3의 길이라는 그의 논제가 전적으로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요하지 않는 듯 보였는데, 그것은, 그가 흔히 말했듯이, 고대 원자론에 대한 우리의 가장 상세한 표현은 역사적 루크레티우스에서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은 로마인들에게서 어떤 순진함과 유쾌한 충만함을 발견했다고 그는 말했다. 로마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모든 생물과 광물을 향유하고 인간을 다른 동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동물―확실히 독특하지만―로 간주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친절함 또는 관용을 나타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들이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만큼이나 물고기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었다고 지적하기를 좋아했다. 형상이나 본질에 사로잡힌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로마인들은 모든 것을 독특하고 특이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로마의 원자론자들은 위계가 없는 세계, 내재성의 평면으로서의 세계를 생각했는데, 여기서 형상들은 개별적 사물들보다 더 실재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운동의 기원으로서 작용하고 있는 부동의 원동자 또는 존재의 거대한 연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앉아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초고를 읽었을 때 대단히 놀랐다고 고백한다. 첫째, 내가 많이 놀랍게도, 내 친구 루크레티우스는 그것을 운문으로, 게다가 아름다운 시가로 적었었다. 그의 이전 작품은 항상 대단히 무미건조했고, 대단히 전문적이었다. 그런데 여기 내 앞에 놓인 것은 멋진 시가였다. 내가 그에게 이것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자신이 작성한 한 구절을 가리켰다.

 

왜냐하면 우선, 내가 중대한 일들에 대해 가르치고, [이데올로기, 인간 예외주의, 그리고 인간중심주의]의

단단한 매듭에서 정신을 풀어내고자 나아가기 때문이고,

또한 컴컴한 일들에 대하여 그토록 밝은 노래들을

읽어내기 때문이다, 무사 여인들의 매력으로 모든 것을 덧입히며.

이는 그것도 근거가 없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치료자들이 아이들에게 역겨운 약쑥을 먹이려

할 때, 먼저 잔의 입 주위를

꿀의 달콤한 황금빛 액체로 칠하듯,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아이들의 나이가, 입술에 이르기까지

속아 넘어가, 그 사이 쓰디쓴 쑥물을

마셔버리도록, 그래서 속긴 하지만 해는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방도로 회복하여 강건해지도록―.

그와 같이 나는 지금, 이 이치가 그것을 다뤄본 적 없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우울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리고 대중이

무서워 이것으로부터 물러서므로, 기분 좋게 말 전하는

파에리아의 노래로 그대에게 나의 이치를 펼쳐 보이고,

또 말하자면 무사 여인의 달콤한 꿀 입히기를 원했노라,

혹시 그 같은 방법으로 해서 그대가 사물들의 모든 본성을,

그것이 어떻게 정돈된 모양을 갖추고 있는지 꿰둟어 볼 동안,

그대의 정신을 나의 시행들 속에 붙잡아 둘 수 있을까 하여. [93-4]

 

어느 날 저녁에 멋진 텍사스 피노 그리지오 포도주―정말 나는 텍사스에도 멋진 피노 포도주가 있다는 점을 깨닫고 놀랐다―를 마시며 나눈 대화에서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한편으로, 자기도취적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이, 의미, 체험, 기표, 기호, 그리고 텍스트들―편리하게도 그들이 탐구하는 것들―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것들이 아니며, 그리고 이런 존재자들이 비담론적인 물리적 원리들을 준수한다는 점은 대륙 비판이론가들이 수용하기에는 너무 불쾌했기 때문에 그들을 유혹하는 데 아름다운 운문이 필요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이른바 자연주의자들―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그들을 조소적으로 언급했다―은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것이 생물학, 신경학, 그리고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을 수용하도록 세계의 수사학적 차원에 대해, 기호와 언어가 사물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대해 환기할 필요가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의 텍스트가 틀림없이 그들의 신경계에 직접 작용하여 이런 차원들에 주목하게 만들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말했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그 책을 땅, 또는 그가 언급한 대로 베누스에 대한 기도문으로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이 점에 내게서 충격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내가 그를 알고 지낸 모든 세월 동안 그는 일종의 강경한 무신론자였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랬다. 그는 기원하고 희망하며 이렇게 적었다.

 

아이네아스의 후손들의 어머니시여, 인간과 신들의 즐거움이시여,

생명을 주시는 베누스시여, 당신은 하늘을 미끄러지는 별들 아래

배들을 나르는 바다와 곡식을 가져오는 땅들을

그득하게 채워주십니다. 당신으로 인하여 목숨 가진 것들의 모든 종족이

수태하며, 생겨나 태양빛을 보러 오니까요.

당신을, 여신이시여, 당신을 바람들이 피합니다. 당신을 하늘의 구름들이,

당신께서 오시는 것을 피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교묘한 재주 지닌 땅이

달콤한 꽃들을 피워냅니다. 당신께 바다의 수면이 미소 지으며,

평온해진 하늘이 흩뿌려진 빛으로 반짝입니다.

그것은, 봄날의 얼굴이 드러나고,

생명을 주는 서풍의 바람결이 풀려나 세어지자마자,

하늘의 새들이 제일 먼저 당신을, 여신이시여, 그리고 당신이

들어오심을, 당신의 힘에 가슴 떨려 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산짐승도 가축도 풍요한 풀밭을 두루 뛰어다니고,

물살 빠른 강들을 헤어건너지요. 무엇이든 그렇게 매력에 사로잡혀

어디든 당신이 이끌어 몰아가는 대로 욕망으로써 당신을 따릅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바다와 산들과 격렬한 강들과

나뭇잎 우거진 새들의 집들과 푸르른 들판을 가로질러

모든 것의 가슴에 매혹하는 사랑을 심어 넣어,

종족을 좇아 열심히 자손을 생산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한 당신은 홀로 사물의 본성을 조종하시고,

당신 없이는 그 어떤 것도 빛의 신성한 해안으로

생겨 올라오지 못하며, 어떤 것도 행복하게, 사랑스럽게 되지 못하니,

제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하여 친애하는 [제임스 한센과 엘리자베스 워렌]에게

엮어보이고자 시구들을 쓰는 데에 당신께서 동맹자가 되시기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당신은 그[들을], 여신이시여, 온 생애 동안

온갖 것으로 치장하여 탁월한 자로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만큼 더 크게, 여신이여, 말해진 것들에 영속적인 매력을 주소서.

그 사이, 군사의 거친 일들은

온 땅과 바다에 걸쳐 잠들어 조용하게 하소서.

왜냐하면 당신만이 고요한 평화로써 인간들을 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거친 일들은 무기를 지배하는

마르보스(마르스)께서 다스리시는데, 그는 사랑의 영원한 상처에 굴복하여,

자주 당신의 무릎에 자신을 되던지니까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유연한 목을 기대어 받치고 올려다보며,

당신을 응시하며, 여신이여, 탐욕스런 시선을 사랑으로 먹입니다.

또한 기대어 누운 그의 숨결은 당신의 입에 매달려 있지요. [25-8]

 

나는 대단히 길게 인용한 점에 대해 사과하지만, 여러분은 때때로 밉살스러운 신무신론자들 가운데 일인으로 서술되어온 한 철학자의 펜에서 비롯된 그런 시구들에 대한 나의 놀라움을 이해해야 한다. 베누스에 대한 기도문? 정말? 내 친구가 온건해졌는가? 처음에는 나의 페미니즘적이고 퀴어 이론적인 발톱이 튀어 나왔다. 여성성을 땅, 부조리한 것, 물질적인 것, 그리고 이성과 합리성으로 규정되지 않는 모든 것과 연관시켜온 오랜 전통을 염두에 둔 나는 우호적인 분노에 휩싸여 이런 틀을 강화시킨 점에 대해 내 친구를 크게 책망했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은 진정한 에피쿠로스주의자처럼 그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며 내게 담담하게 대응했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다음에 그는 내게 남성성은 사실상 겉치레이고 여성성이 존재의 진리이자 주체의 지위에 있다는 라캉의 가르침을 환기시켰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 기도문이라니?" 나는 소리쳤다. 그는 자본주의의 참화와 기후변화에 대해 의미 있게 대응하기를 거부하는 것에 직면하여 비관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내게 말했다. 그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문화를 읽을 때 아무 희망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90년대의 영화에서 인류가 항상 적에 대해 승리를 거두는 <<딥 임팩트(Deep Impact)>>, <<단테스 피크(Dante's Peak)>>, <<아마겟돈(Armageddon)>>, 그리고 <<인디펜던스 데이(Independence Day)>> 같은 일련의 재난 영화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이런 영화들은 항상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것들의 논제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붕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영화들이 더 어두워졌다고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인간의 자식들(Children of Men)>>, <<월-E(Wall-E)>>, <<우주전쟁(War of Worlds)>>, 그리고 마지막으로 <<멜랑콜리아(Melancholia)>> 같은 더 위협적인 영화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처음 세 영화에서는 인간들이 생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함의를 항상 담고는 있지만 인류가 살아남는 반면에, 네 번째 영화에서는 인간 종과 지구의 완전한 소멸을 목격한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끔찍한 환경을 바꿀 수 없다는 우리 의식을 가리키는 무의식적인 지표라고 그는 <<정치적 무의식(The Political Unconsciousness)>>의 제임슨(Jameson)을 좇아서 말했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베누스에게 기도하며 땅의 생식력, 그것에 대한 우리의 의존성, 그리고 모든 것이 땅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벌에 쏘여 죽기 전에 그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기도와 희망이야"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이 책의 내용이었다. 그가 대응하고 있던 비판들이 정치적 특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나는 그가 자신의 자연주의는 어떻게 환원주의가 아닌지 보여줌으로써 대륙적 비판이론가들에게 대응하는 한편, 이른바 자연주의자와 유물론자들에게는 어떻게 이런 문화적 요소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대응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덧붙여, 나는 사우스 텍사스의 내 친구가 사회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라는 문제와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라는 문제에 대한 규범적 설명을 제시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의 심오한 이데올로기 비판들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나는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찾아내지 못했고, 그 대신에 자연의 존재론을 만났다.

 

나는 의심했다. 이것이 정치 또는 사회와 무슨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 루크레티우스는 "존재정치학" 또는 "존재사회학"으로 불리는 것을 행하고 있다고 말했으며, 규범적 정치 이론, 전술적 정치 이론 그리고 분석적 정치 이론을 구별했다. 플라톤의 <<국가>>, 로크의 두 저서 또는 롤스의 저작에서 발견하듯이, 규범적 정치 이론은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형들을 제시한다고 그는 말했다. 전술적 정치 이론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한다. 분석적 정치 이론은 사회학과 매우 흡사하게 현존하는 사회들이 실제로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런 사회들 속에서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고 억압을 초래하는지 탐구한다. 기묘하게도 그는 분석적 정치 이론을 존재지도학의 한 갈래로 언급하며, 이 테제는 권력의 체계들에 대한 지도를 그리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푸코와 <<자본>>의 마르크스를 정치적 존재지도학자들의 예로서 인용했다. 마지막으로, 존재정치학 또는 존재사회학은 정치적 문제와 사회학적 문제들이 제기될 수 있는 존재론적 틀의 개요를 설명한다고 루크레티우스는 말했다. 그는, 우리의 존재정치학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규범적, 전술적 그리고 분석적 정치학의 문제들을 서툴게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존재정치학의 저작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저작이 인간의 관계들과 행동을 규제하는 규범, 정책, 쟁점, 억압 또는 정부는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 한, 그 저작의 주제들은 정치와 거의 아무 관계도 없는 듯 보인다고 내가 지적했을 때, 그는 손을 흔들었을 뿐이다. 그런 의문들에 대답하기 전에 그는 우리는 먼저 사회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사회에는 어떤 종류들의 존재자들이 거주하는지, 어떤 종류들의 존재자들이 권력의 조립체들에 기여하는지, 존재자들 사이에서 관계들이 어떻게 강화되는지 등의 문제들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석적, 규범적 그리고 전술적 정치 이론에 대한 일종의 예비 지식으로서 이런 것들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는 분석적 정치론에서 탐구할 필요가 있는 것,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할 필요가 있는 상황 그리고 규범이 비롯되는 원천을 무시할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은 마찬가지로 쉽게 <<정치적 이성 비판>>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의 훌륭한 친구 슬라보예 지젝을 고려하자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종종 그와 함께 이데올로기를 논의했다. <<환상의 돌림병>>의 서두에서 지젝이 제시하는 세 가지 화장실에 대한 즐거운 사례를 회상하자. 거기서 그는 우리가 화상실을 갈 때에도 어떻게 이데올로기에 휘말리게 되는지 보여준자. 독일식 화장실은 전방에 구멍이 있어서 우리의 배설물이 건강 상태를 결정하는 검사를 위해 제시될 것이다. 프랑스식 화장실은 중앙에 구멍이 있어서 우리의 배설물이 가능한 한 빨리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국식 화장실은 멋진 물 웅덩이가 있어서 우리가 원한다면 배설물을 검사하고 쉽게 물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이데올로기를 나타낸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독일식 화장실은 세심한 주의와 강박적 돌봄의 이테올로기를 나타내고, 프랑스식 화장실은 배설물을 빨리 제거하고 싶은 욕망에서 혁명적 조급함의 이데올로기를 나타내며, 영국식 화장실은 공리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나타낸다.

 

여기에 사회, 권력 그리고 정치의 존재론 전체가 전제되어 있다고 루크레티우스는 말했다. 사회는 의미작용 또는 의미들에 의해 결성된다고 이해되며, 권력은 기표에서 비롯된다고 이해된다. 화장실은 이데올로기적 의미작용들의 운반체 또는 나르개인 것으로 환원되는 한편, 배관 등의 작용은 무관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러므로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의미작용을 비판하거나 새로운 의미작용을 발달시키는 것에 놓여 있다. 내가 지젝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루크레티우스는 발언했다. 이데올로기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의미작용은 사회적 생태계들에서 중요한 차원의 권력이다. 우리의 스승 화이트헤드가 말했듯이, 지젝의 문제는 그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상황을 과장하여 말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친구 라투르가 행위소들을 추적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르쳐준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지젝에게 화장실이 의미작용하는 방식에 독립적으로 그것 자체가 권력에 무언가를 기여하는지 물어야 한다. 사회적 생태계가 배관 시설, 종말처리장 등을 갖추는 여부가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행위소들이 없는 사회적 생태계는 콜레라와 이질 같은 질병들이 더 빈번하게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체의 생태계를 조직하고 발달시키며 스스로를 계발하는 등의 능력에 모든 종류의 영향을 미친다.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좋은 배관 시설일 때, 지젝의 이데올로기 비판은 사회적 생태계 같은 의미작용 구성 체계들을 바쁘게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을 저지하는 것은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부구조의 부재일 것이다. 지젝의 정치 이론과 실천은 어떤 존재정치학을 전제하지만, 그것은 명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정으로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좋은 존재정치학은 우리로 하여금 권력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이해하고 이런 것들을 식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시점에서 나의 당혹스러운 느낌의 일부가 흩어지지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루크레티우스, 사회에 어떤 존재자들이 거주하는지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회는 그저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는가? 사회는 생태계임을 기억하라고 그가 말했다. 여태까지 그저 한 유형의 사물로 구성된 생태계를 본 적이 있느냐? 산호초를 생각하자. 상이한 다양한 산호, 식물, 플랑크톤, 갑각류 동물, 모든 종류의 생선, 사물들을 데려오고 쓸어가는 규칙적 유형들의 조류, 해빛에 의해 제공되는 에너지, 달의 주기 등이 존재한다. 산호초라는 생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관계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은 사회란 상이한 직업, 성별, 국적, 민족 그리고 장애를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출발점이지만, 사회는 그저 사람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그가 대답했다. 내 입이 벌어졌고 나는 숨을 헐떡거렸지만, 그는 밀고 나갔다. 기업, 정부 기관, 집단, 계급, 밈, 의미작용 체계, 곤충, 소설과 헌법 같은 문화적 인공물, 기술, 하부구조, 석유 같은 다양한 에너지원, 전염병의 경우처럼 H1N1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 동물, 식물, 날씨 사건과 그 외 많은 것들도 존재한다. 그가 수사학적으로 물었다. 곡물을 수정하는 벌이 없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통풍시키는 미생물이 없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들은 사회 내부의 필수적인 존재자들이 아닌가? 이런 생태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회가 무엇이고,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고, 불평등은 왜 존재하고 그리고 상황에 개입하여 변화시키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생태계는 인간과 비인간들 모두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정치학은 매우 추상적인 층위에서 이런 생태계들을 이해하는 도구를 제공한다.

 

그것이 나중에 그가 살인벌에 쏘여 죽기 전에 우리가 나눈 최후의 대화였다. 나는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에서 그가 제시하는 존재정치학의 중심 주제들 가운데 일부를 논의함으로써 마무리지을 것이다. 허구적 루크레티우스의 악명을 높이게 한 주요한 신조는 자연주의라는 신조이다. 처음에는 이것이 나로 하여금 다양한 이유로 몸서리치게 하였지만, 그 텍스트를 읽으며 더 많은 시간을 보냄에 따라 나는 그의 자연주의가 매우 이례적이고 열광적인 자연주의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한편으로, 나의 최초 반응은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주의가 모든 것을 생물학, 신경학 그리고 물리학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함축한다고 걱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저작에서 "자연"이라는 술어를 읽을 때마다 나는, 그가 여성은 자연적으로 어떤 식으로 존재할 뿐이"라거나, "성은 자연적으로 이성애적이"라거나 또는 다른 민족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열등하다고 말할 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광신자가 차별과 억압을 옹호하는 변론을 제시할 때 동원하기를 좋아하는 본질 같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허구적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주의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주의는 세 가지 서로 관련된 주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아무것도 자연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를 전제로 한다. 긍정적인 술어로 서술하면, 모든 것이 자연이라는 주장이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본원적 내재성의 존재론을 옹호했다. 그의 경우에는, 예를 들면, 영원한 플라톤적 형상들로 이루어진 그 어떤 초월적 영역도 존재하지 않는다. 위계가 없는 단일한 평면에 거주하는 자연적 존재자들이 있을 뿐이다. 이런 존재자들은 모두 생성되고 사라지며, 그리고 어떤 것들은 매우 강력하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같은 엄청난 황제도 보잘것 없는 미생물로 쓰러질 수 있다. 모든 것이 자연이라고 주장할 때 루크레티우스는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이원적 대립의 기반을 약화시키기를 희망했다. 그의 경우에는 문화 역시 자연의 구성체이고, 자연적 존재자이며, 더 넓은 자연적 세계에 묻어들어가 있는 존재자이다. 다시 말해서, 루크레티우스는 문화가 생물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확실히 문화는 생물학과 얽혀 있지만―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 자체가 자연의 구성체라고 말한다. 독특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아마존 우림의 복잡한 생태계들이 비자연적이라고 가정할 이유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화가 비자연적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우리가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을 방문하는 그런 경우들처럼 자연은 여러분이 사회를 벗어나서 갈 수 있는 어떤 장소라는 관념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뉴욕시의 한 복판에서도 우리는 자연 속에 존재한다고 그는 즐겨 말했다. 그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사회는 더 넓은 생태계에 묻어들어가 있고, 사회는 에너지를 위해 주변 세계에 의존해야 하고, 날씨는 사회적 조립체 또는 생태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것은 사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더 넓은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때문이었다.

 

다시 한 번, 반대 의견들이 그의 문화주의적 비판가들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들은 그를 상황을 물리학, 생물학 그리고 신경학으로 환원시킨다고 비난했다. "우리는 권력, 의미작용, 의미, 규범 그리고 믿음들을 탐구한다"고 그들은 말했다. 허구적 루크레티우스는 물리학, 생물학 그리고 신경학이 우리가 사회와 사람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을 제약한다는 점을 인정했다. 예를 들면, 다른 어느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회들은 존재하기 위해 연료와 식량의 형태로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또한 모든 사회와 사람들은 주변 환경에 폐기물을 배출한다. 정치 이론에서는 물리학에서 사용되는 대로의 일―다른 물체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힘과 에너지로서의―이라는 개념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과 권력의 한 차원으로서의 에너지 요구가 거의 항상 무시당하는 듯 보였다는 사실을 그는 개탄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억업적 체계들에 대한 사람들의 애착을 잘못된 믿음에서 비롯되거나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만당함으로써 초래되는 것으로 설명하지만, 에너지에 대한 의존성과 노동으로 포화된 시간 및 과로의 결과로 인한 에너지 부족도 마찬가지로 억압적 체계에 구속되는 것에 기여하지 않는가? 다른 어느 것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육체들은 인지하고 비판하며 저항하는 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신경학이 우리 것과 같은 뇌는 어느 시점에 우리가 얼마나 많이 인지할 수 있을지 제한하는 정도의 정보만큼 지닐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사회 같은 사회에서 대응할 수 있는 우리 능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말했다. 마지막으로, 소통은 물리학의 법칙들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참일 것이다. 소통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없고―그리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통신 매체에 따라 훨씬 더 느리게 전달된다―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세계 전체에 전달되어야 한다. 그는 이것이 정치 이론은 어떻게 메시지가 전 세계에 걸쳐 전달되어 사회적 및 정치적 효과를 낳는지 그리고 왜 어떤 메시지들은 성공적으로 확산되는 반면에 다른 메시지들은 그렇지 않은지 추적하기 위해서 전염병학의 기법들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수반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속해서 그는 근대 과학이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바꾸어 버렸다고 말했다. 전근대적 자연 개념은 퓌시스(phusis)와 테크네(techne) 사이의 본질주의적 구별짓기를 전제로 하였다. 전근대적 관념에서, "자연" 또는 퓌시스는 "이것은 한 사물의 본성(자연)이다"라고 말할 때처럼 한 사물 속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도토리의 퓌시스 또는 본성은 참나무가 되는 것이다. 참나무는 도토리가 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로 하여금 괴물에 관해 말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 머리가 둘 달린 돼지가 괴물이라면, 이것은 본성상 돼지 배아는 한 특수한 형상 또는 본질을 현실화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테크네는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미치도록 무언가가 외부적으로 부여되는 존재의 영역을 가리킨다. 목수는 나무를 의자로 제작한다. 의자가 되는 것은 이미 나무의 본성에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본질 또는 형상으로서의 퓌시스는 자연의 질서로 간주된 반면에, 발명과 창조의 영역인 테크네는 문화와 사회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루크레티우스는 근대성이 자연에 대한 이런 관념을 완전히 폭파해 버렸으며, 새로운 자연은 자연을 불변하는 본질 또는 형상들의 영원한 영역으로서 간주하는 전통적 개념보다 역사성, 발명 그리고 특이성 같은 문화의 특질들을 더 많이 닮았다고 주장했다. 현대 천체물리학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빅뱅의 결과라고 생각했고, 생각할 수 없는 방대한 시간에 걸쳐서 많은 그런 사건들이 있었다고 가정하였으며, 그리고 물리적 법칙들이 매우 상이한 다른 우주와 차원들이 존재할 것이라는 관념을 탐구하고 있었다. 물리학은 원소들이 역사의 결과이고, 그것들이 항성들의 핵심에서 만들어지며, 그리고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은 몇 가지 원소들도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것은 다른 원소들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진화 이론은 종이 만들어지고, "형상"에서 벗어나는 개별적 차이점들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종 분화의 동력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발달 체계 이론, 후성 이론 그리고 이보디보(evo-devo) 같은 진화 이론의 갈래들은 유전체가 결코 플라톤적 형상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본질 같은 청사진이 아니라, 사실상 유기체가 수정란에서 성체로 발달할 때 환경과의 만남에 의존하여 다양한 상이한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일단의 잠재적인 것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경학은 뇌가 배선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성적이고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점을 점점 더 예증하고 있었다. 루크레티우스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이런 발견들을 아직 따라잡지 못하고 있고, 그것들이 여전히 전근대적 자연 개념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리고 이와 같은 통찰들이 진화심리학과 진화사회학에서 발견되는 설명들처럼 미리 설정하는 형태와 행동 같은 본성을 환기하는 시도들의 허위성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자연은 결정론적인 변함없는 본질들의 질서가 아니라, 문화와 꼭 마찬가지로 발명적이고 창조적이며 역사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생물학의 발달 이론에 의해 입증되었다.

 

루크레티우스의 존재정치학과 자연주의의 위대한 두 번째 원리는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에게 이것은, 모든 것은 자연적, 물리적 또는 물질적 원인이 있거나, 아니면 마법의 원격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것을 주장할 때 루크레티우스는, 사물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들의 연원을 생물학이나 물리학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내게 서술했듯이, 한 사물이 다른 한 사물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저 어떤 종류의 물리적 연결이 존재해야 한다. 그는 저주라는 예를 제시했다. 그가 말했다. "레비, 내 집에서 내가 당신에게 저주를 내리다면, 내가 발설하는 말과 수행하는 제의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그런 말은 내 소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루크레티우스의 오두막에서 사밀하게 수행되어서 어떤 식으로도 내게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이 터무니없을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런데 그때 나는 스필버그의 <<칼라 퍼플(Color Purple)>>에서 우피 골드버그의 저주는 확실히 대니 글로버에게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는 점을 지적했다. 루크레티우스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레비, 그것은 마법의 결과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글로버가 저주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그를 지배하게 만든 것은 마법이 아니라 심리적 메커니즘이었다. 이것은 물리적 또는 자연적 원인인데, 비록 그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문화적 틀 전체에 의존하더라도 말이다. 확실히 당신은 마법사들에 관한 레비-스트로스의 글을 읽은 적이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루크레티우스 자연주의의 위대한 세 번째 원리는 자연은 그 어떤 존재론적 목적 또는 목적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 원리를 진화생물학에서 도출했다. 기관들의 목적 대상은 없다고 그가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볼 필요성이 아무튼 눈을 생성하는 경우처럼 기능 또는 목적이 기관에 선행한다고 간주한 반면에, 다윈은 돌연변이를 통해서 기관이 먼저 생성되고, 그 다음에 생식에 이롭거나 이롭지 않은 기능이 발견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보기 위해 눈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즉 자연에는 애초에 아무 목적성 또는 목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성애는 비정상적이고 비자연적인 형태의 성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서처럼 우리는 "비자연적"인 것이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그는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네(No New Tale to Tell)"라는 러브 앤 로켓의 노래를 인용하는데, 그 노래에서 그들은 "자연에 맞설 수는 없다네. 그렇게 할 때 그것 역시 자연이기 때문이라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이라고 그가 말했다. 그는,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이런 목적의 결과로 어떤 행위에 관여하는 경우처럼, 아니면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이나 암 치료법을 찾는 대학의 경우처럼, 자체의 인지 능력 덕분에 어떤 체계들은 목적성을 갖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의 요점은 목적성은 자연 또는 세계에 의해 미리 설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찰을 거쳐 나는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주의가 기호학, 언어학, 해석학, 민족지학, 사회학, 정신분석 등에 상당히 부합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루크레티우스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에 사로잡혔으며 그것이 사회과학과 인문학에 의해 부당하게 무시당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엔트로피는 두 가지를 의미했다. 열역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질서정연한 닫힌 체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혼돈 상태가 되는 경향을 가리킨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 만일 세월이 노령으로써 데려가버리는 그 어떤 것이든

그 모든 질료를 소모하여 완전히 없애버린다면,

베누스는 어디서 살아있는 것들의 종족을 그 종(種)에 따라

생명의 빛으로 되이끌 수 있으며, 이끌려온 그것을 땅은, 비록 그것이 공교(工巧)하다 해도,

어디로부터 종에 따라 양식을 공급하며 키우고 자라게 하겠는가?

토박이인 샘들과 멀리 바깥에서 오는 강들은

어떻게 바다를 채울 것인가? 창공(蒼空)은 어떻게 별들을 먹일 것인가?

왜냐하면 지나가버린 무한한 세월과 날들이

스러지는 몸으로 된 모든 것들은 소모해버렸어야만 하니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 시간과 지나가버린 세월에

그것들로부터 사물들의 이 총체가 재생되어 유지된 그런 것들이 있었다면,

그것들은 확실히 불멸의 본성을 부여받은 것들이다.

따라서 각각의 것들이 무로 돌려질 수는 없다. (43)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모든 것이, 심지어 별들도 필멸적인 것으로서 해체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이런 견지에서 그는, 진짜 문제는 바디우와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이 묻고 있듯이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아니라, 왜 사물들이 왜 산산히 부서지지 않는가라는 의문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으로부터 그는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정보 이론으로 도출되는 엔트로피에 대한 두 번째 개념에 이르게 된다. 거기서 엔트로피는 질서의 척도로 간주된다. 엔트로피가 높은 체계는 한 요소가 무엇이든 다른 요소와 시간적으로 또는 구조적으로 관계를 맺을 확률이 동일한 체계라고 섀넌은 말한다. 예를 들면, 한 특수한 종류의 기체를 포함하는 유리 상자가 엔트로피가 높은 체계인 까닭은 그 기체의 어떤 분자도 그 기체의 어떤 다른 분자와도 공간적으로 인접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요소의 위치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다른 요소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없다. 반직관적으로 섀넌은,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는 비개연성에 의해 특징지워진다고 말했다. 이것은 요소들 사이에 특정한 구조적 또는 시간적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요소가 주어지면, 이 요소는 무엇이든 무작위적인 다른 요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 특정한 요소와 관련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체 구름은 무질서한 혼돈 상태에 있고, 그래서 엔트로피가 높은 반면에,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는 대단히 질서정연한 구조화된 관계들에 의해 특징지워진다. 질서정연한 또는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에서는 한 요소로부터 다른 한 요소를 믿음직하게 추정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섀넌은 이 같은 원리들을 사용하여 암호화된 메시지들을 해독하고 메시지들을 암호화하였다. 예를 들면, 어떤 메시지에서 어떤 기호들의 빈도를 감안하면, 그 암호에서 어떤 기호들이 모음인지 추정할 수 있다. 언어에 따라서 어떤 모음들이 다른 모음들보다 더 많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암호화된 메시지의 기점 언어와 그 언어에서 상이한 모듬들이 사용되는 빈도에 대한 지식에 의거하여, 우리는 암호화된 기호들이 어떤 모음들에 대응하는지에 대한 경험에 입각한 주장을 제시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메시지를 판독할 수 있을 때까지 암호의 자음과 다른 요소들에 대한 관계들을 역설계할 수 있다. 이것이 모두 가능한 까닭은 언어가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통계적 빈도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이기 때문이다.

 

루크레티우스는 이런 개념들이 인문학, 정치 이론 그리고 사회과학에 매우 중요하다고 느꼈다. 사회는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라고 그가 말했다. 예를 들면, 어떤 복식 양식이 주어지면, 우리는 계급 지위, 그 사람이 견지할 가능성이 높은 가치 그리고 이데올로기를 추정할 수 있다. 핀천(Pynchon)의 <<제49호 품목의 경매(Crying of Lot 49)>> 같은 텍스트를 해석할 때, 우리는 본질적으로 엔트로피와 관련된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데, 소설의 요소들과 또 하나의 의미 집합 사이에 비자의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관계들은 시간에 걸쳐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시카고에서는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에 계급과 민족의 꽤 강한 분포가 나타난다. 이 특수한 해변의 이 광상에서 특수한 크기의 조개껍질과 자갈들이 나타나는 이유를 물을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시카고의 계급과 민족의 비개연적인 분포 같은 사례들은 사람들의 유형들이 이런 특수한 질서정연한 분포로 나타나는 이유와 무엇보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분포가 유지되는 방식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사회는 왜 무질서한 브라운 운동 또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로 퇴화하지 않는가? 사회는 어떻게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고 엔트로피에 저항하는가?

 

이것들은 권력의 문제,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의 문제이며, 그리고 열역학이 표현하는 엔트로피와 정보 이론에서 질서의 척도로서의 엔트로피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점은 루크레티우스에게 분명해졌다. 시체 또는 사체는 빠르게 부패하거나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점을 알아챈 그는 왜 이러한지 또는 사체는 생체와 어떻게 다른지 자문했다. 그는, 생체는 먹이 형태로 자체 환경에서 에너지를 끌어 모으고 대사 작용을 통해서 이 에너지를 세포와 전기화학적 반응들로 변환시키는 반면에, 사체는 더 이상 이것을 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소산적 체계 이론에 영향을 받은 그는, 체계는 요소들 사이에 소통이 일어나고 자체 환경에서 에너지를 얻어서 활동으로 변환시킬 때에만 시간에 걸쳐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예를 들면, 허리케인은 대양으로부터 에너지 또는 열을 얻는 한에 있어서 자체의 존재 또는 패턴이 있는 구조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상륙하여 가열된 대양으로부터의 에너지원을 상실하게 되면, 허리케인은 빠르게 해체되기 시작하는데, 즉 허리케인을 구성하는 입자들이 더 이상 허리케인의 사이클론성 패턴을 형성하는 질서정연한 방식으로 소통하지 못하게 된다. 허리케인과 생체는 사물이라기보다 오히려 과정 또는 활동이다. 그것들은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또는 조작들을 필요로 하며, 그리고 일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것들은 열역학에서 비롯되는 개념들이다. 정보 이론에서 엔트로피라는 개념에 의해 서술되는 질서는 일로 변환되는 에너지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통해서 유지된다. 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참이라고 루크레티우스는 추정했다. 사회는 하나의 사물, 즉 믿음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존재자들을 조립하는 하나의 과정 또는 활동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사회적 과정들은 세 가지의 것들을 필요로 한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첫째, 그것들은 소통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서 소통은 언설, 글 그리고 경제적 교환을 비롯한 모든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소통은 소통자들 사이에 교환되는 메시지일 뿐 아니라, 소통자들 사이의 질서정연한 관계와 정체성들을 형성하는 것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예를 들면, 말할 때 우리는 메시지들을 교환할 뿐 아니라, 정체성들을 형성하고 언어의 규범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것은 대체로 언어학자와 기호학자들에게 친숙했다. 둘쨰, 그렇지만 사회는 육체를 영위하기 위해 열량 형태의 에너지와 정보통신, 여행, 산업 등과 같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연료 형태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과정들을 움직이기 위해 더 넓은 자연적 세계에서 비롯되는 에너지에 의존하는 한에 있어서 사회는 자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에너지가 단절되면, 사회의 특징인 엔트로피가 낮은 질서정연한 관계들이 해체되기 시작하고, 그래서 혼돈이 이어지거나 새로운 "종 분화",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이 출현하기 시작한다. 이런 노선을 따라서 그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즈 사례를 인용했다. 더 넓은 세계와의 소통과 기술에 동력을 제공하는 열량과 연료 형태의 에너지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그 폭풍 이전 뉴올리언즈의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 특성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루크레티우스는, 과정 또는 활동으로서의 사회에 대한 성찰과 엔트로피가 낮은 체계가 시간에 걸쳐 자체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푸코 같은 이론가들이 권력과 주체화에 관해 말할 때 염두에 둔 것을 밝혀냈다고 느꼈다. 권력은 두 가지 차원, 즉 소통과 에너지를 갖는다. 푸코와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다른 이론가들은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들의 형성을 통해서 소통이 권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탐구했다. 루크레티우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소통은 엔트로피가 감소되거나 거부되는 메커니즘들에 속하는 한 메커니즘이다. 내가 한 낱말을 잘못 발음하고 누군가가 조롱하며 내 말을 교정한다. 그것은 소통이다. 한 아이가 제멋대로 행동하고 잔인한 부모가 그의 뒷머리를 후려친다. 그것은 정체성을 형성하고 표준화하는 소통이다. 이 이론가들 대부분이 매우 자세히 탐구한 적이 결코 없는 것은 이런 과정들을 불러일으키는 데 에너지가 담당하는 역할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를, 프로이트는 리비도에 대한 더 성긴 표현들을, 베르그송은 엘랑 비탈을,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제시했듯이 그런 것을 암시했던 이론가들도 있었지만,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적 관계들을 구성하는 데 에너지가 담당하는 역할을 대체로 거의 탐구되지 않았다.

 

비판 이론 또는 해방적 정치 이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회적 조립체가 자체의 질서화 과정들을 유지하기 위해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참이라면, 시위, 이데올로기와 거짓 믿음들의 폭로, 설득 그리고 의식 고양만으로는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량과 연료 형태의 에너지는 인간들이 갇혀 있는 거미줄과 같다. 권력은 부분적으로 앞에서 언급한 아이의 구타 같은 교정적인 소통적 제재 행위를 통해서도,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믿음을 통해서도 작동할 뿐 아니라, 노동 시간이 조직되는 방식, 우리의 육체와 정신이 활발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작업량(피로는 실재적인 정치적 쟁점이다) 그리고 우리 삶을 영위하기 위한 다양한 연료에 대한 의존성을 통해서도 작동한다. 노동 일수를 줄이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마르크스는 이 점을 명백히 이해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임노동에 의해 어떻게 착취당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해방의 일부는 사람들의 자유 시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 자유 시간은 열량을 자유롭게 노동 외의 조작들을 수행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것에 놓여 있다. 비판적 주체는 사회적 조건을 성찰하고 분석하며, 그리고 다른 가능한 사회적 조립체들을 상상하는 데 충분한 여가 시간―충분한 열량―이 있는 주체이다. 그리고 물론,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열량과 연료의 대사는 환경에 쓰레기도 배출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루크레티우스는 주장했는데, 그것은 사회가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야기한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의 경우에, 엔트로피 감소 조작들의 세 번째 조건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무에서 생겨나지 않으며, 존재자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그것들 사이에 실재적, 물리적 또는 물질적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는 그의 자연주의적 원리에 대해 성찰하면서 루크레티우스는 소통과 지각의 문제들로 당황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그는, 자신은 이쪽에 있고 탁자는 저쪽에 있을 때, 방 건너편 저쪽에 놓인 탁자를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의하스럽게 여겼다. 여기서 루크레티우스는 특별한 테제 하나를 제시했다. 오감은 모두 촉각이라고 그는 말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그가 적었듯이,

 

...이제 그대에게 말하기를 시작하겠노라, 저것들과 긴박하게

연관된 것을, 우리가 사물들의 영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존재함을.

그것은 사물들의 몸 표면에서 벗겨진 막같이,

공기 중에 저쪽으로 이쪽으로 날아다니며...

 

그러므로 나는 말하노라, 사물들의 영상과 섬세한 형상은

사물들로부터, 그것들의 몸체 표면에서 발산된다고.

그것을 우리는 다음 것으로부터 알 수 있다, 아무리 둔한 가슴을 가진 자라 해도.

먼저, 지각 가능한 사물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몸체들을 내보내기 때문이다, 일부는 느슨하게 흩어진 채로,

마치 나무가 연기를, 불이 열기를 내보내듯,

또 일부는 좀 더 짜임새 있고 치밀한 것을, 가령 이따금

여름에 매미들이 매끈한 투니카를 벗어 놓을 때처럼,

그리고 송아지들이 태어나면서 몸 표면에서

막을 떨어낼 때처럼, 또 마찬가지로 미끌미끌한 뱀이

가시에 옷을 벗어버릴 때처럼. 왜냐하면 자주 우리는 보니 말이다,

가시덤불들이 저 뱀들에게서 날아온 전리품들로 더 불어나 있는 것을.

이런 일들이 일어나므로, 얇은 상도 사물들에 의해

그 사물의 몸 표면에서 내보내져야 한다. (273-5)

 

그에 선행하는 철학적 전통은 시각, 반사성, 시야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기를 외설적으로 바라는 눈길을 끄는 응시라는 감각에 특권을 부여한 반면에, 루크레티우스는 촉각, 즉 현저하게 유물론적인 감각에 특권을 부여한다. 우리들은 접촉을 통해서 감지하고 소통할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것으로 그는 무엇을 의도했는가? 나는 그가 저쪽에 놓인 탁자를 보기 위해서는 영상이 공기를 가로질러 탁자와 나 사이를 날아가 내 눈에 닿아서 내 육체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을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사람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소리 파동이 공기를 가로질러 전파하여 내 귀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무언가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는 공기에 퍼져 내 코를 때리는 입자들이 존재해야 한다. 바로 이 순간에 모든 종류들의 라디오파 또는 전자기파들이 우리 주변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든 종류들의 다른 영상들도 진공을 가로질러 여행하고 있다고 루크레티우스는 주장했다. 소통, 상호작용 그리고 지각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육체를 건드리는 이런 유령 같은 물질들을 통해 일어난다.

 

내 친구 루크레티우스는 이 가설이 사회 사상과 정치 사상에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는, 소통의 내용 또는 의미에 집중하는 반면에 소통의 물질 또는 허공을 여행하는 이 유령 같은 영상들을 무시하는 점에 대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책망하는 것에 결코 지치지 않았다. 그는 인문학자들은 마법을 믿고 있다고 조롱조로 말하곤 했다. 이것은 그들이 어떤 관념을 기록하는 것, 비판을 수행하는 것,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는 점을 의미했다. 그들에게 소통은 단순히 무언가에 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무언가에 대한 지각도 아니며, 무언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는 이것에 반대했다. 탁자에 대한 내 지각은 탁자 자체가 아니라, 공기를 가로질러 여행하는 반사된 빛이다. 발언은 의미일 뿐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여행하는 소리 파동 또는 글로 쓰여진 텍스트이다.

 

그의 동료들이 많이 경악하게도, 이 테제 덕분에 그는 밈 이론가들뿐 아니라 통신을 전달하는 매체가 메시지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강조한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월터 옹(Walter ong) 그리고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에게도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매클루언이 전염병학의 모형에 의거하여 소통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때, 그는 통신이 전 세계에 걸쳐 여행하며 상황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서로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이런 영상들이 이 존재자와 저 존재자 사이에 여행해야만 한다는 것이 참이라면, 시간이 모든 소통의 요소라고 강조했다. 지금 내가 내 손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나는 현재의 모습이 아니라 약간 과거의 모습대로 그것을 보고 있는 까닭은 빛이 내 손에서 반사되어 허공을 가로질러 여행하여 내 눈과 상호작용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시각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빨리 볼 수 없다. 그 결과, 나는 결코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공간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통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이것은 훨씬 더 그렇다. 그러므로 메시지의 지속성의 상이한 정도(글로 쓰여진 메시지는 말로 전달되는 메시지보다 더 오래 지속할 수 있다)와 그것이 지리적 거리를 가로질러 사람들을 조정하기 위해 여행할 수 있는 속도 때문에 통신을 전달하는 매체―연설 또는 소리 파동, 글, 통신위성, 전화선 등―는 사회적 관계들의 형식과 규모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터넷과 위성통신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의 전지구적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통신이 기관들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데에도 걸리는 시간이 있다. 예를 들면, 여권 발급 요청을 처리하는 관료 기구의 시간은 서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시간과 전적으로 다르다. 이런 소통 시간은 모든 종류들의 방식으로 삶과 사회적 관계들을 조직한다.

 

최소한 갈릴레오, 다윈,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그리고 하이젠베르크만큼이나 우리 문화에 영향을 미친 클로드 섀넌의 정보 이론에 다시 한 번 의존하여 루크레티우스는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에 소통은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채널은 메시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하는 매체를 가리킨다. 지금 당장 모든 종류들의 라디오파 또는 전자기파들이 통과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수신할 적절한 채널이 없기 때문에 이 메시지들을 수신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수신하기 위해서는 라디오를 켜야 한다. 라디오는 이런 전자기파들을 공간을 가로질러 여행하여 우리 귀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소리 파동으로 변환시킨다. 외부 우주에는 공기가 없기 떄문에 이런 변환이 일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상이한 빛 파장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른 파장들을 지각할 채널들이 없기 때문에 삼원색만을 볼 수 있는 반면에, 갯가재는 12가지 원색과 적외선, 자외선 그리고 편광을 볼 수 있다. 채널과 정보 이론에 대한 이런 성찰 덕분에 루크레티우스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을 책망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그들이 변화시키고자 바라는 청중이 그들의 비판을 들을 수 있는 채널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그런 비판을 전개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청중이 정치 이론가들의 많은 메시지들을 아무 의미도 없는 소음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더 나쁘게도, 자외선 빛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완전히 들을 수 없다는 점을 우려했다.

 

고인이 된 내 친구의 작업에 관해 성찰할 때 나는 그가 처음에는 정치적 문제들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준 그의 작업으로 두 가지 것들을 달성하기를 원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나는, 우리가 해방의 이름으로 더 나은, 더 효과적인 전략적 개입책들을 고안할 수 있도록 그가 권력의 작동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 권력의 분석학에 각도를 맞추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기후 변화에 대한 우려 때문에 그는 우리가 더 넓은 자연적 세계에 생태학적으로 묻어들어가 있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는 정치적 이론이 대체로 인간과 자연의 관련성을 보지 못하다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비판 이론가, 해체주의자, 기호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민족지학자들의 발견 결과들을 보존하기를 원하는 한편, 생태 문제들에도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했다. 그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엘리자베스 워렌에게 헌정한 까닭은 그녀가 강력한 세력조차도 엔트로피의 지배을 받으며 올바른 환경에서는 꼬꾸라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 책을 제임스 한센에게 헌정한 까닭은 부시 행정부의 경우에서처럼 여러분이 설득하고 싶은 사람들의 언어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과 채널 그리고 수사법의 중요성을 그에게 환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