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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배것: 오늘의 에세이-증거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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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6. 30.

 

증거 위기

The evidence crisis

 

―― 짐 배것(Jim Baggott)

 

[...]

위기는 다양한 형태를 띤다. 나는 수학자들이 확실성의 상실과 '확신의 종말'을 나타내는 컴퓨터에 의거하는 증명들에 점점 더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런 증명들을 평가하는 유일한 방법을 곧 제공할 컴퓨터 기반 알고리듬들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인데, 그것은 그 과정에서 수학자들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궁금하게 만든다.

 

마찬가지로 인간들과 그들의 편견 및 자기비판의 결여를 제거하는 것이 생명의료과학의 증거 위기에 대한 작동 가능한 유일한 해결책인 듯 보인다. 이것은 2005년에 [...] 존 P. 이오안니디스(John P. Ioannidis)가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 결과들은 허위이다'라고 선언한 것으로 유명한 분야이다. 이것은 정말 섬뜩해지는 것이었다. 문제가 되는 연구 결과들은 궁극적으로 신약의 임상 실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나는 다른 한 유형의 증거 위기에 대한 초청 강연을 제안받았다. 2013년에 나는 <<실재여 잘 있거라(Farewell to Reality)>>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은 물리적 우주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빅 퀘스천'을 다루는 그런 종류의 현대 이론물리학과 관련된 지배적인 견해들 가운데 일부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 책에서 나는 일부 이론가들이 선을 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거대한 망상', 즉 과학적 증거에 전혀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수학만을 사용하여 물리적 실재를 서술할 수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다.

[...]

 

그래서 문제는 무엇인가?

 

시간을 뒤로 돌리자. 2012년 7월 4일에 나는 제네바 근처 CERN 연구소에서 전송되는 생중계 화면을 시청하며 힉스 보손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입자가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발표를 축하했다.

 

이것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이라고 불리는 한 이론적 구성물의 승리였다. 표준 모형은 기본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힘들의 층위에 있어서 물리적 실재를 서술하며 물질적 실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이론이다.

 

그런데 힉스 보손의 발견에 대한 우리의 기쁨은 우려 때문에 경감되었다. 우리는 표준 모형이 전체 이야기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본 입자 질량들과 암흑 물질의 본성처럼 그것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만물 이론'이 아닌데, 그것은 중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 주변의 물리적 우주에 대한 관찰과 측정에 기반을 둔 경험적 데이터를 서술하고 희망컨대 설명하고자 시도하면서 우리는 과학적 이론들을 구성한다. 그런데 이십일 세기에 우리는 주요한 걸림돌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 이론들이 부적절하다고 말해주는 증거가 있다. 그런데 우리 이론들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지에 관해 유의미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데이터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론가들은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물 이론'을 개발하고자 하는 얼토당토않은 큰 야망을 품은 일부 이론가들은 자신이 되돌아올 방법을 대해 아무런 실제적 관심도 없이 선을 넘어버렸다. 그 결과로서 무엇보다도 초끈, 숨은 차원들 그리고 '다중우주'를 동원하는 이론들은 경험적 증거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고 아무런 실제적 예측도 제시하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것들은 시험할 수 없다. 거의 틀림없이, 그것들은 과학이 아니다.

 

예전에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경고했다. "거듭해서 이해에 대한 열정은 인간이 아무런 경험적 토대도 없이 순수한 사유에 의해―요약하면, 형이상학에 의해―합리적으로 객관적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는 환상으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전적으로 단순하게도, 아무 증거도 없다면, 또는 최소한 증거가 나타날 것이라는 아무 약속도 없다면 과학은 전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실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문제의 근원이 '실재'라는 낱말을 해석하려고 하는 방식에 놓여 있다고 믿고 있다. 무엇이든 철학서를 집어서 살펴 보면, '형이상학'이라는 표제어 아래 전개되는 실재에 대한 논의를 발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물리적 실재는 사실상 꽤 명백하고 논리적인 듯 보인다. 매일 아침 깨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대면한다. 확실히, 철학자들이 어떻게 말하든 간에,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을 때에도 실재는 계속 존재하다고 꽤 확신할 수 있다. 예전에 과학소설 작가 필립 K. 딕(Philip K. Dick)이 이렇게 선언했다. "실재는 당신이 그것의 존재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실재는 흥미롭게도 정신분열증적인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거나 측정하는 대로의 사물들의 '경험적 실재(empirical reality)'가 존재한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다루려고 시도하는 실재이다. 과학의 목적은 과학적 이론의 예측과 관찰 및 측정 결과 사이의 대응 관계를 확립함으로써 합리적 설명과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경험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대응 관계가 이론이 '참'일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여기 일례가 있다. 1964년에 피터 힉스(Peter Higgs), 프랑수아 앵글레(Francois Englert) 그리고 로버트 브라우트(Robert Brout)는 기본 입자들에 질량을 부여하는 원인이 되는 한 특수한 종류의 양자장―힉스 장으로 알려지게 된다―이 존재해야 한다고 추측했다. 1967년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이 장을 사용하여 '무거운 광자'로 간주할 수 있는, W 보손과 Z 보손으로 불리는 몇몇 기묘한 입자들의 질량들을 예측했다. 이 입자들은 1983년에 CERN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의 질량들은 사실상 와인버그가 예측했던 값들이었다. 그 결과, 힉스 장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W 입자와 Z 입자의 질량들에 대한 다른 가능한 설명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힉스 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모든 것을 밝혀주는 장 양자―힉스 보손―를 산출해야 한다. 2012년에 CERN에서 생산된 경험적 데이터와 힉스 보손의 거동에 대한 이론적 예측 사이에 상관 관계를 확립한 것이 힉스 장이 실제로 존재하며 표준 모형이 자체의 응용 가능성 범위 내에서 '참'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우리는 이런 경험적 실재 아래에 놓여 있는 것이 물자체의 독립적 실재, 즉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들의 실재―이어야 한다고 주저하지 않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독립적 실재는 전적으로 형이상학적이다. 정의상 당연히 우리는 관찰 또는 측정에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재를 관찰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예전에 하이젠베르크가 말했듯이, "우리가 관찰하는 것은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심문 방법에 노출된 자연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철학자들이 다루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독립적 실재인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의 사변이 '형이상학'이라는 표제어 아래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철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독립적 실재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관찰 및 측정의 경험적 세계 사이의 대응 관계를 확립하기 위한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해석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조직되어 있으며 정합적이라면 만족할 것이다. 여기에 미묘하게 다른 종류의 진실이 존재한다.

 

선을 넘어가기

 

현대의 이론가들은 자신이 어떤 속박에 묶여 있음을 깨닫는다. 이론 전개의 지침이 되는 경험적 데이터로부터의 그 어떤 실마리도 없으면서 인간 실존과 관련된 '빅 퀘스천'에 대한 해답들을 항상 열망하는 이론가들은 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선을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과 관련하여 잘못된 점은 전혀 없다. 수백 년 동안 이론가들은 이렇게 해왔다. 그런데 그들은, 철학자라기보다 과학자로서, 가능한 한 빠르게 그 선을 다시 넘어올 목표를 지닌 채 물자체의 독립적 실재의 본성에 대해 추측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은 거의 틀림없이 시간과 공간의 본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힘들게 그 선을 다시 넘어와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런 해석이 관찰과 측정의 경험적 실재 속에서 어떻게 현시될 것인지 보여주었다. 나중 이야기는 알고 있는 그대로다.

 

현대의 이론가들은 더 이상 돌아올 길을 찾아내려고 노력하지 않을 뿐이다. 더 나쁘게도, 그들은 거의 되돌아갈 수 없는 가정들로 가득차고 매우 복잡하며 정교한 구조를 만들었다.

 

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학적으로 정의된 독립적 실재의 형이상학적 풍경을 탐사함에 따라 이론가들은 '발견'이라는 낱말을 잘못 전용하고 남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본 입자들이 끈 또는 막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상이한 입자 유형들 사이에 초대칭성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이론이 매우 작은 공간으로 압착되어야 하는 연유로 우리가 결코 체험할 수 없는 여섯 가지 여분의 공간적 차원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들은 초끈 이론의 다섯 가지 상이한 유형들이 'M-이론'ㅡ으로 불리는 포괄적인 구조에 포섭되어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 다음에, 그들은 여분의 차원들을 압착하는 10^500개의 상이한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했"기 때문에 이것들 각각은 가능한 것들의 다중우주 속에서 한 상이한 유형의 우주를 서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 우주가 10^500개의 상이한 유형들의 풍경 속에서 우리 실존에 부합되는 소수의 우주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 우주는 지금 모습대로 존재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나는 최소한 과학적 발견이라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발견이 아니다라는 점을 명확히 하기를 원한다. 그것들은 수학에서 논리적으로 비롯되는 가정 또는 결과이지만, 그것들에 대한 그 어떤 경험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론이 무엇이든 시험할 수 있는 예측을 제시하려고 애쓰는 것은 실제로 매우 놀랍지 않다. 여기서 경험적 실재로 돌아갈 길이 없을 뿐이다.

 

모든 추상적 수학, 한 종류의 수학적 서술을 다른 한 종류의 수학적 서술에 연결시키는 모든 '이중성'에 눈이 멀지 말자. 이것들은 X=Y라는 종류의 '정합적 진리'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X도 Y도 관찰 또는 측정 가능성을 암시하는 경험적 세계 속의 어느 것에도 대응하지 않을 때, 이 모든 것은 여전히 확고하게 형이상적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있다.

 

경종

 

우리는 문제가 하나 있다. 이론가들은 잘못된 쪽에 고착되어 있으며, 그리고 대부분은 실행 가능한 대안이 없다고 믿고 있다. 얼마 전에 노벨상 수상자 스티븐 와인버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끈 이론은 여전히 더 노력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충분히 유망한 듯 보입니다. 입수 가능한 더 유망한 대안이 존재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런 대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포커 게임이 부정한 듯 보이기 때문에 그 게임에 들어가지 마라는 경고를 받고 있는 도박사의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는데, 그것이 마을에서 벌어지는 유일한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명백히 우리는 공감한다. 그런데,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 대신에 아무튼 규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도박을 받아들일 만한 여가로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이비과학으로 낙인이 찍히고 비난받기를 좋아하는 과학자는 아무도 없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론물리학 공동체의 일부는 과학 자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최근에 끈 이론가로 변신한 철학자 리처드 다위드(Richard Dawid)는 이렇게 주장했다. "최종 이론 주장은 이론 교대 대신에 이론 내부의 진보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과학적 과정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도입한다... 그저 이론적으로 입증된 이론의 지위는 경험적으로 잘 시험된 이론의 지위와 항상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제시되는 논증을 고려하여, 이런 지위 차이는 넓은 견고한 간극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적 논증들의 연결망의 질에 의존하여 줄일 수 있는 가변적인 너비의 간극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것과 관련된 문제는, '이론 내부의 진보'라는 관념과 '이론적으로 입증돈 이론'이라는 관념을 수용하자마자 우리는 그 어떤 의미의 실제적인 과학적 진보로부터도 완전히 단절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증거에 대한 존중을 상실하고, 위기를 심화시키고, 경험적 실재로부터 단절되며, 여러 세대―얼마나 많이? 한 세대? 두 세대?―의 이론가들에게 이것이 전부 괜찮다고, 즉 이것이 우리의 탈경험적 현대 시대에 들어맞는 과학이라고 믿도록 훈련시킬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도박 중독증을 물려받는 것을 확실하게 한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이런 이론가들을 '잃어버린 세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활동적인 고에너지 이론가들의 총수를 추정하기는 쉽다. 매일 대략 30편의 새로운 논문들이 온라인으로 게시된다. 평균적으로 활동적인 이론가가 매년 3-4편의 논문을 발표한다고 가정하면, 2500에서 3000명의 이론가들을 얻게 된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는 나이가 30대 또는 40대 초인 젊은 이론가들이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경력 동안 초대칭성 기반 현상론 또는 끈 이론이 아닌 그 어떤 쟁점에 관해서도 결코 연구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가 대면하는 이 두 영역에서의 위기(또는 최소한 거대한 의문부호)를 감안하면, 그 공동체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듯 보인다. 일반적으로 미래 연구 방향에 대해 불확실한 그런 시대들은 경력의 절정기에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넓은 기회를 제공한다. 이런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는 어떤 재정향과 재교육이 명백히 필요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미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더 최근의 평가에서 다위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기초 이론들이 (대개) 합당한 시간 내에 경험적으로 시험받을 수 있었고, 그리고 때가 되면 명쾌한 경험적 평결이 어떤 이론의 가능성에 대한 모든 지루한 이론적 고찰을 부적절하게 만들었던 물리학의 옛 황금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지만 경험 과학은 그것이 실제로 접하는 상황에 응대하여 최선을 다해야 한다. 기초물리학의 현 상황에 대한 냉정한 응시는 이론 평가의 옛 패러다임이 자체 능력의 대부분을 상실했으며 새로운 전략들이 이미 도입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게다가, 과학자들은 대중 과학에 대한 전례 없는 기호를 개발한 대중을 돌볼 의무가 있다. 이것은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A Brief History of Time)>>의 성공 덕분에 크게 향상되었고 몇몇 뛰어난 과학 저술, 특히 [브라이언] 그린의 저술로 육성된 기호이다.

 

연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우주를 서술하고 이해하는 데 사용하는 이론들에 관해 무작위로 선택된 일단의 과학적 교양을 갖춘 독자들에게 묻는다면 이 독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초끈, 숨은 차원 그리고 다중우주와 관련된 것을 말할 가능성이 클 것이라고 거의 확실하게 추측한다.

 

사실상 오늘날 이런 이론들은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고 우리 이해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데, 이것은 형이상학이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론들은, 힉스 보손을 찾기 위해 CERN에서 사용된 그런 종류의 이론, 즉 세계를 서술하는 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제시되어 시험받은 과학적 이론의 수용된 조직체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는다. 노벨상 수상자 티니 펠트만(Tini Veltman)이 볼프강 파울리의 표현을 빌려서 이런 이론들은 '틀렸다는 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대중 과학의 독자들은 그저 현대 이론물리학에서 비롯된 가장 최근의 '와우!' 계시들을 향유하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런데 확실히 그들도 이런 이론들의 과학적 지위에 관한 진실을 알 자격이 있다. 나는 덴마크 과학사가 엘지 크라프(Helge Kragh)가 존 배로(John Barrow)와 프랭크 티플러(Frank Tipler)의 <<인류지향적인 우주론적 원리(Anthropic Cosmological Principle)>>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을 때 그는 핵심을 바로 찔렀다고 생각한다.

 

"수백 건의 참고문헌과 과학의 권위라는 외피를 두르고서 배로와 티플러는 자신들의 저작 일부에서 현대 과학의 사회적 및 영성적 결과들의 멋이 있지만 의문스러운 신비주의에 기여한다. 휠러, 세이건 그리고 다이슨 같은 저자들에 의해서도 계발된 이런 종류의 도피주의적 물리학은 과학 시대에 인간의 종교적 본능에 호소한다. 그것의 장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무비판적으로 또는 옹호자들의 과학적 뛰어남 때문에 수용되어서는 안된다." 아멘.

 

결어

 

나는 현대 이론물리학의 길을 잃어버렸다고 믿는다. 그것은 자체의 조그마한 자기지시적 세계로 후퇴해버렸다. 최종적인 '만물 이론'을 탐색하면서 이론가들은 추측해야 했고, 물리학에서 형이상학으로 선을 넘어갔다. 틀림없이 처음에 이것은 최선의 의도로 실행되었는데, 목적은 경험적 시험을 제시할,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과 관련된 어떤 새로운 통찰을 지닌 채 그 선을 넘어 되돌아오는 것이었다. 그 대신에 이론가들은 빠져나갈 수 없는 형이상학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어떤 실제적 해악이 존재하는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과학적 기획의 본성에 지속적인 해악을 끼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으로 입증된 이론'에 기반을 둔 '증거'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미끄러운 경사인데, 그것은 과학의 기초 자체의 기반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동화 같은 물리학의 지위는 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잘못 알려져버렸다.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고, 그래서 일시적으로 중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