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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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휴네먼: 오늘의 에세이-물질에 대한 장애물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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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25.

 

물질에 대한 장애물 이론

The Obstaclean Theory of Matter

 

―― 찰리 휴네먼(Charlie Huenemann)

 

물질적 세계의 현존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논증이 아무리 영리하고 설득력이 있더라도, 우리 대부분은 물질은 존재한다고 단언하기를 원하며, 그리고 우리의 단언이 더 강력해짐에 따라, 마치 그것이 대화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것처럼 우리는 탁자를 두들리기 시작한다.

 

여러 해 동안 거듭해서 나는 조지 버컬리(George Berkeley)의 논증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관념론을 납득시키려고 시도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언제나 체험하는 모든 것은 세계에 대한 시각들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여러분은 그 어떤 시각에도 무관하게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관련하여 어떤 관념을 품을 수 있습니까? 물론 아무 관념도 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외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시각들을 믿으면 그뿐이지 않겠습니까?" 소용이 없다. 그들은 납득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더 그리스-독일적인 방법도 시도했다. "아시다시피, 우리가 주변의 물리적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결국 더욱더 수학적 구조와 관계들로 세계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계를 일단의 수학적 구조들로 간주하고, 그래서 그런 구조들을 예화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물질'은 잊는 것이 어떻습니까?" 또 다시 멍하게 쳐다보았다(그것은 내가 "예화하다"라는 낱말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 대부분은 물질적 세계의 실재성을 가정할 필요를 깊이 느낀다. 사실상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그것을 제외하고자 하는 관념을 비웃는다. "길을 건널 때 행운이 있기를." 자칭 관념론자에게 충고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동차는 당신의 철학을 공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궁금하다. 이런 심원한 필요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리 입장에서 그런 헌신을 획득하는 데 "물질"이라는 관념은 무엇을 하는가?

 

그것에 관해 더 많이 생각할수록 나는 물질에 대한 "장애물" 이론에 더욱더 끌린다. 그 이론을 가능한 한 단순히 서술하면, 물질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다. 물질적 객체는 순수하고 단순한 장애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것을 원할 것이고, 그래서 어떤 계획에 착수하지만, 그 다음에 꽝! 무언가가 우리를 방해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그리고 우리는 확실히 그것을 원치 않았다. 그것은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물질이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의 정체이다. 물질은 우리를 방해하는 빌어먹을 것이다.

 

그래도 앞에서 언급한 관념론자는 방해물을 "관념일 뿐"이라고 해소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버컬리는 방해물이라는 관념을 우리 삶에 보내고자 결정한 것은 신의 적극적인 정신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내 이론에 따르면, 버컬리가 이 주장을 제기하자마자, 그는 물질을 자신의 철학에 다시 도입해버렸다. 그는 장애물은 여전히 또 하나의 관념일 뿐이라고 단언할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고려하지 않는 어떤 독립적인 원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것을 물질적 객체로서 특징짓는 "독립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버컬리는 관념적 본성을 주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에 대한 방해물이라면, 그것은 물질적이다.

 

여기서는 부가적인 것이 나타날지라도 플라톤 같은 다른 관념론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실재는  순전히 수학적인 구조라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는 무엇이든 어떤 객체가 다른 한 객체에 대해 방해물이 되는 순전히 수학적인 이유는 없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그래도, 일단 "방해물 특성"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모형화할 수 있다. 그런데 우선 방해물이 생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방해물은 외면할 수 없는 우연적인 사물―그것은 거의 또는 아무 이유도 없이 튀어나온다―이고, 그런 점이 그것을 순전히 수학적인 형이상학에게 생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부가적인 것은 물질의 외면할 수 없는 우연성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유물론을 대단히 선호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요소이다. 삶의 가장 냉정한 교훈은 어떤 사건들은 대단히 외면할 수 없는 우연적인 방식으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건들, 비극적으로 늦은 도착이나 이른 도착들 그리고 파국적인 최악의 상황들이 존재하며,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전적으로 무관심하게 우리 삶을 박살낸다. 성장한다는 것은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성숙한 형이상학이라면 무엇이든 그런 완전한 무관심을 고려하여 그것을 중대한 실재적인 것, 즉 물질적 객체, 또는 법률가가 "물질적 원인" 아니면 합법적인 항의에 대한 근거라고 부를 것으로 변환시킨다.

 

방해물 이론에 따르면, 물질적이라는 것은 그 어떤 "자체적인" 성질이나 특징이 아니라 한 사물이 우리 설명에서 담당하는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무언가가 우리 삶에서 외면할 수 없는 우연성의 힘을 나타낼 때, 그런 점이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것이 방해물 이론의 미덕인데, 누구나 만족하도록 "물질 자체"를 실제로 서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철학자들은 그것을 특성 또는 형상을 갖거나, 아니면 형상을 예화하는 근본적인 "질료"로서 규정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변의 양의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음의 공간을 규정하려고 시도하는 로르샤흐 테스트 종류의 정의이다. 우리 자신의 설계에 독립적인 무언가가 저쪽에 존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음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사물들이 그러해야만 하는 대로 나타나지 않는 까닭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결국 물질은 악의 문제에 대한 무신론자의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