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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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아나키즘, 공산주의 그리고 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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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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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기독교도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참이지만,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는 역사적으로 무신론과 결부되었다. 왜 이러한가? 이것은 어떤 우연적 관계인가? 그래서 무신론은 이런 정치적 기획들에서 안전하게 단절될 수 있는가? 아니면 아나키즘과 공산주의라는 바로 그 개념과 관련하여 무신론을 수반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가? 물론 역사적 현실이 존재한다. 이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교회는 국가의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것은 어떤 형식의 자본주의와 군주의 권위주의적 권력을 옹호했다. 사실상 좌파의 정치적 투쟁은 오랫동안 교회와 싸워야 했는데[...], 그것은 대체로 교회가 해방 투쟁이 아니라 억압적 권력 편에 섰기 때문이다. [...]

 

이런 역사를 감안하면, 아나키즘 사상과 공산주의 사상이 지금까지 왜 종교를 의심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것은 우연적인 "역사적" 관계일 뿐이고, 그래서 국가를 지지하는 받침대로서 작동하지 않은 좋은 종교가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인가? [...]

 

그것은 그렇다치고, 나는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의 경우에 종교(그리고 특히 일신론적 종교)를 향한 적대감은 단순히 교회와 국가 사이의 우연적인 역사적 관계와 관련되어 있지 않다고 추측한다. 대단히 잠정적이고 발견법적인 정의로서 아나키즘은 군주, 대장 또는 대표자 같은 매개자들이 없이 이루어지는 다중에 의한 지배라는 개념이라고 생각하자. 비슷하게, 공산주의는 부분적으로 "보통 사람들" 또는 인민들에 의한 통치인데, 그래서 정부와 경제 둘 다 다중에 의해 조절된다. 다시 말해서, 두 가지 정치적 정향은 모두 아버지, 대장, 군주 또는 대표자가 정점에 위치하고 인민들은 그 주권자에 복종해야 하는 특수한 주권 모형을 겨냥한다.

 

이 모형―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권력의 도표"라고 부르곤 했다―은 유신론과 가부장제 둘 다의 구조이다[...]. 그렇다면 테제는, 유신론적 종교성을 극복하는 것은 단순히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우연적인 또는 이차적인 기획이 아니라, 이런 정치적 기획들의 핵심에 놓여 있다는 것일 것인데, 이런 구조들은 인간의 사유와 사회적 관계들을 특징짓는 권력의 도표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부장제적/유신론적 구조가 뒤집힐 때까지 다중에 의한 지배는 불가능할 것인데, 미시 파시즘/오이디푸스가 항상 뒷문으로 살그머니 들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아나키즘과 공산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초월적 권위를 전제로 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모형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은 이런 유신론적 구조들을 통해서 작동하는 것을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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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