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스티븐 샤비로: 오늘의 에세이-자연에 관한 스물두 가지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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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9.

 

자연에 관한 스물두 가지 테제

Twenty-two theses on nature

 

――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1.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이항 대립의 한 쪽으로 간주할 수 없다. 세계를 포괄하는 컴퓨터 및 통신 연결망과 빅 데이터는 말할 것도 없고, 인류가 유발한 지구 온난화와 유전자 변형 유기체의 시대에 자연을 문화에 대립시키는 것, 또는 "자연 상태"를 인간 사회에 대립시키는 것, 또는 자연적인 것을 인공적인 것에 대립시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인간들과 그들의 생산물들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다른 모든 것과 꼭 마찬가지로, 또는 약간 덜 "자연적"이다.

 

2. 우리는 그 어떤 인류중심주의도 남기지 않은 채, 즉 우리 자신을 자연에서 빼놓지 않은 채, 그리고 또한 자연을 우리의 형상대로 재구성하지 않은 채로 자연을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은 인간적이지 않으며 인간 또는 그 어떤 인간적인 것에도 집중하지 않는다.

 

3. 무엇보다도 우리는 자연이 그저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항상 동일하다―역사적이고 구성되는 사회적 영역에 대립되는 것으로서―고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자연 자체가 항상 운동 중이고 과정적이며 구성되고 있다고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다윈, 월리스 등에 의해 실천된 자연사(natural history)라는 위대한 분과학문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다. 진화(계통발생)과 발달(개체발생)은 둘 다 역사적 과정인데, 그것들은 공시적 구조로서의 유전체에 대한 연구로 환원될 수 없다.

 

4. 자연은 포괄적이지만, 하나의 전체는 아니다. 우주 공간에서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우리는 가장자리 또는 경계를 결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을 합쳐서 하나의 고정된 총합으로서의 자연을 고안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자연을 어떤 만물 이론에 종식시킬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

 

5. 자연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 대해서 본원적으로 열려 있다. 미래는 항상 우연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 미래는 그 어떤 개연적인 것들의 계산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케인즈와 메이야수가 둘 다 보여주었듯이, 미래는 본질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 어떤 개연적인 것들의 닫힌 목록도 넘어서는 것이다. 자연의 본원적인 불가지성은 인식론적 제약이 아닌데, 그것은 자연 자체의 기본적이고 긍정적인 존재론적 특징이다.

 

6. 19세기에는 셸링(자연철학으로)과 엥겔스(자연의 변증법으로)처럼 상이한 사상가들이 인간의 발전과 관심사를 포함하는―그러나 그것들로 환원될 수 없는―자연의 총체적 "논리"를 규정하려고 노력했다. 20세기에는 그런 기획들이 폐기되었다. 그 대신에 인류는 어떤 특수한 초월적 지위를 부여받거나(현상학), 아니면 자체의 비유기적인 전제들로 환원되었다(과학주의). 오늘날 21세기에서는 이런 두 대안이 모두 붕괴되었다. 우리는 자연을 직접 사유하는 기획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는데, 셸링과 엥겔스 같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시도를 위해 사용한 특수한 낡은 술어들을 거부하더라도 말이다.

 

7. 셸링과 엥겔스는 둘 다 당대 최선의 자연과학에 기반을 두지만 환원시킬 수는 없는 방식들로 자연을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우리의 과업은 마찬가지로 최선의 현대 과학에 기반을 두지만 환원시킬 수는 없는 방식으로 자연을 생각하는 것이다.

 

8. 자연은 충만한 것도 아니고 텅 빈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연 내에서의 조건 또는 사태들이 충만함 또는 공허를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대개 이런 경향적 극단들 가운데 어느 것에도 도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물들은 충만함과 공허 사이의 중간 영역에서 수시로 변한다.

 

9. 그런데, 자연은 무가 아니라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더 안전한 기반 위에 존재한다. 현대물리학으로부터 우리는 진공에서도 양자 요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자연은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의 견지에서, 즉 결여가 아니라 과잉의 견지에서 더 잘 이해된다. 자연은 결코 완결되지 않을 것이고, 결코 최종적으로 형성되며 구성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연은 결코 "아무 형상도 공허도 없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10. 자연은 아무 형상도 없지 않으며, 결코 균일하지도 않다.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에 의해 규정된 의미에서 자연은 오히려 준안정적(metastable)이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연은 잠재력과 역능들, 즉 에너지 구배와 내재적 경향들이 가로지른다. 어느 순간에 이것들은 활성화되어 현실화될 수 있다. 가장 사소한 불균형, 또는 가장 순식간의 만남이 사물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충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원인보다 결과에 더 많이 관련되어 있다. 이런 불균형과 만남들의 결과들은 그것들을 촉발하는 사건들보다 크기가 훨씬 더 큰 경향이 있다.

 

11. 자연의 준안정성의 어떤 붕괴의 결과는 시몽동이 개체화(individuation)라고 부르는 것― 자체의 관련 환경의 출현과 구조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어떤 개체의 출현과 구조화―이다. 이런 과정의 사례들에는 용액으로부터의 결정 석출과 최초의 미분화된 배아로부터 별개의 조직, 기관 그리고 부위들의 출현과 성장이 있다.

 

12. 그러므로 자연은 다양한 개체화 과정들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모두 두 가지 별개의 방식으로, 즉 에너지의 견지에서, 그리고 정보의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3. 자연은 끊임없는 에너지의 흐름들을 포함한다. 에너지(또는 더 정확하게 질량-에너지)는 결코 창출되거나 파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상태에서 다른 한 상태로 변환될 수 있을 뿐이다(열역학 제1법칙). 그리고 또한 이것은, 에너지가 구배를 줄이면서 끊임없이 소비되거나 소산되고 있으며, 그래서 엔트로피가 극대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열역학 제2법칙). 에릭 슈나이더(Eric Schbneider)가 주장하듯이, 복잡한 조직적 체계들이 형성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그것들이 그렇지 않을 때 가능한 것보다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더 방대한 규모에서 소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소산 체계"는 본질적으로 음의 엔트로피 체계인데, 바로 이것 덕분에 그런 체계가 자체의 환경에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방출함으로써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전체 에너지 구배를 감소시킬 수 있다.

 

14. 오늘날 컴퓨팅 기술 덕분에 우리는 에너지의 견지보다 정보의 견지에서 더 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리학자들은 우주는 궁극적으로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하고,인지과학자들은 생물학적 유기체를 정보처리 체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정보에 대한 우리의 과도한 관심이 에너지의 중요성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박탈하지 않았는지 걱정된다.

 

15. 에너지와 달리 정보는 "자체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데, 정보는 어떤 식으로 그것을 해석하는 어떤 존재자(누구 또는 무엇)에 대해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정보가 비본질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 것이다. 그런데 정보를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데, 전적으로 자기지속적이고 그 어떤 다른 것의 영향도 결코 받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연의 외부에서 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에너지의 전달과 소산에 못지 않게 정보의 전달과 해석은 자연의 본질적 과정이다.

 

16. 우리는 정보를 한편으로는 지각과, 다른 한편으로는 행위와 연결시킬 것이다. 지각은 우리가 정보를 획득하는 방식이며, 그리고 정보의 해석 또는 처리는 행위의 가능성에서 나타난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자체의 환경을 지각함으로써 정보를 수집하며, 그리고 그것이 만나는 그 어떤 조건에 대해서도 유연하고 적절하게 반응하기 위해 이 정보를 사용한다. 이것은 동물, 즉 뇌를 지닌 존재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나무는 토양 속 물을 식별하는데, 자체의 뿌리로 물을 흡수한다. 나무는 자체의 잎을 먹고 사는 곤충을 알아내고, 그래서 그것들을 퇴치하기 위해 독성 화학물질을 분비한다. 그러므로 정보 처리는 지각과 행위 사이를 매개한다.

 

17. 정보 처리는 최소한 매우 작은 정도의 감지력(sentience)를 수반하며, 그리고 사실상 요구한다. 그런데 감지력과 의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넓은 범주이기 때문이다. 나무, 박테리아 그리고 점균류 같은 유기체들은 의식은 없을 것이지만 명백히 감지력은 갖추고 있을 것인데, 그것들은 전형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은 방식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그것에 대응하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경우에도, 우리 뇌에서 수행되는 정보 처리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결코 의식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이 진행된다. 자연에서 의식은 드물게 존재할 따름인 듯 보인다. 그런데 감지력은 훨씬 더 넓게 분포되어 있다.

 

18. 지각은 특수한 종류의 인과성(causality)일 뿐이다. 내가 무언가를 지각할 때, 이것은 문제의 사물이 빛, 소리, 접촉 또는 어떤 다른 매체를 통해서든 어떤 식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내가 무언가의 영향을 받는다면, 이것은 그 무언가가 내게 어떤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매우 작더라도) 나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은 지각에만 한정될 수 없다. 흔히 나는 명백히 지각하지 못한 채 사물들의 영향을 받는다. 나는 감기 증상을 느끼지만, 실제로 나를 병에 걸리게 하는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감지하지는 못한다. 나는 무언가를 구매할 충동을 느끼는데, 어떤 식으로 내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점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높은 곳에서 균형을 잃고 추락하는데, 그것을 의식하기 이전에도 지구의 중력장에 의해 끌리고 있다. 나는 자면서 뒤척이는데, 대기 온도의 어떤 변화에 반응한다. 이 모든 경우에 무언가가 내게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이 결과를 낳았다. 정보는 내 마음이 아니라면 내 몸에 의해 어떤 식으로 처리되었다.

 

19. 자연은 결과들을 낳는 원인들의 끊임없는 연결망을 수반하는데, 그 결과들은 결국 후속 결과들의 원인들이 되며, 이런 과정이 무한히 지속된다. 이것이 선형성 또는 단일 인과성을 의미할 필요는 없다. 모든 개별 결과에 대해서는 많은 원인이 존재하고, 모든 개별 원인으로부터 많은 결과가 초래된다. 그리고 가능한 원인들이 서로 간섭하여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에너지가 끊임없이 변환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보도 끊임없이 처리되고 있는데, 순전히 물리적인 층위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정보는 에너지에 못지 않게 자연의 기본 범주이다.

 

20.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연 속에서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온도조절 장치는 그다지 높지 않은 정도로 정보처리자이고,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데이비드 차머스가 제시하듯이, 실제로 의식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매우 작은 정도의 감지력은 지니고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온도조절 장치는 느낀다. 그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반성을 할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리는 절벽에서 낙하하는 돌에 대해서도, 또는 심지어 바닥에 움직이지 않은 채 있는 돌에 대해서도 비슷한 주장을 할 수 있다. 중력이 돌을 지구로 끌어당기고, 그래서 이런 과정과 관련된 정보가 돌이 느끼는 것이다.

 

21. 자연은 자체적으로 특수한 사물 또는 특수한 과정이 아닌데, 자연은 틀일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다양한 사물과 과정들―에너지 변환과 정보 축적―의 결코 완결되지 않는 총합일지라도 말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연은 모든 특수한 사례와 별개로 서 있다. 그럼에도 자연은 이런 모든 사례들에 대한 가능성의 칸트적인 선험적 조건이 결코 아닌데, 자연은 그런 사례들과 동일한 층위에, 동일한 내재적 평면 내에 서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역사의 외부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역사의 총체도 아니며, 자연의 역사 또는 사회의 역사의 특수한 소여도 아니다. 오히려 자연은 이 모든 특수한 사례들, 이 모든 변환과 축적이 공통으로 갖는 것이다. 자연은 그것들 모두를 공통 세계 내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22. 나는 이런 공통성을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엄밀하게 표명하는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로부터 힌트를 취함으로써 결론을 내릴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고대 그리스어 퓌시스(physis)를 자연으로 번역할(통상적으로 그렇듯이) 뿐 아니라, 과정으로도 번역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퓌시스를 더 협소한 전문적 술어(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비롯된)인 히포도케(hypodoche, 수용자)와 동일시한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 즉 수용자는 "일어나는 모든 것에 공통의 관계를 부과하지만, 그런 관계가 무엇이 될지 제한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모든 특수한 역사적 사실들로부터 추상된, 역사의 과정이 설정되는 필연적 공동체로 간주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