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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로버트: 오늘의 에세이-생태적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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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27.

 

생태적 철학

A Ecological Philosophy

 

―― 애덤 로버트(Adam Robbert)

 

[...] 그런 철학은 진화적이고 생태적인 틀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새로운 견지에서 전통적인 철학적 범주들―예를 들면, 외양과 실재,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에 관여한다. 아래에서 나는 이런 범주들 각각이 알바 노에, 야곱 폰 윅스퀼 그리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의 생태적 통찰에 의해 변환되는 방식들을 요약한다. 이런 영역에서는 행해져야 할 작업이 훨씬 더 많이 있지만, 이 글은 최소한 생태학이 미래에 끊임없이 철학을 어떻게 변환시킬지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한다.

 

첫째, 외양과 실재. 약간 상이한 방식이긴 하지만 노에, 폰 윅스퀼 그리고 화이트헤드는 모두 이런 구별짓기를 다룬다. 노에는 현전(presence)과 부재(absence) 사이의 현상학적 구별짓기를 다룬다. 노에의 경우에 현전될 수 있는 것은 무언가가 나타나게 할 수 있는 양식(style) 또는 접근 양태(mode of access)와 관련되어 있다. 비슷하게, 폰 윅스퀼은 나타나는 현상과 접근할 수 없는 본체 사이의 전통적인 칸트적 구별짓기를 따르는데, 본체는 모든 외양에 대한 원인으로 활동한다. 화이트헤드 역시 외양과 실재라는 언어로 작업하지만, 그는 이런 구별짓기를 진화적 과정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각각의 설명은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사이의 구별짓기는 고정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생태적 영역으로 개방한다. 생태적 철학은, 진화적 과정을 포함하면 현전과 부재, 외양과 실재 사이의 구별짓기가 지속적으로 붕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존재론과 인식론. 육화와 이해는 궁극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노에와 폰 윅스퀼의 생태적 주장을 수용한다면, 존재론, 즉 존재하는 것에 관한 연구와 인식론, 즉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알게되는지에 관한 연구 사이의 구별짓기가 또 다시 붕괴되거나 얽히게 된다. 앎과 육체가 상당한 정도까지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면, 어떤 존재자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존재자가 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일찌기 화이트헤드가 거부한 것으로 이해된 칸트적 태도에서처럼 존재론이 인식론으로 완전히 붕괴되는 것에 해당하지는 않으며, 그리고 때때로 "신유물론(new materialism)"으로 불리는 것에서 보듯이, 그것은 인식론을 존재론으로 붕괴시키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것은 존재론과 인식론이 동물행동학(ethology)이라는 개념 내에서 재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자가 달리 알기 위해서는 그 존재자 역시 달리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동물행동학이라는 개념은 앎과 존재함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반면에, 또한 그것은 우주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것과 지식 또는 경험으로 번역될 수 없는 것 사이의 중대한 분리로 내가 간주하는 것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셋째,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폰 윅스퀼의 동물행동학과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은 칸트의 선험적 도식이 거짓임을 드러낸다. 칸트의 경우에, 선험적인 것은 선천적인(a priori) 것, 즉 경험에 독립적인 것으로서 모든 경험적 사건들의 유입을 조직하기 위해 작동하는 인간의 구조들을 가리킨다. 칸트의 정식에서 선험적인 것은 그 속에서 특수한 경험적 사건들이 체험의 내용으로 형성되고 전개되는 보편적 구조이다. 그렇지만,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더 근원적이고 생태적 우주생성의 견지에서 유전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은 선험적 구조 자체, 또는 더 정확하게 칸트가 선험적 자아라고 부른 것이다.

 

생태가 철학을 위한 새로운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선험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은 관계적이고 진화하는 범주들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한 유기체에게는 선험적인 구조인 것이 다른 한 유기체에게는 경험적 소여이며, 그리고 어떤 외양들을 제공하는 구조로 주어지는 것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도 않고 보편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발달되고, 다종적이며, 가소성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체험이 경험적 내용이 어떤 식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종류의 인지적 구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선험적인 것의 구조 자체가 현실태와 환경의 외부 생태계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도 정말이다. 그러므로 형태를 부여하는 마음의 텅빈 공간 내에서 의식의 흐름의 분출(upwelling)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역사적 시간과 진화적 시간 동안 조직화 구조 자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외부 활동의 유입(inwelling)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생태적 철학의 견해에 따르면, 선험적인 것은 그 속에서 현상이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출현할 수 있는 텅빈 보편적 공간이 아니라, 그 대신에 역사적으로 포화된 매체, 즉 사유의 흐름들이 체험의 부분적 조직자로서 뭉치게 되어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획득된 개념적 이해의 지류들로 가득차 있는 매체이다. 마음은 강과 지류들의 그런 교차점일 뿐이다. 마음은 쉽게 대립되는 술어들(예를 들면, "경험적"이라는 술어와 "선험적"이라는 술어)의 대화가 아니라 생태적인 것, 즉 오랜 시간 동안 보존되는 수렴 사건들의 창의적인 다양체이다.

 

더 큰 존재의 생태계 내에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의 근거를 마련하는 노선을 따라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세계 구성체들의 담지자로서 활동하는 하나의 지구"에 관해 글을 적고, "이제 [지구는] 모든 자기 성찰을 위한 위치적 조건으로 작용하는 선험적 별", "식물, 동물 그리고 문화들을 품고 있는" 별 그리고 "경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과 통일되어 있는 모범적인 혼성물"이라고 적는다. 그러므로 생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선험적인 것은 지상의 것에 결부되어 있고 지상의 것에 의존한다. 이런 지구중심주의적 설명―여러 가지 면에서 칸트의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반전―에서는 철학이라고 하는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그것의 근거를 제공하며, 단단히 얽어 매는 것은 지구의 지질학적 조건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생태적 철학은 외양과 실재,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것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들을 얽히게 만든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서술하면, 생태적 철학은 구조와 내용, 물질과 의미 사이의 지속적인 붕괴를 바라본다. 외양과 실재는 고정된 영역들이 아니라 생태적으로 얽혀 있고 반전되는 영역들이다. 앎과 존재함은 두 개의 별개 활동이 아니라 유기체들의 관심, 가치 그리고 결단들에 의해 추동되는 깊이 연결된 역능들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 속에서 사건들이 전개되는 고정된 용기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들 자체의 모험에서 비롯되는 창발적 특징들이다. 이것은 생태가 환경 유기체들―환경에 둘러싸여 있고, 환경에 처해 있는 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일어나는 훨씬 더 모호한 사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가능성 공간 자체가 생태적이고, 진화적이며, 재귀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재는 생태적 구조 같은 것을 갖추고 있으며, 우주는 생태적 사건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