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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상관주의 비판의 중요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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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8.

 

상관주의 비판의 중요성에 관하여

On the Importance of the Critique of Correlationism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이 출현했을 때 그것은 논쟁의 폭풍을 빠르게 유발했다. 실재론을 옹호하는 것과 상관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관련하여 일부 사람들에게는 흥분을 다른 일부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유발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오늘날까지 여전히 나는 이런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 열기와 열광을 초래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실재론"이라는 낱말이 어떤 금기를 어긴 것 같았으며, 그리고 모든 금기의 위반과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그 위반을 찬양한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신성한 것이 침해당해 버렸다고 느끼는 듯 보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할 때 나는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이 실재론에 대한 비판과는 꽤 다른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상관주의의 교훈이 갱신된 관점주의(perspectivism)의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슬프게도, 최소한 대중 문화에서는 관점주의(이것을 "통속적 관점주의"라고 부르자)가 어떤 반동적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보다는 뒷받침하는 낡은 개념이 되어 버렸다. 관점주의가 타자성 또는 다름과의 만남이어야 하는 반면에, 대중 문화 속 관점주의의 교훈은 "모든 것은 나름의 관점이 있으며 모든 사람은 나름의 관점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들의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는 테제 같은 것인 듯 보인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꼭 옳지만은 않다. 통속적 관점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타자들에 관한 내 자신의 관점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를 결코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항상 나 자신을 만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귀찮게 노력조차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통속적 관점주의는 일종의 과대 상관주의자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관점의 문제이고 우리 각자는 영원히 자신의 관점에 갇혀 있기 때문에 타자들을 이해할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은 무관점의 실재와의 만남을 초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타자성과의 만남의 가능성을 개방하는 것일 것이다. 상관주의적 사유의 인간중심주의와 관하여 이야기하는 많은 글이 쓰여졌다. 상관주의자가 도대체 세계와 사유를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주장할 때, 그는 그저 어느 사유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종, 즉 인간의 사유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상학을 생각하자. 동물 환경에 대한 하이데거의 간략한 분석을 제외하면, 현상학은 다른 모든 존재자들을 인간의 사유에 복속시킨다. 일어나는 일은 그저 종 복속이 아니라, 가정되고 있는 것은 정상적인 인간의 사유라는 관념이다. (여기서 초기 푸코뿐 아니라 캉귀엠도 상관주의 비판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동물 세계, 상이한 정신 "질환"을 지닌 사람들의 세계, 상이한 예술가와 성의 세계들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작들도 그렇다...).

 

상관주의는 우리는 결코 세계와 사유를 개별적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테제일뿐 아니라, 정상적인 인간이 어떠한지에 관한 심층적 가정들을 형성하는, 세계에 대한 종 특정적 관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런 점이 지적될 때 두 가지 반대 가운데 하나가 제기된다. 흔히 상관주의 비판가를 아무튼 인간을 싫어하는 사람으로 매도한다. 이것은 꽤 특이한 혐의이다. 어떤 입장이 불완전하다거나 또는 무언가를 간과한다고 지적하는 것은 인간을 싫어하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한 그런 비판은 의심하기에 좋은 이유가 있는, "인간적"이라는 술어에 대한 일의성을 가정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타자성을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항상 다른 것을 생각하고, 따라서 그것을 동일한 것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타자성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항상 상관주의의 핵심 주장이다. 당신이 사유가 아닌 것을 생각하려고 시도하더라도, 여전히 당신이 그것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당신은 사유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며 사유가 아닌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이런 주장을 의문시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타자들의 말 속에서 항상 자기 나름의 의미만을 듣는 유아론적 자기도취적 인물과 다른 사람의 세계를 가까스로 이해하기 시작하는 사람 사이에는 심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세계에 관해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 즉 그것의 차이점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 항상 자신만을 듣는 것과 다른 사람을 듣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쉽게 인정하는 듯 보인다. 확실히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오로지 남성적 견지에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항상 여성을 해석하는 남자와 이 특수한 세계에서 여성으로서 경험한다는 것이 어떠한지에 대해 조금 이해하고 있는 남자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이것을 인정하며, 우리는 타자들의 세계에 관해 무언가―모든 것이 아니라―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왜 큰 비약이겠는가? 만약 우리가 고양이이고 고양이로서 고양이를 촉발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생각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를 촉발할 것의 견지에서 고양이에 관해 생각하는 것과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상관주의 비판을 이해하는 한 가지 길은 상관주의의 복수화와 급진적 관점주의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게 될 것은 관점들의 비환원적 실재론과 비슷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적"이라는 술어의 일의성에 이의를 제기하여 상이한 인간들에 대한 서로 다른 다양한 현상학적 구조들을 인식하는 탈인간적 현상학뿐 아니라 다른 종들의 세계들에 대한 탐사도 수반할 것이다. 그것은 대(大)모형은 전혀 존재하지 않은 채 무한히 많은 다양한 복수의 모형들을 인정하는 세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