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선언-스키엔티아 살롱: 21세기 지성주의 선언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4. 10. 26.

 

스키엔티아 살롱: 21세기 지성주의 선언

Scientia Salon: a manifesto for 21st century intellectualism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계몽주의 시대 동안 마르퀴 드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는 공공 지식인(public intellectual)을 "사제, 학교, 정부 그리고 모든 오랜 기성의 제도가 편견들을 축적하고 보호해 온 은신처들에서 그 편견들을 찾아내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정확히 1898년 1월 13일에 작가 에밀 졸라(Emile Zola)는 공공 지성주의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상―그리고 특히 프랑스 정부―에 보여주었다. 그는 악명 높은 드레퓌스 사건에서 자행된 프랑스 당국의 참담한 행동에 관하여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유명한 편지를 작성했다.

 

물론 지성주의에 대한 비방자들이 존재하는데, 특히 미합중국에서 그렇다.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고전 <<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는 미합중국 역사 전체에 걸쳐 그 현상의 여러 갈래를 추적하는데, 오늘날에는 반지성주의가 공립 학교에서 시행되는 진화론 교육에 대한 종교에 기반을 둔 반대 형식에서, 또는 예수가 아닌 철학자를 애호하는 철학자로서 감히 거명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공개적인 경멸에서 잘 나타난다.

 

내 직장인 뉴욕 시립 대학교에서 종종 나는 몬트리올 퀘벡 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노르망 바야르종(Normand Baillargeon)의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A Short Course in Intellectual Self-Defence)>>이라는 쓸모 있는 작은 책을 사용하여 비판적 추리에 대한 기초 강좌를 가르친다. 그 이전은 고사하고 대학 수준에서도 선택 과목으로 간주되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비판적 사고에 대한 교육이 정말로 "기초 교육"이라는 개념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나는 그 책을 강력히 권고한다.

 

바야르종의 책 제목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가장 유명한(그리고 논란이 많은) 공공 지식인, 즉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인용문을 이용한 것이다. <<필연적 환상: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사고 통제(Necessary Illusions: Thought Control in Democratic Societies)>>에 관한 에세이에서 촘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조작과 통제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유의미한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기 위해 지적인 자기방어법에 관한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농담이 아니다. 폭스 뉴스, MSNBC 또는 심지어 CNN 채널을 켜기만 하면 미합중국에서 정치적 선전이 얼마나 격렬하고 유해한지 알게 될 것이다(나는 내 자신이 직접적으로 친숙한 다른 한 나라, 즉 이탈리아의 상황도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나는 다른 곳에서도 대충 상황이 꽤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번영하는 사회를 발달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전체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걱정해 왔는데, 그것을 "1984" 시나리오라고 부르자. 그리고 확실히,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여전히 많이 진행 중인데, 중국과 러시아에서 중동의 대부분 국가들까지 수십 억 명의 사람들이 비민주주의적인(또는 명목상 민주주의적인) 체제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을 통제하는 더 미묘한, 거의 틀림없이 더 효과적인 방법은 오히려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에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가 제시한 시나리오와 유사하다. 그 특수한 디스토피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심리적(그리고 생물학적) 조작이며, 그리고 그것은 공공연한 강압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또는, 괜찮다면, 국내 시민을 조종하기 위한 유명한 빵과 서커스(panem et circenses) 정책―그들에게 충분한 음식과 오락을 제공하면 그들은 혁명에 대한 욕망을 갖지 않을 것이다―과 국외에서의 군사적 우세가 결합된 로마 제국을 뒤돌아 보자. 그것이 많은 근대 사회들에 대한 대강의 근사인 듯 들린다면,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이다.

 

평이하게 서술하면, 그 문제는 우리 동료 시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방어법(문자 그대로 또는 더 넓게 말해서)에 대한 그 어떤 지적인 교육 과정도 거치지 않았으며, 그리고 돈이 구매할 수 있는 최고의 정치적 선전과 기업 선전―이것을 잊지 말자―의 공세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효과에서 사회적 효과까지 연쇄적인 효과를 낳는다. 개인적 층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을 왜 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간다. 음미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언명은 확실히 과장된 표현이었지만, 우리가 이 행성에 존재한다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것과 그 이유에 관해 때때로 멈추어 성찰하는 것은 명백히 득이 된다. 고대인들은 그것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즉 도덕적인 좋은 삶의 추구라고 불렀다. 그런데 성찰하고 정통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사유 도구들이 필요한데, 우리의 교육 체계 안팎에서는 그런 도구들이 부족하다.

 

사회적 층위에서 이것은, 우리가 정치인들을 선출하는 까닭은 그들이 공정성과 복지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현대 세계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에 대한 좋은 착상이 넘쳐 나는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같이 맥주를 마시고 싶어 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듯 보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나는 더 많은 교육―또는 심지어 비판적 사고에 대한 더 많은 강좌―이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만병통치약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 결국, 데이비드 흄(David Hume)이 말했듯이,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고, 노예일 수밖에 없으며,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일도 결코 자임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이 그저 (아리스토텔레스가 넌지시 주장했듯이) 합리적 동물이 아니라, 정념적 동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은 이성을 돌보는 것과 꼭 마찬가지 정도로 감정을 돌볼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당연히 도출된다.

 

사실상 현대 인지과학의 연구는 흄의 경고를 실증해 왔다. <<데카르트의 오류(Descartes' Error)>>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우리가 소시오패스들의 정치체를 바라지 않는다면 기능적 인간은 무정한 스폭(Spock)에 기반을 두고 모형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물론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 같은 부류들의 더 최근 저작들은, 인간은 인지적 편향들을 대단히 많이 수반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대단히 커서 세계적으로 무언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점이 맞다고 매듭지었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이루어졌다. 인류는 철학을 발명했고, 그 다음에 과학을 발명했으며, 그리고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우리 운명을 개선하는 데 이성을 사용할 수 있고 사용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철학과 과학 둘 다 번성했다. 나는 사회과학 또는 인지과학에서 발표되고 있는, 인간 정신이 정말로 얼마나 제한적이고 편향적인지를 보여주는 모든 새 논문이 합리적 사유의 부적절성에 대한 논변이 된다는 점이 약간 재미있다(글쎄, 사실은 실망스럽다)고 깨닫는다. 바로 그런 연구들에 관여한 연구자들조차도 확실히 겪는 편향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최선의 추리 능력들을 발휘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식으로 그런 발견 결과들이 얻어진 것처럼 말이다.

 

적절한 일례에 기대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확률을 추정하는 데 서툰 경향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수억 달러 카지노 산업이 기반을 두고 있는 현상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도박사의 오류와 다른 적절한 개념들을 가르치는 것이 쓸모 없다고 주장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아마도 카지노 소유주들을 제외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한, 확률 이론의 기초를 가르치는 것이 동료 인간들이 도박 업체들에 자신의 재산을 낭비하지 못하게 최소한 부분적으로 방지하는 최선의 방식이다.

 

비판적 추리와 열린 지적 담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특효약은 아니지만, 일단 내 학생들이 표준적인 논리적 오류들을 깨닫게 되면 그들은 그것들을 도처에서 보게 되고, 그래서 더 잘 지내게 된다는 것을 나는 보장한다.

 

그런 것들 때문에 나는 현재의 기획에 이르게 되었고, 그것에 관한 이 에세이는 최초의 비공식적인 "선언"이다. 스키엔티아는 가능한 가장 넓은 견지에서 지식을 뜻하는 라틴어 낱말이다. 그것은 영어 술어 "사이언스"보다 더 넓은 의미를 함축하는데, 가장 적게 말하자면, 스키엔티아는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철학, 논리학 그리고 수학을 포함한다. 그것은, 지식은 다중의 원천, 즉 경험적인 것(과학), 개념적인 것(철학, 수학 그리고 논리학)에서 도출되며, 이런 원천들 가운데 단 하나에 의해 환원되거나 제약될 수 없다는 관념을 반영한다. 물론 살롱은 이성의 시대의 사회적 엔진이었고, 그래서 21세기의 공공 지성주의에 대한 적절한 비유인데, 21세기에는 모임 장소가 디지털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더 크지만, 토론들은 17세기 살롱에서 마델레인 드 스퀴데리(Madeleine de Scudery) 또는 마르퀴스 드 랑부이에(Marquise de Rambouillet)가 이용할 수 있던 방에서 전개되었던 토론들만큼이나 활발해질 수 있다.

 

내가 스키엔티아 살롱 같은 모험적 기획에 관해 수 년 동안 생각했고, 사실상 처음에는 과학자로서 그리고 더 최근에는 철학자로서 공적 담론에 대한 개입을 단계적으로 서서히 증가시키는 동안, 뉴욕 시립 대학교(브루클린 칼리지)의 동료 코리 로빈(Corey Robin)에 의한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다. 나는 (아직) 코리를 만난 적이 결코 없지만, 얼마 전에 <<보수주의자들은 왜?(Reactionary Mind)>>라는 그의 책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는 그 책이 보수주의자들이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지에 관해 최근에 저술된 대부분의 글보다 엄청나게 더 통찰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최근에 나는 알 자지라 어메리카에서 그가 기고한 "비정규직 지식인들의 책무(The responsibilty of adjunct intellectuals)"라는 제목의 짧은 에세이를 읽었으며, 그것은 내 자신의 많은 불편한 느낌을 깔끔하게 명확히 했다. 코리는, 학자들은 항상 이해할 수 없는 전문어를 사용하여 다른 학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기를 좋아하는 한편(그가 선택한 예는 임마누엘 칸트이다), 다른 사상가들은 언제나 그것에 관해 불평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그는 당대의 학문적 글쓰기는 "기묘하고 야만스러운 낱말들의 무의미한 나열들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s)의 글을 인용한다.

 

그렇지만 로빈은 우리가 더욱더 많은 학자들이 공개적으로 그리고 활발히 공적인 것에 관여하는 전례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정보 시대의 기술에 의해 가능해졌는데, 특히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 등과 같은 사회적 관계망 네트워킹에 의해 가능해졌다. 보통의 학술 논문은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읽고 2000부까지 팔리는 학술서는 드문 반면에, 나의 셔늘리 스피킹(Rationally Speaking)(스키엔티아 살롱의 전신) 같은 블로그들은 매 주 수만 명, 때때로 수십 만 명의 독자들이 열람하는데, 전 세계에서 그 블로그에 접속한다.

 

공공 지성주의에 대한 좋은 뉴스처럼 들리지 않는가? 글쎄, 정년을 보장받는 학자들(나 자신과 로빈 같은)이 감소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정확히 그렇지는 않다. 소멸이 즉각적인 위협은 아니지만, 그 추세는 명백히 불길했는데, 1971년에 미합중국 대학들은 정규직 교수 비율이 80%에서 조금 모자랐으며 20%보다 약간 큰 비율의 비정규직 교수들로 보충되었다. 2009년에는 각각 50%로 그 둘의 비율의 본질적으로 일치하였다. 상황이 좋지 않다. 비정규직 교수들에게도 좋지 않고, 대학들에게도 좋지 않으며, 사회 전체에게도 좋지 않다.

 

이 글은 정년 보장 제도(그 어떤 사회적 제도와 마찬가지로 찬반이 있는)를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할 장소가 아니다. 그런데 그 제도의 개시―겨우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넓게 자리잡게 되는―배후에 놓여 있는 본질적인 관념은 부당한 행정적 및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교수진을 보호하여 그들에게 학자로서, 그리고 추측컨대 공공 지식인으로서 비교적 자유로운 재량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사실상 착취당하는) 비정규직 교수들 쪽으로 점점 더 균형이 이동함으로써, 특히 공립 대학들과 그것들에 자금을 제공하는 주 정부들은 공적 담론에 개입하는 데 관심이 있는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을 위한 잠재력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키고 있다.

 

나는 비정규직 교수들의 등장이 지성적 삶의 활력을 억누르기 위해 빅 브라더에 의해 사전에 준비된 기획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는데, 그 상황은 대학의 목적에 대한 엄청나게 근시안적인 개념과 결합된 경제적 결단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은 꽤 명백하다. 그리고 나는 정년을 보장받은 교수들이 반드시 자신이 하는 것에 관해 비동료들에게 이야기하는 데 특별히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로빈이 매우 적절히 서술하듯이, 다음과 같은 사실은 여전히 남는다. "잠재적인 공공 지식인들의 대다수는 강단의 1%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난해한 논문을 위해 날렵한 의견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출판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라는 모래톱을 항해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채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스키엔티아 살롱을 시작하여 몇몇 동료들과 관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합류하기를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학과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에 비해 그렇게 많이 채점하고 있지 않으며, 그리고 나는 수고스럽게 그것을 읽은 너댓 명의 매우 전문화된 동료들의 칭찬을 받을 또 하나의 "난해한 논문"에 관해 작업하기보다는 수만 명이 읽고 우리 사회의 더 넓은 논쟁들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는 그런 "날렵한 의견"(또는 이것과 같은 에세이들)에 관해 작업하면서 내 시간을 보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결정했다.

 

최초의 과학철학자임에 거의 틀림없는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입사 스키엔티아 포테스타스 에스트(Ipsa Scientia Potestas Est), 즉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구절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자연을 조작하고 인간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자연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힘을 육성한다는 의미에서 그 구절을 의도했지만, 나는 그것을 훨씬 더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세계에서 진행되는 것에 대한 지식과 이해―스키엔티아―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장악하는 더 큰 힘,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더 큰 능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더 큰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이 선언을 공표하는 목적은 그런 방향으로 작은 기여를 하는 데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 이르게 된다.

 

1) 스키엔티아 살롱은 "공공 지식인"이라는 칭호를 꺼리지 않는 강단 및 비강단 사상가들을 위한 공개 토론의 장이다.

 

2) 우리는 지성주의―공개적으로 공유되는 정신의 삶이라는 넓은 의미에서―가 인간 사회의 안녕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3) 우리는, 인지과학의 연구에서 명백하듯이, 인간들은 이성과 감정의 복잡한 혼성물을 채택함으로써 세계를 헤쳐 나가며, 그리고 흔히 합리성보다는 합리화에 몰두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4) 사실상 우리는 데이비드 흄과 함께 이것이 인간 본성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먼저 무언가에 대해 신경을 쓰기 위해서는 감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5) 그런데 또한 우리는 공개적이고 사리에 맞는 담론이 공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발달뿐 아니라 개인의 입장에서 도덕적인 좋은 삶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6) 인간의 이해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가장 넓은 범위의 과학 및 인문학 분과학문들로 이해되는 스키엔티아는 도덕적인 좋은 삶을 추구하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도구이다.

 

7)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이런 문제들에 관심이 있는 필자들은 더 넓은 독자를 겨냥하고, 불필요한 전문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그리고 명료하고 매력적으로, 심지어 적절한 때에 익살맞게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8)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지적 문제들에 관한 열린 담화에 정직하게 그리고 실질적으로 기꺼이 기여하기를 바라는 저자와 독자들, 특히 평소에 동료 인간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