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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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히크먼: 오늘의 책-탈인간적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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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

 

데이비드 로덴의 탈인간적 생명에 관하여

David Roden on Posthuman Life

 

―― 스티븐 크레이그 히크먼(Steven Craig Hickman)

 

행동 조정 또는 의식 통일에 부분들의 물질적 접촉이 필요하지 않는 매우 다른 일종의 복잡한 유기체가 드디어 진화했다....     ―― 올라프 스태플든(Olaf Stapledon)

 

스태플든이 그 책을 적었을 때 그는 화성인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우리 시대에는 그가 우리의 탈인간적 후예가 진화하게 될 것의 기묘함을 연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최후의 인간과 최초의 인간(Last and First Men)>>에서 스태플든은, 항성적 파국이 우리의 태양계를 끝장내고 있을 때 우리 자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살펴보는 인간 종의 미래 역사에 대한 한 판본을 제시한다. 인류는 일련의 정신적 및 육체적 변형들을 통해서 흥하고 망하는데, 자연 재난과 인공 재난 후에 재생하여 결국에는 다형적 집단 지능, 즉 외계 행성들의 궤도들에 걸쳐 있고 개별 의식의 경계들은 꺠뜨리지만 여전히 전체에 대한 "미숙한 지식" 이상을 갖출 수 없는, 정신 감응력으로 연결된 천만 정신들의 공동체로 나타난다.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또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호미니드 분기군, 즉 직립 자세와 이족 보행, 손 재주와 도구 사용의 증가, 그리고 더 큰, 더 복잡한 뇌와 사회를 향한 일반적 추세로 특징지워지는 유인원들의 한 갈래의 잔존하는 구성원들일 뿐이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라 우리 인간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비인간 영장류와 더 유사한 뇌와 해부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흔히 "인간"이 아니라 호모 속의 호미니드로 간주되거나 지칭되는 오스트랄로피테신 같은 초기 호미니드들에서 진화했는데, 그들 가운데 일부가 불을 사용했고, 유라시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그리고 대략 200,000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해부학적으로 현생 호모 사이엔스를 낳았다. 대략 50,000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그들은 현생 인류의 행동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그 후 잇따라 이주하여 가장 작은, 가장 건조한, 그리고 가장 추운 대륙들을 제외한 모든 곳을 차지하게 되었다.

 

다양한 변화와 변형들을 통해서 진화가 움직이는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아무런 종점도, 아무런 진보도, 아무런 목적론적 목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진화론―그리고 더 명시적으로 그것의 현대적 종합―은 자연선택, 돌연변이 이론, 그리고 멘델의 유전 이론을 생물학의 그 어떤 분야에도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통일 이론으로 연결했다. 이것에서 두드러지는 한 가지 사실은 진화론이 유기적 진화를 다룬다는 점이다. 현대적 종합은 인류의 탈인간적 후예들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예고할 수 있는 다른 유형들의 진화를 포함하지 않는다. 현존하는 대로의 진화론의 논리를 좇는다면, 우리는 기껏해야 인류의 끊임없는 유기적 진화 또는 인류의 궁극적 멸종만을 예상할 수 있다. 지구에서 여태까지 존재했던 종들의 99%가 멸종했기 때문에 인류의 멸종이 가능한 일이라고 알려져 있다. 궁극적으로 무언가가 우리 인간들을 대체할 것이다. 그런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어떤 과학자가 실제로 알아내어 확신을 갖고 가리킬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 재고의 여지가 있는 사변적 가능성이다.

 

이것이 데이비드 로덴 박사의 새로운 저작, <<탈인간적 생명: 인류의 끝에서의 철학(Posthuman Life: Philosophy at the Edge of the Human)>>의 기본 전제이다. 우리는 NBIC(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기술 그리고 인지과학을 가리키는 약어) 기술의 수렴뿐 아니라 인지과학, 생물학 이론 그리고 일반 형이상학의 근거가 탄탄한 어떤 입장들이 탈인간적 후예가 실현되기 위한 기술적 수단은 여전히 사변적일지라도 원칙적으로는 어떤 탈인간적 후예가 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하는 기술 시대에 살고 있다. 로덴은 이것에 대한 자신의 판본을 "사변적 탈인간주의(speculative posthumanism)라고 부를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나는 그런 후예들이 가능하다는 철학적 주장을 "사변적 탈인간주의"(SP)라고 부르고, 그것을 트랜스인간주의(transhumanism) 같은, 흔히 SP와 혼동되는 입장들과 구분한다. SP는 탈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SP는 탈인간들이 현생 인류보다 더 뛰어나거나, 또는 그들의 삶이 단일한 도덕적 관점에서 비교될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지 않는다.

 

로덴은 "비판적 탈인간주의(critical posthumanism)"―인식론에서 인간 주체의 철학적 중심성을 "해체시키"고자 하는―라는 관념과 트랜스인간주의―인류와 그들의 역량들의 기술적 향상을 제시하는―라는 관념을 전개할 것이다. 그런데, 로덴이 인정하듯이, 탈인간들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인간적'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간 알 필요가 있다. 탈인간주의에 대한 그 어떤 철학적 이론도 인류에 대한 비인간적 계승자들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인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야 한다.

 

로덴이 명백히 하는 한 사유는 주체성(subjectivity)이라는 관념이다.

 

어떤 군집성 영장류 동물들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모든 곳에서 주체성과 행위 능력의 필요 조건인 인간의 도덕적 삶과 인간 주체성의 특질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다. 철학에 대한 이런 "선험적 접근 방식"은 탈인간들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과는 반대로 탈인간들은 우리 인간들과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점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탈인간성에 대한 이론은 탈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경험적 제약과 선험적 제약 둘 다를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쇼펜하우어, 니체, 바타이유, 그리고 닉 랜드에서 비롯되는 반지향적 또는 비지향적 유물론의 전제들은 주체성에 대한 이론은 전혀 필요없으며, 이것은 거의 아무 가치도 없는 관념론적 전통와 변증법의 편견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명백히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퀑탱 메이야수, 그리고 애드리안 존스턴 같은 철학자들은 이런 저런 형식으로 유물론의 이런 관념론적 전통 전체를 지지한다. 관념론적 전통들에 맞서는 것은 혼돈과 구성, 욕망에 근거를 두고 있는 유물론이다. 리비도적 유물론(libidinal materialism)에 대한 닉 랜드의 감각은 결여라는 관념에 이의를 제기하는 '욕망'으로 시작하여 '욕망'으로 끝난다. 그 대신에 그의 이론은 무조건적(비목적론적) 욕망에 대한 이론이다. 존재라는 개념, 또는 존재론으로 시작하는 많은 유물론들과 달리, 리비도적 유물론은 열역학, 혼돈, 그리고 에너지의 존재론적 차원을 인정함으로써 시작하는데, "리비도적 유물론은 혼돈과 구성을 수용할 뿐이다". 존재는 구성의 결과인데, "혼돈의 구성의 결과로서의 존재".

 

구성으로서의 존재라는 리비도적 재형식화로 '존재의 정도를 얻게 되고, 존재를 지니고 있는 것을 상실하게 된다'. '존재'라는 결과는 과정의 파생물인데, '우리는 자신의 믿음 속에 안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구성 성분... 유형, 변양태, 종, 규칙성들의 일반 에너지학이 존재한다. 구성 성분들을 보존하고, 전달하고, 순환하며, 향상시킬 수 있는 역능, 구성 성분들의 표시, 비축, 그리고 전유에서 동화되는 역능, 그리고 구성 성분들의 해금, 소산 및 ... 해방에서 풀려나는 역능 ... 프로이트가 욕망을 결여, 표상, 또는 지향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이차 과정을 막고 트는 장치에 의해 제약받는 소산 에너지의 흐름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프리이트도 리비도적 유물론자이다].

 

<<두 번째 계시록(Second Apocalypse)>>이라는 환상 소설 연작의 저자인 스콧 배커(R. Scott Bakker)는 자칭 맹목적 뇌 이론(Blind Brain Theory, BBT)이라는 것의 이론가이기도 하다. 매우 간단히 말하자면, 그 이론은 매나노초 뇌에 의해 처리되는 방대한 양의 정보에서 매우 적은 부분만이 의식으로 나타난다는 관찰에 의거한다. 우리는 실제로 사물들을 작동하게 만드는, 모든 무의식적 기능 속에서 전개되는 방대하고 복잡한 과정들을 사실상 알지 못하고, 그래서 그 결과 의식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뇌 과정들의 일시적인 과정이자 결과일 뿐이고, 그래서 언급할 안정된 동일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식의 일시적인 초점이다.

 

이제 "어떤 군집성 영장류 동물들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모든 곳에서 주체성과 행위 능력의 필요 조건인 인간의 도덕적 삶과 인간 주체성의 특질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있다"는 로덴의 진술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BBT와 리비도적 유물론, 즉 비신학철학적 개념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지향적 철학으로 더 잘 지칭될 수 있는 것을 사용하여 인간 이후에 오는 것에 대한 우리 감각을 조건으로서 '행위 능력' 또는 '주체성'에 근거를 둘 필요성을 없애버릴 수 있는데, '행위 능력'과 '주체성'은 둘 다 사실상 뇌의 효과이지 실체에 기반을 둔 존재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덴은 그런 조건과 제약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가 말하듯이, 약하게 제약된 SP는 우리의 현재 기술적 실천이 우리가 아직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의" 가치들이 수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비인간 세계를 촉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인간들의 인식론, 존재론, 그리고 규범적이거나 윤리적 관습 및 가치들은 탈인간들이 무엇을 수반할지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 줄 수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변적이고 아무런 자격도 없다.

 

그런데 이것이 참이라면 그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것은 "탈인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자기무효적 넌센스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기묘한" 세계 또는 가치들에 관해 말하는 것은 실재론에 대한 신념과 양립할 수 없는 개념적 상대주의에 빠지게 하는가?

 

탈인간 이야기가 자기무효적 넌센스가 아니라면, 그것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들은 사실상 매우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들이다. 우리의 현재 기술적 궤적들이 세계를 전환하는 탈인간을 낳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이런 전망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에 대응해야 하는가? 그 어떤 가능한 탈인간적 가치들에 대해서도 "인간적" 가치들을 선호하는, 기술에 대한 보수적인 예방적 접근 방식을 적용해야 하는가? 약하게 제약된 SP 아래에서 보수주의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종류의 윤리적 또는 정치적 대안들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데이비드는 내가 대안적인 유물론적 전통들로 이의를 제기한다고 인정해야 하는 관념론적 전통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급했듯이, SP의 범위에 대한 이해는 탈인간들에 대한 경험적으로 규정된 사변들을 고려하며, 그리고 칸트, 헤겔, 후설 그리고 하이데거에서 비롯되는 선험적 사유의 전통에도 관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들이 그의 책이 제기하고 잠정적인 해답들도 제공하고자 하는 의문들이다.

 

목차

 

서론: 처칠랜드의 지네

1. 인간주의, 트랜스인간주의 그리고 탈인간주의

2. 전(前)비판적 탈인간주의에 대한 옹호

3. 인류의 끝

4. 기묘한 이야기들: 인류학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탈인간주의

5. 단절 테제

6. 기능적 자율성과 조립체 이론

7. 새로운 실체주의: 기술 이론

8. 탈인간되기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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