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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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볼: 오늘의 논평-도대체 누구를 저널리스트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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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2.

 

도대체 누구를 저널리스트라고 하는가?

Who are you calling a journalist?

 

―― 필립 볼(Philip Ball)

 

가끔 운이 좋게도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에서 개최되는 과학 모임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 나는 항상 약간 경계하는 질문을 예상한다.

 

"그런데 볼 박사님, 소속 기관이 무엇입니까?"

"글쎄요, 저는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 모임에 관한 기사를 작성할 예정입니까?"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저는 강연을 행할 예정입니다..."

[미합중국 판본: "이 익살꾼은 누구인가?"라고 말하는 비웃는 시선을 보낸다]

[중국 판본: "어쨌든 좋습니다. 당신에게 단기 저널리스트 비자를 발부할 것입니다. 동무."]

 

그것은 내가 과학 공동체 내에서의 나의 직업적 지위에 관해 생각해야 하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작가, 흔히 "과학 작가"라고 부르는 데 만족하지만, 이것이 일종의 유사과학자 역할과 합쳐지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런데 나는, 학술 문헌에 발표될 논문을 작성하고 있을 때를 상상하면, 내 주소에 대해 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25 Brenchley Grove SE23"[진짜가 아님]일 때 기관의 방패도 없이 이상하게 노출된 느낌이 든다. 그 외에 나는 이런 문제에 관해 생각할 이유가 정말 없는데, 특히 극히 드문 예외적 경우들을 제외하면, 과학자들은 여러분이 "과학자"이든, "작가"이든, 또는 무엇이든 간에 그것에 관해 대단히 무관심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그 어떤 종류의 자격도 요구하지 않은 채 기꺼이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거나 여러분의 말을 경청한다는 점에서 과학의 평등주의적 정신에 충실하다.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떠오른 까닭은 내가 최근에 중국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강연한 후에 귀국했기 때문이 아니라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와 E. O. 윌슨(Wilson) 사이에 벌어진 가장 최근의 설전 때문이다. 이전에 나는 윌슨이 집단 선택―윌슨이 어떤 진지한 수학을 배경으로 마틴 노웍(Martin Nowak)과 공동으로 제시한 주장―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 도킨스가 윌슨에게 개시한 꽤 무절제한 공격 방식에 대해 공감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윌슨은 리처드가 "저널리스트"―"그리고 저널리스트는 과학자들이 알아낸 것을 보도하는 사람들이다"―라는 점을 근거로 도킨스의 이의 제기를 일축함으로써 비난을 자초한다. 한편으로 이것은 과학 저널리스트들이 행하는 일의 일부일 뿐이다. 또한 그들은 과학자들이 알아낸 것에 대한 맥락을 제공하며 때때로 그것에 대한 비판도 제시한다. 과학 저널리스트들은 결코 홍보 원숭이가 아니다. 그런데, 때떄로 리처드가 보도 기사들을 작성할지라도, 그를 저널리스트로 부르는 것은 명백히 터무니 없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리처드가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이것은 강단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현재 주업무가 과학 커뮤니케이션인 다른 여러 과학자들의 경우에도 거의 마찬가지로 참이라고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다는 것인가? 그런 활동이 그들에게 진정한 과학자로서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고 넌지시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칼 세이건(Carl Sagan)이 오랫동안 겪었던 대중화 활동에 대한 일종의 속물적인 경멸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당장 나는 윌슨이 그런 경멸감을 느꼈다고 믿을 수가 없는데, 윌슨 자신이 대단히 뛰어난 대중화론자이고, 그래서 나는 이 인간적인 사람이 순간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짜증을 느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윌슨이 도킨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리처드가 연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그 주장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이유를 말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같은 취지에서, 다른 진화생물학자들이 윌슨의 견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그가 어떻게 동료들을 실망시켰는지 말하는, 네이처에 보내는 집단 편지에 대한 서명을 받기 위해 요란스럽게 돌아다님으로써 이의를 제기하지 말았어야 했다.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이나 다수에 호소하는 논증은 바로 과학자들이 삼가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리처드는 자기가 한 대로 앙갚음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 과학 글쓰기에 관한 옥스퍼드 북(Oxford Book of Modern Science Writing)>>을 편집할 때 리처드는 생계를 위해 과학에 관한 글을 쓰는 과학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선택은 "직업적 과학자들"과 "직업적 작가들에 의한 과학 유람" 사이에서 명백하게 이루어졌다(그는 후자를 배제한다). 이것은, 만약 여러분이 "직업적 과학자"가 아니라면 여러분은 과학 애호가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주장은 제임스 글릭(James Gleick), 칼 짐머(Carl Zimmer), 데보라 블룸(Deborah Bloom),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내가 언급하지 못한 다수의 다른 사람들처럼 참으로 위대한 과학 작가들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대단한 토머스 레빈슨(Thomas Levenson)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포괄적으로 그리고 더 설득력 있게 이런 태도를 배격했다. 잠시 동안 우리에게 합류하는 것이 리처드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는 아무 부끄러움도 없다. 결국 그의 글은 가디언지 사이언스 팟캐스트에서 로빈 맥키(Robin McKie)가 자신은 흔히 과학자들이 자기가 애호하는 주제에 관하여 쓴 책보다 직업적 작가들의 책에서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하는 그런 종류의 글쓰기 미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비자 담당 공무원이 여러분의 이름 뒤에 "무슨 무슨 학과"를 갖추고 있어야만 진지한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것이 또한 라디오 4의 <인 아우어 타임(In Our Time)>이라는 프로에 포함될 기준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문과 졸업생이라고 추정하며, 그리고 나는 인문학을 사랑하지만, 그곳에서는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이 여전히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