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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개념적 페르소나: 철학자, 반철학자, 신비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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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2.

 

개념적 페르소나: 철학자, 반철학자, 신비주의자

Conceptual Personae: Philosopher, Anti-Philosopher, Mysterian

 

――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들뢰즈(Deleuse)와 가타리(Guattari)는 "개념적 페르소나"라는 술어를 고안한다. 여기서 내 목적은 그 술어에 대한 그들의 의미작용을 충실하게 유지하는 것이 아닌데, 비록 나는 그것의 영향을 막연히 받고 있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적 페르소나"라는 술어로 정말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한 논의에 관심이 없다. [...] 개념적 페르소나는 개념들을 갖고서 조작하는 주체(subject)의 한 유형이다. 여기서 "주체"라는 술어는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 주체는 마음 또는 심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직책" 또는 "지위"라는 개념에 더 가깝다. 사회적 세계에서는 직책과 직업에 관해 이야기한다. 교사, 경찰관, 성직자, 관리자, 대통령, 상원 의원 등이 존재한다. 이런 직책들은 항상 몸과 마음을 갖춘 사람들이 차지하지만, 직책 자체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직책은 일단의 책무, 의무 그리고 역할이다. 경찰관의 책무, 의무 그리고 역할은 교사의 그것들과 다르다. 게다가 경찰관과 교사라는 직책은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세계 및 타자들과 관계를 맺는다. "주체"는 최선의 낱말이 아닐 것이지만, 나는 다른 낱말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철학에서 개념적 페르소나와 관련된 상황이다. 개념적 페르소나는 마음 또는 사람 또는 개체가 아니다. 오히려 개념적 페르소나는 특수한 방식으로 개념들에 작용하는 규범적 유형이다. 그것은 개념들이 조작되어야 하는 방식을 좌우하는 일단의 규범들이다. 철학에는 세 가지 주요한 개념적 페르소나가 존재하지만, 다른 것들도 존재한다. 우선 철학자라는 개념적 페르소나가 존재한다. 여기서 신중하게 진전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세 가지 개념적 페르소나가 모두 일상 언어에서는 철학자로 불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모든 세 가지의 혼성물들이 형성될 수 있는데, 여기서 어떤 개념적 조작자는 이 문제에서는 철학자이며 저 문제에서는 반철학자이다. 다른 낱말이 필요할 것이다. 철학자는 일단의 규범적 전제들을 지닌 채 개념들에 작용한다. 철학자는 실재, 신(그것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도덕이 합리적이고 주장한다. 그것들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할 때 철학자는 이성과 관찰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알 수 있으며, 모든 참된 주장에 대해 증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는 참된 실재가 존재하며, 실재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는, 우리가 자신의 이성과 관찰을 통해서 실재와 도덕률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를 인도할 지도자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즉, 철학자는 지혜를 추구한다면 모든 사람이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는 자신이 실재, 도덕률 또는 신을 알고 있다고 반드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헤겔은 철학자였다. 스피노자는 철학자였다.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철학자였다. 놀랍게도, 들뢰즈도 철학자인 듯 보인다(그의 스피노자주의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20세기와 21세기에 철학자는 평판이 나빠지게 되었다.

 

반철학자는 매우 다른 것을 주장한다. 나는 이 술어를 바디우에게서 끌어내지만, 역시 그의 사상을 재현할 의도는 전혀 없다. 철학자는 실재가 합리적이고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철학자는 실재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고, 그래서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자는 진리가 존재하며, 정의 또는 실재의 본성에 관해 오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철학자는 의견 또는 억견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자는 우리가 이성에 의해 설득당할 수 있으며 이성으로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철학자는 힘 또는 권력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무언가에 의해 설득당한다면, 그것은 주어진 이유들이 그 주장의 진리를 수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떤 담론에 유혹당하여 이런 식으로 연관되도록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반철학자는 말한다. 나는 호명당해 버렸다. 철학자는 하나의(또는 다중우주 가설에서는 몇 개의)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철학자는 실재란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철학자는 도덕과 정의와 관련된 객관적 진리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반철학자는 관습과 권력이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것들을 증명하려고 시도할 때 철학자는 이성과 관찰을 사용하여(이 행위가 철학 작업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념들에 작용한다. 흄이 반철학자의 일례이다. 니체가 다른 일례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반철학자였다. 보드리야르와 푸코는 둘 다 반철학자였다. 데리다 역시 반철학자였을 것이다. 칸트는 제1 비판서에서는 반철학자였고(매우 이례적인 종류이지만), 제2 비판서에서는 철학자였다.

 

신비주의자는 철학자와 반철학자의 일종의 혼성물이다. 신비주의자는 종교 또는 신화와 철학 사이의 일종의 식별할 수 없는 지점이다. 신비주의자의 조작 양태는 종교적 조작 양태와 비슷하지만, 신비주의자는 여전히 신중한 논변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예시한다.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자는 대(大)진리(일반적으로 신성한 본성을 갖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반철학자와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자는 이 대진리가 이성과 관찰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비주의자는 이 대진리를 아는 데 특수한 만남 또는 직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자는 에피스테메(episteme)가 아니라 그노시스(gnosis)로 교섭한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두 명의 신비주의자는 레비나스(Levinas)와 마리옹(Marion)이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으로, 마리옹은 포화된 현상으로 유명하다. <<논고>>의 끝 부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신비주의자이다. 사건에 대한 신조를 제시할 때 때때로 바디우는 신비주의자인 듯 보인다. <<국가>>의 제6권에서 존재와 이성을 넘어선 선(善)에 관해 말할 때 플라톤은 신비주의자이다. 존재의 부름에 관해 말할 때 하이데거는 흔히 신비주의자인 듯 들린다.

 

철학이 철학자 편만 들도록 반철학자와 신비주의자를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철학이 반철학자와 신비주의자를 추방하려고 할 때마다 철학은 끔찍한 상태에 빠진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세 주체 조작자들은 철학에 중추적이다. 철학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장에 대한 좋은 이유를 제공하며, 그리고 실재, 윤리 그리고 신에 대하여 어떤 주장들은 다른 주장들보다 더 낫고 더 건전할 것이라는 점을 진지하게 고려하도록 끊임없이 추동한다. 반철학자는, 이성이 자체 주장에 대한 논증을 정말로 만들어내는 대신에 특권, 이데올로기 또는 신화만을 제시한 사례들과 이성의 허식을 끊임없이 지적한다. 반철학자는 철학자에서 작동 중인 몽매주의적 근원을 드러내고, 이것에 대응하여 철학자는 더 나아질 수밖에 없다. 흄이 없다면 칸트(철학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는 이성의 한계를 끊임없이 지적하고, 스피노자와 헤겔이 개념적으로 가능한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예를 들면, 신비주의자 괴델) 또는 이성이 결코 접촉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 세 가지 개념적 페르소나는 도처에서 사유를 발명성을 향해 추동하는 상호 간의 긴장을 생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