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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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코츠코: 오늘의 에세이-"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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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28.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All lives matter"

 

―― 애덤 코츠코(Adam Kotsko)

 

미합중국에서 추상적인 자유주의적 보편주의는 객관적으로 친백인적이다. 예를 들면, "흑인 생명은 중요하다"라는 슬로건에 대한 너무나 흔한 백인의 반응, 즉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라는 반응을 고려하자. 그렇다. 내게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신 또는 자연에게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 그런데 미합중국의 법 집행 장치에게 모든 생명이 명백하게 중요하지는 않다. 백인 경찰의 생명이 흑인의 생명보다 훨씬 더 중요해서 백인 경찰이 가장 막연한 위협이라도 그것을 지각했다고 주장하는 한  그 체계는 기꺼이 백인 경찰이 아무 벌도 받지 않은 채 흑인을 살해하도록 내버려둔다. 그런 일에 직면했을 때, "모든 생명은 중요하다"라는 공허한 일반화는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일을 적극적으로 은폐하고 있다.

 

분명히 퍼거슨 경찰국이 폭력을 행사할 계획을 수립하면서 평화를 요청하는 자유주의적인 "위선 공격(hypocricy attack)"도 비슷하다. 역설적이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글쎄, 여기에 속보가 있다. 권력자들은 항상 평화를 자신들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현재 상태로 규정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사물의 자연적 질서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그런 권력에 대한 그 어떤 도전도 그런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현저한 문자 그대로의 폭력에도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시위자들도 권력자들에게는 "폭력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현재 상태의 일상적 현실이 실제적 폭력이다. 위선 공격에 함축된 주장은 두 진영이 준수할 수 있는 어떤 중립적인 "평화"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전투는 평화와 폭력의 바로 그 의미를 둘러싸고 전개된다.

 

또 하나의 일반적인 위선 공격은 경찰이 흑인들을 "보호하고" 있어야 할 때 흑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미합중국―노예들을 수입했고, 노예 소유주들에게 거대한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세워졌고, 거의 백 년 동안 노예제와 관련된 법률을 계속 강요했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파괴적인 전쟁을 치른 후에야 노예제를 포기했고, 그 다음에 흑인들에 대한 법적 차별과 법을 벗어난 테러 행위를 부추기는 일 세기에 걸친 운동에 착수했으며, 시민권 운동의 그다지 높지 않은 성과에 대해서 게토화와 범죄화 운동으로 대응한 국가―에서 경찰은 흑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경찰은 백인들을 흑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흑인의 범죄화는 낡은 편견의 어떤 우연한 산물이 아니라, 경찰이 백인 주류의 눈에 자체의 합법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의 절대적 핵심이다.

 

모든 흑인을 두려워해야 할 잠재적인 범죄자로 끊임없이 묘사한다는 점에서 그런 범죄화는 상징적이다.  감옥 체계와의 접촉이 범죄율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는 때에, 특히 흑인들을 균형이 맞지 않는 비율로, 그리고 매우 어린 나이에 감옥 체계에 체계적으로 복속시키는 형태를 취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너무나 문자 그대로이기도 하다. 그 어떤 다른 유의미한 생활 대안들도 박탈하면서 많은 흑인들을 범죄성이 더 높은 환경에 가두는 사실상의 분리 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시점에서 또 하나의 일반적인 공식은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개념을 환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묘하게도, 이 개념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에 대해 결코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억압자들은 언제나 선택할 필요가 없으며, 바로 그것이 그들의 행위가 아무리 유감스러운 것일지라도 그 행위를 합법화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억압자들은 "선택권이 있고", 그래서 비난받을 만하다. 마지막 분석에서, 그들이 행하기로 "선택"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 때문에 그들은 과실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이  아무 명백한 이유도 없이 그에게 총질을 하고 있던 경찰로부터 달아나기로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그는 살아 있을 것이라는 비정합적인 주장에서 볼 수 있다. 유일한 합법적인 "선택"은 절대적인 굴종이다. 그 어떤 다른 것도 사물의 자연적 질서를 파괴하고, 그래서 폭력적이고, 그래서 위협이 되며, 그러므로 비극적이지만 범죄는 아닌 반응을 유발하게 된다.

 

백인들은 안전과 보안에 대한 자신들의 느낌, 경찰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의식이 가장 운이 좋고 뛰어난 개인들만이 자신들을 구출할 수 있는, 폐쇄 공포증을 유발하는 디스토피아적 상황에 흑인들을 빠뜨리는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헨리 루이스 게이츠(Henry Louis Gates)가 이해했듯이, 하버드 대학에서 미합중국의 지적 엘리트 계급의 정점에 이르더라도 그것이 흑인을 추정 범죄자로 간주되지 않도록 감싸주지 않는다. 그리고 최후의 모욕으로서, 어떤 흑인이 엘리트 계급에 침투하면, 많은 백인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명백히 "자격을 더 잘 갖춘" 백인을 밀어낸 온정적인 "차별 철폐 조치"의 사례로 간주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Django Unchained)>>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연기한 역겨운 노예 소유주는 이렇게 묻는다. "그들은 왜 우리를 죽이지 않는가?" 두드러지게도, 그는 자신이 왜 그들을 노예로 삼는지 묻지 않는데, 그것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렇지만, 내가 대체로 이기적인 그의 질문에 과감히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흑인들이 폭력에 기반을 둔 정치적 안정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정통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인데, 그들은 매일 그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들과 꼭 마찬가지로 나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그들 자신의 폭력을 자연화할 뿐이다. 증거를 살펴보자. 가장 최악의 사례들에서도 탈식민 체제들이 백인들이 전 세계에 걸쳐서 토착민들에게 가한 까닭 없는 참사의 수준에 근접하기라도 하는 범죄를 백인들에게 저지른 적이 있는가? 맬컴 엑스(Malcolm X) 같은 지도자들과 블랙 팬더(Black Panthers) 같은 운동들이 정말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이나 KKK에 필적하는가?

 

흑인들이 백인들을 살해하지 않는 까닭은, 개인적 약점과는 관계없이,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미합중국의 흑인 공동체는 객관적으로 정의의 편에 서 있다. 흑인들은 백인들이 그들 주위에 구축한 기계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체계적인 층위에서 악이 어떤 모습인지 목격했으며, 그리고 압도적으로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모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인 공동체가 "최고의 인재들(best and brighest)", 즉 베트남전의 입안자들을 배출했던 그 시기에 흑인 공동체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과 시민권 운동을 산출했다. 가장 진보적인 백인들도 여전히 인종 차별주의자이고 노예제 폐지를 정의의 종결로 간주했던 남북 전쟁 시기에 흑인 공동체는 자신이 당면한 투쟁 너머를 바라봄으로써 여성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었던 프레더릭 더글러스(Frederick Douglass)를 배출했다.

 

진짜 의문은 백인들이 흑인들을 살해하는 까닭이다. 그리고 결국 그 대답은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영원한 고발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온갖 역경을 딛고 흑인들이 생존하고 있다는 점은 백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인간의 권력도 자체의 한계에 이르고 정의에 대한 요구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살해하는 까닭은 흑인들이 미합중국의 진실이고, 백인들은 그 진실을 증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