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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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첼로 글라이저: 오늘의 에세이-이루어질 수 없는 지식의 통일에 대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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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0.

 

이루어질 수 없는 지식의 통일에 대한 탐구

A Quest For The Unattainable Unification Of Knowledge

 

―― 마르첼로 글라이저(Marcelo Gleiser)

 

최근에 출판된 <<인간 현존의 의미(The Meaning of Human Existence)>>라는 책에서 저명한 진화생물학자, 곤충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과학과 인문학의 통일―1998년에 출판된 <<통섭: 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이라는 책에서부터 인기를 얻은―을 향한 가능한 길을 그리는 데 착수한다. 만약에 성공한다면 우리는 인간 현존의 의미에 대한 깊이 변형된 이해에 틀림없이 이르게 된다고 윌슨은 주장한다.

 

대단히 모험적이며, 그리고 <<인간 현존의 의미>>가 전미 도서상의 최종 후보 명단에 올라갔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윌슨의 산문은 정말 탁월하고 매혹적이다.)

 

<<통섭>>에서 윌슨이 주장했듯이, 출발점은 하버드 대학의 과학사학자 제럴드 홀턴(Gerald Holton)이 "이오니아의 마법(The Ionian Enchantment)"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관념―자연의 명백한 다양성의 배후에는 단순한 통일된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인 밀레투스의 탈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실재의 물질적 측면에 주로 관심이 많았던 탈레스는 모든 물질은 물일 뿐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주장의 의미는 물리적인 것이라기보다 철학적인 것이다. 요점은 우리가 바깥에서 지각하는 혼돈의 깊은 곳에는 근본적인 통일된 구조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구조에서 비롯된다. 그 구조에 도달한다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까지, 전자에서 사랑까지 현존의 신비를 파악할 것이다.

 

윌슨에 따르면 이오니아의 마법은 과학을 종교적 탐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다음과 같은 것이 이오니아의 마법의 원천이라고 나는 믿는다. 계시보다 객관적 실재에 대한 탐구를 선호하는 것은 종교적 갈망을 충족시키는 다른 한 방식이다."

 

윌슨의 접근 방식은 환원주의가 지식을 지배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물리학이 상향식으로 규칙들을 설정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과학의 통일은 물리학에서 시작하여 물리학에서 끝난다. 아무튼 논증은 이렇다. 우리는 물질의 기본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이런 입자들의 거동을 관장하는 법칙들을 이해하는 것이 여타의 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계획은 먼저 물리학을 통일하여 여타의 물리과학으로 외삽한 다음에 생물학과 신경과학으로 외삽하는 것이다. 일단 그 계획을 달성하게 되면 우리는 인간 감정의 근본적인 특질을 명료하게 이해할 것인데, 그러면 거의 끝나게 된다. 그리고 인문학이 인간 뇌의 산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인문학 역시 지식의 통일에 대한 이런 전면적인 접근 방식에 의해 포괄될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물리학의 통일과는 별개로, 과학자들은 인문학자들이 합류하여 자신들의 분과학문들에 관한 이런 새로운 사고방식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납득시켜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 행운을 빈다.

 

윌슨은 인문학을 접하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정반대로 그는 인문학을 찬양한다. "인문학은 문화의 자연사이며, 우리의 가장 사밀하고 소중한 유산이다."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 이름이 말하듯이, 인문학은 인간의 진화 역사에서 개시된, 인간 정체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전적으로 올바르게도,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사 시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윌슨은 주장한다. 예술을 창출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이백 만 년에 이르는 영장류 이족 동물의 계보로부터 서서히 호모 사피엔스를 주조한 긴 진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빅뱅에서 시작하여 물질의 기원, 생명의 기원, 복잡한 생명의 기원, 인류의 기원, 한 종으로서의 인간의 창의적인 결과물까지 이어지는 계보가 있다. 이것이 윌슨이 추구하고 있는 통섭인데, 즉 우주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일인가? 나는 윌슨의 탐구에 깊이 공감한다.

 

"[통섭은] 영혼을 구하고자 하는 것, 즉 인간 정신의 굴복이 아니라 해방을 구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인식했듯이, 그것의 중요한 신조는 지식의 통일이다. 어떤 지식을 충분히 통일했을 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왜 여기에 존재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슬프게도, 그 탐구는 원칙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윌슨의 논증의 출발점인 물리학의 통일이라는 관념이 인식론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는, 인간이 실재에 대한 통일된 견해를 구성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성사학자인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지적했듯이, 이오니아의 마법에 대조되는 이오니아의 오류(Ionian Fallacy)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지식의 절대적인 통일된 표현이 현실적인 목표라는 가정이다. 완전성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그 어떤 지식 체계도 지식이 획득되는 방식을 분명히 간과하는데, 이 점은 <<지식의 섬(The Island of Knowledge)>>이라는 책에서 자세히 서술된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드 퐁트넬(Bernard de Fontenell)이 지적했듯이, 모든 철학은 단지 두 가지 것, 즉 호기심과 근시안의 산물이다. 바로 그 본성상 지식 획득은 분기 현상인데, 더 많이 알수록 알아야 할 것이 더 많이 있다고 깨닫게 된다.

 

물론, 자연 현상에 대한 단순한 포괄적인 서술들을 찾아내려는 추세가 존재하며, 그리고 이것이 물리학의 배후에서 이끄는 힘이다. 그런데, 말하자면, 우리가 그 길의 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것은 소박하다. 기껏해야 우리는, 기본 입자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한정된, 가까이 있는 물리적 지식에 대한 잠정적인 통일된 서술을 획득할 수 있다. 그것과 더불어 우리는 새로운 도구나 가정이 이 구조를 해체하고 더 넓은 입장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일례로 지난 500년간 중력이 어떻게 서술되었는지 고찰하자. 먼저 자연적 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형식으로 서술된 다음에 뉴턴에 의해 원격 작용으로 서술되었고, 그 후에 시공간의 곡률이라는 아인슈타인적 형식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중력의 본성이 재고되고 있는데, 그것은 여타의 힘들과는 같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이다.

 

인간들이 실재의 궁극적 본성에 닿을 수 있다고 예상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인간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불가사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물리과학의 통일을 제한하는 것과 관련된 또 하나의 문제는 복잡성이라는 쟁점이다. 우리 모두가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라도, 원자물리학을 사용하여 인간의 생리학을 서술할 수는 없으며, 인간의 행동은 더더욱 서술할 수 없다. 물질이 더 복잡한 구조로 응집됨에 따라 상이한 법칙들이 요구되며, 그리고 이런 법칙들은 매끈한 연속적인 방식으로 이전 법칙들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들은 새로운 법칙들인데, 자체의 존재론적 역능을 갖추고 있다. 윌슨의 영토로 진입하면, 개미의 총체적인 집단 행동은 개미 개체의 세포적 수준에 적용되는 대사 규칙들과 매우 다르며, 개미를 구성하는 매 원자 속의 원자 핵의 특성들과는 훨씬 더 급격하게 다르다. 이것이 맞지 않다면, 생물학자들은 모두 양자역학 전문가이어야 할 것이다.

 

원칙적인 한계점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언급되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도 지식의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저쪽에 존재하는 것의 일부만 탐사할 수 있는 기술적 한계에 묶여 있다. 더 많이 본다는 것이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과학의 현재의 난제들 가운데 일부를 해결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윌슨은 분명히 낙관주의자이다. 지적 기계가 곧 출현할 것이라는 윌슨의 확신에 대해 나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

 

"대부분의 블루 칼라 및 화이트 칼라 노동자 인간들보다 더 빨리 생각하고 더 효율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로봇들... 현재 이런 구상된 진전들은 과학소설의 제재이다. 그런데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몇 십년 안에 그런 로봇들은 현실이 될 것이다."

 

윌슨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체스 장인을 패배시킬 수 있는 컴퓨터와 자체의 규칙 집합을 만들어내고 지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적인 기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확실히, 기계가 학습할 수 있게 만드는 세포 자동자(cellular autimata) 알고리즘들이 존재한다. 기계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그 과정에 기반을 둔 어떤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런데 세포 자동자는 인간 지능과 동일하지 않다. 세포 자동자는 감정을 느끼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인간처럼 주관적인 자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복잡한 감정은 처리 속도나 기계 학습의 기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많은 마음의 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메커니즘을 규명하는 것과 마음이 뇌로부터 창발되는 방식을 규명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알바 노에의 에세이를 보거나, 또는 콜린 맥긴, 데이비드 차머스, 토머스 네이글 그리고 스티븐 핑커를 비롯한 이른바 신신비주의자들의 에세이를 보라.) 또한 우리는 기계가 인간의 몸에 대한 감각 없이 인간의 마음을 흉내내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지 못한다.

 

어떤 종류의 지식의 통일은 존재할 수 있는가? 그 쟁점에 관해 생각하는 한 방식은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공통 추세, 즉 모든 인간을 규정하는 본질적인 충동―학습하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자신이 속한 부족의 구성원들과 유대를 창출하는 것, 이런 유대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것이다. 전부를 알고자 하는 희망, 지식의 거대한 체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희망은 내게 부질없는 희망인 듯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끝에 이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탐색하고 성장하도록 앎의 다양성과 지식의 불안정한 본성을 찬양하기를 바란다.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하는데, 과학은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제공한다. 물론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나의 직업적 삶을 그것에 헌신했다. 철학자 제리 포더(Jerry Fodor)가 한때 적었듯이, "과학의 성공과 과학의 통일은 별개의 것이다." 과학이 인간 창조성의 기원들을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인문학이 인간들이 창조하는 방식들을 확장하고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을 넘어서 사색할 수 있는  바로 그 인간적 능력의 진정한 강점은 인간들은 제기되는 모든 의문들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들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지식의 불완정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