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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부인주의의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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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8.

 

부인주의의 다양성

The varieties of denialism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나는 클라크 대학교에서 개최된 "부인을 지어내기(Manufacturing Denial)"에 관한 고무적인 학술회의에서 방금 돌아왔는데,  그 학술회의에서는 부인주의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적극적인 집단 또는 개인들이 사실적 증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위의 근저에 놓여 있는 충분히 정합적인 현상일 것이라는 관념을 탐색하기 위해 대단히 다양한 분과학문들―집단 학살 연구에서 정치학과 철학까지―의 학자들이 모였다.

 

애초에 이 에세이에서는 인지적 편향(cognitive bias)을 거론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것이다. 부인주의는 반대 증거를 무시하고자 하면서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인간의 경향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믿고 싶은 것과 세계의 모습 사이의 불일치를 합리화할 수 있는 지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능력도 거론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것들은 모든 인간에게 꽤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들은 무엇이든 우리 의견이 불일치하는 것에 관한 정상적인 논의 과정에서 설명될 수 있고 최소한 부분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

 

오히려, 옥스퍼드 사전은 부인주의자를 "대다수의 과학적 증거 또는 역사적 증거에 의해 지지되는 개념이나 명제의 진실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다른 층위의 인지적 편향이나 합리화를 나타낸다. 그것을 스테로이드에 대한 집착으로 간주하자.

 

그 학술회의는 "부인이라는 난제: 사람들이 불쾌한 사실들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이유"에 관한 강연으로 기조를 정한 브렌던 니한(Brendan Nyan)의 유쾌한 기조 연설을 시작으로 부인주의라는 주제를 탐색했다. 이 강연이 끝난 후에 세 개의 강연으로 구성된 세 개의 세션―부인의 현대 전략과 수사학, 부인의 정치적 용도 그리고 부인에 맞서기: 어떻게 그리고 언제?―이 이어졌다. [...]

 

부인주의에 관해 논의하는 동안 명료해진 처음 두 가지 사항이 특히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나를 불안하게 한다. 첫째, 과학자로서, 실제로 그것은 결코 사실과 관련된 문제가 아닌데, 그래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반생산적인 효과를 낳게 되어 부인주의자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게 만든다.

 

물론 이것이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 기후 변화가 실재적이고, 또는 진화가 타당한 과학적 이론이며, 또는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이 사실상 집단 학살이라는 생각을 관철하고 싶다면, 가능한 한 직접적으로 사실을 입수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지적 정직성과 관련된 순수하고 단순한 문제이다. 그런데 반대편에 사실을 설명하는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허술한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여러 해 동안 창조론자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배운 교훈이다. 논쟁은 테스토스테론이 혈관 속으로 분출되고, 우군((예컨대, 모금 활동으로 도움을 주는)를 규합할 수 있으며, 주제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방청객들과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장악할 수도 있는 즐거운 행사이다. 논쟁이 확실히 하지 못하는 것은 논적 또는 그의 헌신적인 지지자들 가운데 누군가를 납득시키는 것이다. 사실상 논쟁가(창조과학연구소의 듀안 기쉬와 디스커버리 연구소의 조너선 웰스에 맞선)로서 내가 겪은 최고의 순간은 이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청중에게 증명할 수 있었을 때이다. 바보처럼 취급당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창조론자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자로서 나는, 부인주의는 비판적 사고와도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나를 약간 더 불안하게 하는 것이라고 알아챘다. 논리적 오류에 관해 가르치는 것은 과학적 사실에 관해 가르치는 것보다 결코 더 낫지 않을 것이다. 사실상 부인주의자들이 적들에 맞서서 비판적 사고의 어휘를 사용하는 것을 익혔다는 문헌으로부터의 증거는 압도적이다. 물론 애초에 그들은 자신을 "회의주의자"로 간주하고, 그래서 유서 깊은 철학적 유래를 갖추고 있으며 어떤 주어진 문제에 대한 신중한 합리적인 접근 방식을 가리키는 낱말을 전유하려고 시도한다. 데이비드 흄이 서술했듯이, 현명한 사람(즉, 진정한 회의주의자)은 자신의 믿음을 증거에 맞출 것이다. 그런데 진화, 기후 변화, 백신 접종 등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들에는 흄적인 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인주의자들은 비형식 논리학의 전문 용어를 전유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기후 과학자들이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너무나 즐겁게 "권위로부터의 논증!"이라고 소리친다. 석유 산업체와 그들이 지원하는 "두뇌 집단"에서 비롯되는 진술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 그들은 "발생적 오류!"라고 반박한다. 기타 등등. 그들은 비형식적 오류들이 어떤 배경 정보에 대해서만 성립하며, 그리고 자금이 풍부하고 명백한 이권이 걸려 있는 대규모 조직체들에 대해 의혹을 품는 것뿐 아니라 어떤 권위자들을 신뢰하는 것(최소한 잠정적으로)도 현저하게 분별이 있고 합리적이라는 점을 전혀 유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쩔 것인가? 사실과 기초적 논리를 넘어서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게 할 어떤 공통점들을 부인주의의 사례들 전체에 걸쳐 드러낼 수 있는가? 그 학술회의의 참가자들은 매우 다양한 부인주의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부인주의적 정체성을 핵심적인 방식으로 규정하게 하는 매우 강한 압도적인 이데올로기적 신념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이런 신념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일 수 있지만, 모든 경우에 그것은 관련자들의 개인적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형성하고, 따라서 강한 정서적 애착을 생성할 뿐 아니라 비판자들에서 대해서 마찬자기로 강한 정서적 반감을 불러 일으킨다. "저는 과학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제 아들이 제 과학입니다"라는 제니 매카시(Jenny McCarthy)의 상투어, 또는 좌파 환경주의자들은 미합중국식 생활 방식의 기반을 약화시키기 위해 나선다고 확신하는 사람들, 또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오토만 제국의 학살을 인정하는 것을 터키 민족 국가라는 바로 그 관념에 영구적인 도덕적 오점을 새기는 것과 동일시하는 터키 정부, 또는 다윈의 이론을 수용하는 것을 신을 부정하는 것, 도덕의 종말 그리고 삶의 의미의 파괴와 동일시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에 관해 생각하자. 그런 이유 때문에 부인주의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사실과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을 뿐이다(또는 거의 없다).

 

이해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쟁점은, 부인주의자들은 과학적 또는 역사적 발견물의 본질적으로 잠정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신조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관련 전문가들(즉, 기상학자, 의사 또는 박사학위를 소지한 사람들의 무작위적인 조립체가 아니라 기후과학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압도적인 합의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은 인간의 인식적 활동이고, 그래서 과학 자체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전에 과학자들은 틀린 적이 있으며, 확실히 미래에도 여러 번 틀릴 것이다. 그러나 그 쟁점은 오히려 여러분의 추측을 무엇―과학 공동체 아니면 폭스 뉴스―에 근거하여 베이즈주의적으로 갱신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행위인가라는 쟁점이다.

 

물론 이런 태도는 경험적 기획이자 이론적 기획으로서의 과학의 바로 그 본성에 대한 빈약한 이해를 나타낸다. 나는 합리적인 사람들―최소한 그들이 우리 사회 같은 복잡한 사회에서 얼마나 잘 추리하며 기능할 수 있는지에 의해 판별되는―에 의해 정말 진지하게 명백히 발설되는 "진화는 이론일 뿐입니다"라는 상투어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더 전통적인(일반적으로 선생과 학생 모두에게 꽤 지루한) 과학 교육과 대립되는 "과학 감상(science appreciation)"이라는 수업을 가르치자는 생각이 마음에 든다. 과학 분야을 전공하지 않을 것이라면, 많은 과학적 사실을 뇌 속에 밀어 넣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지만, 과학적 기획의 내부 작동 방식(그리고 한계점들)뿐 아니라 아름다움에 노출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것은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 글쓰기―너무나 흔히 제시되는 그림이 사실로 주장되는 추측들 가운데 하나(끈 이론을 생각하자)이며, 독자들에게 결과는 전달하지만 그것에 이르게 된 지저분한 매혹적인 과정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과학은 인식적 성직자들이 획득한 거의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실패와 발견에 관한 인간의 이야기로 그려져야 한다.

 

또한 부인주의자들은 매체가 사실을 제시함에 있어서 자체적으로 부과한 "균형 잡힌" 접근 방식을 활용하는데, 이런 접근 방식은 모든 논쟁에 대해서 거의 동등한 두 가지 견해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그릇된 인상을 낳는다. 이것은 꽤 최근에 일어난 현상인데, 매체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인자들의 결과물일 것이다. 물론 한 인자는 박학자에 대한 유해한 의존으로 돌아가는 24시간 매체 주기가 개시된 것이다. 다른 한 인자는 예전에 보도와 사설 사이에 그려진 상당히 선명한 경계선이 점점 더 흐려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사설난에 실린 의견들은 진지한 뉴스 매체라면 어느 매체에서도 균형 잡힌 방식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물론 사실이 그 어떤 이론적 맥락과 심지어 때때로 이데올로기적 맥락도 없이 세계 저쪽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사실은 의견이 아니다. 사실상, 사실과 의견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바로 전통적 매체들이 그 둘을 가능한 한 별개의 것으로 유지해왔던 이유이다. 훌륭한 보도에 의해 이데올로기적 배경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지의 범위 내에서 가능한 정도만큼 사실적 정보를 얻게 된다. 그 다음에 그 보도를 더 넓은 맥락에서 바라보기 위해 논평 기사(바라건대 통찰력이 있는)를 참조한다.

 

물론 매체와 관련된 문제는 현대 저널리즘에서 진행 중인 위기에 의해 훨씬 더 악화되는데, 신문, 잡지 그리고 심지어 텔레비전 채널들도 "공짜" 정보(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다면, 공짜 정보 같은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전자 시대에 어떻게 적응할지 알지 못한 채 항상 불확실한 수익 전망에 직면한다. 이 쟁점의 점점 더 흥미롭고 문제적인 측면은 블로그권(blogosphere)의 등장으로 대표된다(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십 년 이상 동안 자신의 블로그를 운영해온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웹진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블로그는 보도 기사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데, 보도는 많은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블로그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진행 중인 사회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반면에, 질 관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떄문에 총체적인 불협화음도 증가한다.

 

십여 명의 연사들로 한정된 하루 행사의 경우에 충분히 자연스럽게도, 클라크 대학교에서 개최된 학술회의 동안 그 문제와 크게 관련되어 있지만 다루어지지 않은 몇 가지 측면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마지막 요약 좌담회 동안 조안나 볼하르트(Johanna Vohardt)는 심리학자들이 부인주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보충이 되는 것을 확실히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나는 사회학자들도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특히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고전적 저작 이래로 잘 알려져 있으며 부인주의라는 쟁점에도 분명히 적용되는 미합중국의 반지성주의에 대한 연구의 맥락에서 그렇다.

 

사실상 부인주의 연구(나는 이런 술어를 사용하게 되어 꽤 기쁘다!)는 대단히 다학제적인 분야인데, 주요한 기여 학문들 가운데 몇 가지만 언급하면, 사학, 정치학, 법학, 자연과학(물리학에서 생물학까지), 심리학, 사회학, 철학(정치절학에서 윤리학과 인식론까지 다양한 형태로)을 포함하는, 거의 확실하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다학제적인 분야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한 번만,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 모두와 관련된 긴급한 쟁점들을 직접 다루는 분과학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실제로 해야할 일에 관해 많은 제안을 하게 된다. 우선, 그 싸움은 관성, 역발상주의 그리고 기득권에 맞서 사회를 개선하기를 바랄 때마다 전진과 후퇴로 특징지워질 장기적인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강조하고 기억해야 할 많은 명백한 승리, 또는 최소한 확실한 진전도 이루어졌고, 그래서 희망에 대한 합리적 근거가 존재한다.

 

깨달아야 할 첫 번째 것은, 대중의 개별 구성원들을 설득하는 것에서 정치 엘리트와 매체 엘리트를 책임있게 만드는 것으로 초점을 옮기면 모든 다양한 형태들의 부인주의를 저지하는 것이 더 성공적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브렌던(Brendan)의 연구에서 비롯된 주요한 결과이다. 그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을 예증하는 일련의 데이터 집합을 보여주었다. 첫째, 일반 대중의 대부분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사실들이 제시되는 것에 반응하지 않으며,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실상 자기 입장을 더욱 더 고수할 확률이 더 높다.

 

둘째, 정치인이나 매체에 압력을 가할 수 있을 때마다 그들은 어조를 바꾸어 더 합당해지고 참으로(억지스럽지 않게) 균형잡힌 방식으로 상황을 제시한다.

 

세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대중은 통일된 정치 지도력의 뒤에 재빨리 결집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정치학 연구로부터 얻어졌다. 현재 가늠하기가 상당히 힘들지만, 이것은 꽤 최근의 시기에도 여러 번 일어난 적이 있다. 지도자들이 정말로 이끌 때 인민들이 따르는 것은 거의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근자에 워싱턴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단적인 당파적 언쟁 때문에 양대 정당은 과거에는 명백히 갖추고 있었던 공통 기반에 근거를 두고 전혀 협의할 수 없게 되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ci)와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가 공동으로 출연한 기후 변화에 관한 텔레비전 광고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그 문제를 마침내 인식하고 해결하기 시작할 아름다운 생산적 시기의 개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대신에 그것은 1990년대에 유명한 공화당의 의회 장악 시기 동안 바로 깅그리치의 분열적 태도에 의해 시작된 일종의 신랄함이 익사시킨 마지막 필사적인 헐떡임이었다.

 

부인주의와 관련하여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이 있다. 성공적인 사례들에 관한 상세한 연구로부터 배워서 무엇이 작동하고 그것이 다른 사례들에도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 학술회의에서는 아마도 이런 장르의 최선 사례인 것―담배 산업의 큰 낭패, 특히 담배 산업 운영자들이 흡연의 위험성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공식적으로는 계속 부인한 점을 예증하는 내부 문건들이 공개된 후의 큰 낭패―이 자세히 논의되었다. 사실상, 담배 사업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한 최초의 건강 보도들(일찌기 1952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담배로 인한 암"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담배 산업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에 대한 담배 산업의 대응에 관한 이야기는 대다수의 부인주의적 반응들에 대한 청사진을 제공한다. 최근에 개봉된 다큐멘터리 <의혹을 팝니다(Merchants of Doubt)>는 담배 회사들이 회의주의를 퍼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데, 과학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홍보 활동을 펼친 후에 흡연과 암 사이에는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홍보 활동에서 제기했다. 익숙한 듯 들리는가? 이것은 기후 변화와 관련하여 석유 산업에 의해, 또는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에 의구심을 제기하기 위해 터키 정부에 의해 적절히 사용되는 바로 그 각본이다.

 

그리고 집단 학살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적 구조를 고치기 위해 그런 사건들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한 정부들의 명백히 성공적인 이야기들도 존재한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일이 홀로코스트를 처리한 방식을 지적할 수 있지만, 더 최근에 그리고 아마도 더 흥미롭게도 르완다 정부의 행동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르완다와 터키 사이의 차이는 왜 존재하는가? 무엇이 작동했는가? 어떤 종류의 압력 또는 문화적 상황이 상이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일이 있다. 동지들을 찾기. 진화 부인―그것에 대해서 나는 가장 직접적인 경험이 있다―의 경우에, 도킨스 같은 거슬리는 무신론자(또는 비교적 사근사근한 인물조차도)가 창조론자들과 직접 교전하는 것은 전적으로 반생산적이라는 점이 내게 점점 더 명백해졌다. 성직자(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위한 미국인 연합의 배리 린이 떠오른다)와 종교적인 과학자들(예를 들면, 켄 밀러)이 교전을 벌이게 할 때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것은 도킨스나 내가 공공 담론에 아무 기여도 하지 않는다고 시사하는 것은 아닌데, 물론 우리는 기여한다. 그런데 우리의 청중이 누구인지, 그리고 특히 우리가 청중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조"에 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교육자이고, 그래서 자신이 백치이거나 무식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게될 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상 업무에 관한 언급. 클라크 회의 동안 참석자 마크 매미고니언(Marc Mamigonian)이 지적했듯이, 진화에 관련된 것이든 기후 변화 또는 집단 학살에 관련된 것이든 간에 부인주의에 관한 토론들은 학문의 자유와 학문의 정직성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필요로 한다. 한편으로, 부인주의자들의 학문적(그리고 비학문적) 언론의 자유는 보호되어야 한다. 나는 홀로코스트의 부인 같은 어떤 유형들의 부인주의를 범죄화하는 법률―유럽과 캐나다에서 널리 제정된―에 단호하게 반대한다. 그런 법률들은 정부와 대학 행정가들에 의해 파시스트적인 언론 통제로 귀결될 불안정한 경사지에 명백히 자리잡고 있다(역설적으로, 언론의 자유에 대해 미합중국 법률이 취하고 있는 더 자유주의적인 견해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합중국에서는 그런 특수한 위험이 실현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아진 듯 보인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 조직, 강단인 그리고 대학 출판사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데, 특히 그들이 행하거나 말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라는 권리의 이면이어야 하는 정직성에 대한 의무에 위배될 때 그래야 한다. 예를 들면, 학술회의에서는 유타 대학 출판사의 한 특수한 편집자에 의해 강화된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에 대한 체계적인 부인에 관한 논의가 많이 이루어졌다. 사실을 의도적으로 잘못 규정하는 그런 사례들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가? 또 다시 성공적인 선행 사례들이 길을 인도한다. 몇 년 전에 프린스턴 대학이 비슷한 논쟁에 휘말렸는데, 논거가 탄탄하고 잘 연구된 공개적인 검토와 논평들이 쏟아짐으로써 사실상 프린스턴 대학은 창피를 당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강단 밖에서는 의회 앞에서 (선서한 상태에서)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담배 회사들의 최고 경영자들에 대한 악명 높은 사례가 존재한다. 후자 같은 유형의 경우에 취할 수 있는 가능한 법적 행위 외에, 당시에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늦은 밤 코미디언들에 의해 그런 신사들(나는 상당히 역설적으로 이 낱말을 사용한다)에 쏟아진 조소, 즉 그런 개인들이 타당한 부인 가능성을 넘어서 버렸다는 점을 대중에게 매우 분명하게 만든 조소였다.

 

부인주의와 관련하여 실수하지 말자. 다양한 형태의 부인주의는 유해한 사회 현상이며 우리 사회에 대해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이 세상을 우리 모두에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한 싸움에 가담할 전문성과 체력을 갖추고 있는 모든 진지한 공공 지식인들―강단인이든 아니든 간에―의 집결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가장 확실하게 싸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