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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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피글리우치: 오늘의 에세이-과학들의 (비)통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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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6.

 

과학들의 (비)통일에 관하여

On the (dis)unity of the sciences

 

―― 마시모 피글리우치(Massimo Pigliucci)

 

현업 과학자로서 항상 나는 과학으로 불리는 한 가지 것, 한 유형의 활동이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더 중요하게도, 나는 생물학자이지만, 모든 것은 결국 물리학으로 환원되며―최소한 원칙적으로―"만물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전적으로 일리가 있다는 물리학자들의 관념을 자동적으로 수용했다.

 

그때 나는 존 뒤프레(John Dupre)의 <<사물들의 무질서: 과학의 비통일에 대한 형이상학적 토대(The Disorder of Things: Metaphysical Foundations of the Disunity of Science)>>를 읽었는데, 그 덕분에 나는 멈추고 생각하게 되었다(물론 이것은 그 책의 결론을 거부하든 말든 간에 훌륭한 책의 특징이다).

 

그의 참신한, 그리고 확실히 의식적으로 우상파괴적인 어조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실제로 많이 알고 있어서 그 철학자가 제대로 해냈는지(그는 대체로 해냈다) 여부를 판단할 좋은 위치에 있는 집단 유전학 같은 주제들이 많이 다루어지고도 있기 때문에 나는 존의 책이 설득력이 있다고 알아챘다.

 

<<사물들의 무질서>>에서 뒤프레의 전략은 환원주의라는 관념이 생물학에서 어떻게 작동하지 않는지 보여줌으로써 그 관념을 공격하는 것이다. 그 저자는 통일된 과학적 방법(오늘날 과학철학자들 사이에서 꽤 표준적인 입장)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에 이어서 과학들에 대한 다원주의적 견해를 옹호하는데, 그 견해는 더 분별 있는 형이상학(우주와 그것의 비품들에 관해 사유하는 완전히 동등한 수많은 방식들이 존재하게 하는, 과학들이 "자연을 절단하는" 그 어떤 "이음매"도 없다)뿐 아니라, 과학들이 자체적으로 세계에 관해 발견하고 있는 것(서로 점점 더 단절되는 분과학문들이 증식되고 서로 완강하게 환원될 수 없는 새로운 설명 원리들의 생산된다)을 모두 반영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주로 존의 책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가 "특수 과학들(또는 작업 가설로서의 과학의 비통일)[Special siences (or: the disunity of science as a working hypothesis)]"이라는 제리 포더(Jerry Fodor)의 고전적 논문을 <<물리학의 법칙들은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가(How the Laws of Physics Lies)>>라는 낸시 카트라이트(Nancy Cartwright)의 영향력 있는 책―둘 다 <<사물들의 무질서>>보다 먼저 발표되었으며 분명히 그것에 영향을 미쳤다―과 함께 다시 읽는 동안 형성되었다.

 

본질적으로 포더의 표적은, 자연과학은 (잠재적으로) 각각의 다음 층위로 환원될 수 있는 분야와 이론들의 위계를 형성함으로써 결국 근본적으로 기초 물리학에 귀결되는 일련의 환원을 구성한다는 논리실증주의적 관념(수십 년 전 일어난 논리실증주의의 철학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압도적으로 공통적인)이다. 그래서, 예를 들면, 사회학은 심리학으로, 심리학은 생물학으로, 생물학은 화학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고 나면 거의 다 온 셈이다.

 

그런데 도대체 "환원하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소한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포더는 후속적인 기술적 구별짓기를 실행했는데, 여러분은 그의 원래 논문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것들을 존재론적 환원과 이론적 환원으로 부르자.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주 속 만물이 동일한 실체―그것이 쿼크이든 끈이든 막이든 또는 심지어 수학적 관계이든 간에 ―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물론 예외는 실체 이원론자들이다). 게다가 복잡한 것들은 단순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유기체들의 개체군은 개체들의 집합체일 뿐이고, 원자는 입자들의 집단일 뿐이다. 기타 등등. 포더는 이런 종류의 환원주의에 반대하지 않으며, 나도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론적 환원은 전적으로 다른 짐승인데, 예컨대, 과학적 이론들은 "세계 저쪽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가정과는 대조적으로, 가장 명백하게도 이론적 환원이 존재론적 환원에서 논리적으로 비롯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론적 환원은 논리실증주의의 성배(결코 얻지 못한)였는데, 그것은 모든 과학적 법칙들을 더 낮은 층위의 법칙들로 환원하여 결국에는 물리학의 언어로 표현되는 참된 "만물 이론"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다. 포더는 이것 역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나는 그것에 관해 더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동의하게 된다.

 

그런데, 전형적으로 과학에서의 이론적 환원을 의문시하면 의심하는 듯한 시선과 재빠른 반례에 직면하게 된다. 화학을 보라! 그것은 성공적으로 물리학으로 환원되어 버렸다! 사실상 화학과 물리학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아무 구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움직임과 관련하여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첫째, 그 사례 자체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둘째, 그것이 참일지라도, 그것은 거의 틀림없이 규칙이라기보다는 예외이다.

 

스탠퍼드 철학 백과사전의 화학의 철학이라는 항목에서 마이클 와이스버그(Michael Weisberg)와 동료들이 적고 있듯이, "많은 철학자들이 화학은 이미 물리학으로 환원되었다고 가정한다. 과거에 이런 가정이 매우 만연하여 화학의 물리학으로의 환원이 완결된 것처럼 "물리/화학적" 법칙과 설명들에 관해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화학의 철학자들 대부분은 화학이라는 과학과 물리학이라는 과학 사이에 아무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수용할 것이지만, 통일에 관한 더 강한 개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은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았으며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믿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에 관해 궁금하다면 와이스버그와 동료들이 인용한 문헌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지만, 이 글의 목적을 위해서는 추정된 환원이 화학의 철학자들 "대부분"에 의해 의문시되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아, 그리고 궁금하다면, 나의 전공 분야와 더 가까운 멘델 유전학도 분자 유전학으로 환원되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는 더 나쁘다. 자신의 1974년 논문의 바로 서두에서 포더는 이렇게 서술한다.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의 전형적인 테제는 특수 과학들[즉, 비(非)기초 물리학을 비롯한 기초 물리학이 아닌 모든 것]의 모든 참된 이론들은 장기적으로 물리적 이론들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목표는 경험적 테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을 지지하는 증거의 일부는 열에 대한 분자론과 화학 결합에 대한 물리적 설명 같은 과학적 성공 사례들에 의해 제공된다. 그런데 환원주의적 프로그램의 철학적 대중성은 이런 성취들에 대한 준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최소한 특수 분과학문들의 물리학으로의 환원만큼 흔히 그런 분과학문들의 증식이 나타났고, 그래서 환원에 대한 널리 퍼진 열정이 과거의 성공 사례들에서 단순히 귀납된 것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여기서 나는 앞에 언급한 뒤프레를 반영하여 포더보다 더 나아갈 것이다. 과학의 역사는 이론적 층위에서 성공적인 환원 사례들보다 더 많은 발산 사례들―개별 "특수" 과학들 내부에서 새로운 이론들의 증식을 통해서―을 산출했다. 오히려 귀납(induction)은 정반대로 이루어진다.

 

사실상 "기초" 물리학이 매우 기초적이라는 관념에 대한 최소한 어느 정도의 회의주의로 경사된 듯 보이는 과학자들도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앞에서 언급된 사소한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렇다. 모든 것은 쿼크, 또는 끈, 또는 막, 또는 다른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다.) 1990년대로 돌아가서, 초전도 초대형 충돌기(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의 건설과 관련된 유명한 논쟁을 기억하자. 이것은 최근에 힉스 보존의 발견으로 이어진 대형 강입자 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에 앞서 제안된 것이었고, 그 계획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미합중국 의회에 의해 거부당했다.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는 그 계획을 위해 의회 앞에서 증언했지만, 덜 알려져 있는 것은 SSC에 반대하는 증언을 개진한 물리학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논변은 기초 물리학이 물리학의 나머지 부분―생물학이나 사회과학은 말할 것도 없이―과 점점 더 무관해지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믿기 어려운가? 1972년에 이미 고체물리학자 필립 W. 앤더슨(Philip W. Anderson)이 다음과 같이 서술했는데, 그것은 나중에 그가 SSC 청문회에서 와인버그에 맞서 사용한 논변의 전조가 되었다. "기본 입자 물리학자들이 근본적인 법칙들의 본성에 관해 더 많이 말할수록, 그것들은 과학의 나머지 부분의 실제 문제와 더욱 더 무관해지는 듯 보인다." 만물에 대한 근본적인 이론의 경우에는 정말 그렇다.

 

다시 포더로 돌아가서 그의 1974년 논문에서 다시 그가 이론적 환원에 회의적인 까닭을 알아보자.

 

"신경 체계의 기능적 분해가 자체의 신경학적(해부학적, 생화학적, 물리적) 분해에 대응하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후자 대신에 전자를 연구할 인식론적 이유들이 존재할 뿐이다[오로지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심리학은 물리학으로 수행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너무 다루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응성이 없다면 어쩔 것인가? 신경 체계의 기능적 조직이 자체의 신경학적 조직를 횡단한다고 가정하자(그래서 전적으로 상이한 신경학적 구조들이 시간 또는 유기체들에 걸쳐서 동일한 심리학적 기능들을 조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심리학의 현존은 신경들이 대단히 슬프게도 작다는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경학이 심리학이 필요로 하는 자연 종들을 상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동일한 논문에서 이 단락 바로 앞에서 포더는 훨씬 더 흥미로운 관련 주장을 제기한다.

 

"물리적 입자들이 매우 작지만 않다면(누군가가 쳐다볼 수 있도록 뇌가 외부에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고생물학 대신에 물리학(심리학 대신에 신경학, 경제학 대신에 심리학, 기타 등등)을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현 상태 그대로 관찰 가능하도록  뇌가 외부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신경학적 사건들의 심리학적 분류에 적절한 이론적 장치가 없다."

 

내가 받아들이는 그 생각은, (예를 들면) 와인버그 같은 물리학자들이 내게 (션 캐럴이 주최한 자연주의 워크숍 기간 동안 실제로 그가 그랬듯이) "원칙적으로" 세계에 관한 모든 지식은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정확히 어떤 원칙을 가리키고 있는지 묻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이다. 포더는, 누군가가 인식적 허세를 상기시킬 수 있다면, 물리학자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 생물학 등을 물리학으로 환원하기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탐색을 추구함에 있어서 지침이 될 "원칙"―그저 실제적인 시간과 계산의 한계에 의해 부과된 쟁점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쟁점―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듯 보인다. 비유를 제시하기 위해, 적절한 양의 시간과 에너지가 주어지면 나는 알려진 가장 큰 소수의 모든 자리수를 나열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빌어먹을 것의 자리수의 개수는 12,978,189개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내가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 진술에 대해 그 어떤 원칙적인 반대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대신에 내가 소수가 무한히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이 최소한 그런 증명의 개요(그런데 현존한다)라도 내게 요청하는 것은 전적으로 정당할 것이고, 여러분은 내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소수 집합에 어떤 한계가 있어야 하는 그 어떤 이유도 나는 알지 못한다는 취지의 그 어떤 모호한 태도에 대해서도 확실히 만족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궁극적인 이론적 환원의 불가능성이라는 관념과 그것으로 인한 과학의 근본적인 비통일성(존재론적 견지가 아니라 이론적 견지에서)이라는 관념을 진지하게 고려할 어떤 뚜렷한 이유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낸시 카드라이트가 지니고 있다(<<표상하기와 개입하기(Representing and Intervening)>>에서 예증되듯이, 이언 해킹도 그렇다). 카트라이트는 과학철학에서 자연의 법칙들은 사물들, 특히 입자들(또는 장들,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의 거동에 대한 (근사적으로) 참인 일반화된 서술이라는 표준적인 관념―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보편적이고,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약간 인기 있는―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하는 이론 반실재론으로 알려져 있는 견해를 제시했다. 오히려 카트라이트는 이론이란 사물들(또는 입자들, 또는 장들)이 실재에 대한 이상화된 모형들에 따라 어떻게 거동할 것인지에 관한 진술이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대단한 것인가? 실재에 대한 우리의 이상화된 모형들은 참이 아니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의 법칙들은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는 지지했고 홉스와 갈릴레오는 반대했던 이래로 자연의 법칙들이라는 관념 전체(특히 애초에 문자 그대로 법칙 부여자의 현존에 대한 함의를 품었던)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에 반대하기로 결정할지라도 카트라이트의 꽤 급진적인 주장은 얼마간 경청할 자격이 있다(이 점에 대해 나는 공감하는 불가지론자라고 시인한다).

 

카트라이트는 법칙들에 관한 두 가지 사유 방식을 구별짓는다. "근본적인" 법칙들은 실재론자들에 의해 가정되는 법칙들이고, 그것들은 우주의 참된 심원한 구조를 서술하도록 되어 있다. 반면에 "현상학적" 법칙들은 경험적 예측을 제시하는 데 유용하고, 그것들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는 충분히 잘 작동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참이 아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도 카트라이트의 견해에 동의할 많은 사례들이 있다. 뉴턴 역학의 법칙들을 고려하자. 그것들은 (어떤 적용 범위 내에서) 경험적 예측에 대해 충분히 잘 작동하지만, 그것들을 참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참이 아니라는 것(그것들은 제한된 적용 영역을 갖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을 알고 있다. 카트라이트에 따르면, 물리학뿐 아니라 "특수" 과학들의 모든 법칙과 과학적 일반화들은 그것과 꼭 마찬가지로 현상학적이다.

 

우스운 일은 카트라이트의 주장을 어느 정도는 뒷받침하는 듯 보이는 물리학자들―예를 들면, 리 스몰린(Lee Smolin)―이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의 문제점(The Trouble with Physics)>>이라는 유쾌한 책에서 스몰린은 매우 높은 에너지에서 특수 상대성이 "붕괴된다"고 추정할 경험적으로 흥미로운 이유들이 있다고 추측하는데(그렇다, 그 당시에는 거의 추측이었다), 이것은 특수 상대성이 "근본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오직 "현상학적인" 의미에서 자연의 법칙일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또한 스몰린은 매우 거대한 우주론적 규모에서 일반 상대성이 붕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물론 더 쉬운 사례들이 있다. 앞에서 내가 언급했듯이, 예를 들면, 자연 선택 이론, 또는 경제 이론들을, 기초 물리학은 말할 것도 없이, 각각 생물학과 경제학의 층위 아래에 놓여 있는 어떤 것으로 어떻게 환원하기 시작해야 할지에 관한 어떤 단서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카트라이트가 옳다면, 과학은 근본적으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그래서 그것의 목적 자체가 만물 이론을 추구하는 것에서 국소적인 현상학적 이론과 법칙들―물론 이것들 각각은 자체의 적절한 적용 영역에 의해 특징지워질 것이다―을 가장 잘 짜깁기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카트라이트는 스스로 특히 물리학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양자 이론도 고전 이론도 그것들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정확한 서술을 제공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어떤 상황들은 양자 서술을 필요로 하고, 어떤 상황들은 고전 서술을 필요로 하며, 어떤 상황들은 두 서술의 혼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특수 과학들에서 비롯되는 모든 이론들을 포함하는 과학적 이론들의 완전한 앙상블의 경우에는 더욱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그 중에서도 뒤프레, 포더, 해킹 그리고 카트라이트가 옳은가? 나는 알지 못하지만, 과학의 본성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관념들을 즉각적으로 일축하지 않은 채 진지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미 실용적인 인식적 시각에서 환원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했으며, 비통일성이 결코 인식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최소한 향유할 좋은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존재론적 환원이라는 관념에 동의한 것도 참이지만, 앞에서 나는 존재론적 환원과 이론적 환원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연결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세계가 한 종류의 질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계를 서술하고 이해하는 근본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한 가지 방식이 있어야 한다고 단순히 가정하는 것은 대단히 의심스러운 (인식적) 신념의 도약이라고 주장했다. 사실상 역설적으로 자신의 논변을 강화하기 위해 경험주의의 외피를 요구하는 것은 반실재론자들이다. 입수 가능한 증거는 궁극적인 이론적 환원이라는 관념에 반하고(대부분의 경우에 이루어질 수 없으며, 환원될 이론들의 수는 여태까지 이루어진 성공적인 환원들의 수보다 점점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튼 그런 증거가 대단히 오도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부풀려진 것(즉,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자신이 형이상학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