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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퀑탱 뤼앙: 오늘의 에세이-양자 역학과 과학적 실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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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6.

 

양자 역학과 과학적 실재론

Quantum mechanics and scientific realism

 

퀑탱 뤼앙(Quentin Ruyant)

 

철학의 주요한 과업들 가운데 하나는 개념적 문제들을 분명히 하여 이런 문제들에 대한 가능한 해답들의 풍경을 소묘하는 것이다. 물론 개별 철학자들은 흔히 특정한 입장들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지만, 공동체의 층위에서 출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한 것들의 풍경이다.

 

예를 들어, 과학적 실재론의 문제를 고려하자. 과학적 이론들의 지위는 무엇인가?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실재에 대한 서술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또는 그것들은 오히려 예측적 장치, 실재와 상호작용하기 위한 도구인가? 또는 그것들은 사회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이루어진 철학적 논의들에서 출현한 이 문제의 틀을 구성하는 표준적인 방식은 그 문제를 세 가지 구별되는 의문들로 분해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의문: 과학적 탐구 대상인 자연은 그것에 관한 우리의 관념과 관측들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 관념론자와 급진적 구성주의자들은 그것을 부인할 것이다.

 

의미론적 의문: 이론을 참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론은 문자 그대로 자연에 관한 서술인가? 언어(형식 언어나 수학적 모형들을 포함하는)와 자연의 근본적인 구성 사이에는 직접적인 대응 관계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이론적 진술의 의미는 검증의 조건으로 환원되는가? 도구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후자의 견해를 채택할 것이다.

 

인식적 의문: 우리는 우리 이론들이 최소한 근사적으로 참이라고 알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는가? 경험주의자들은, 우리 이론들이 관측 가능한 현상의 층위에서 검증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감히 말하는 한에 있어서, 그런 경험적 확증으로 그것들이 (아마도 표현되지 않은)  대안적 이론들보다 도대체 더 참이라고 알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실재론은, 실재는 마음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우리 이론들은 문자 그대로(근사적일지라도) 실재에 관한 서술이며, 우리는 그것들이 참이라고 알 수 있는 처지에 놓여 있다는 입장이다.

 

또한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개념적 풍경은 각 입장에 대한 찬반 주장으로 구성된다. 오늘날 과학적 실재론의 의미론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명제는 흔히 과학자들에 의해 수용된다(최소한 분석철학적 전통에서는). 인식적 측면만이 여전히 논의되고 있다.

 

예전에 퍼트넘(Putnam)에 의해 표현된, 과학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주요한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실재론이 과학의 예측적 성공을 기적으로 만들지 않는 유일한 입장이라는 것이다. 요점은, 반실재론자들은 과학의 인상적인 성공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반면에 실재론자들은 한 가지 단순한 설명―우리 이론들은 실재를 올바르게 서술하기 때문에 작동한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과학적 실재론에 반대하는 주요한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비관주의적 메타 귀납이다. 과거의 폐기된 이론들은 결국 틀렸고(뉴턴이 생각했었던 대로의 중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상대성 이론에 따라 시공간의 변형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현대의 이론들도 궁극적으로 다른 이론들로 대체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의 진리성을 믿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몇몇 사람들은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에 타협을 모색했는데, 실재론을 이론 변화에 있어서 유지된다고 하는 이론들의 구조적 내용(존재자들 자체라기보다 존재자들 사이의 합법칙적 관계들)에 한정함으로써 비관주의적 귀납의 문제를 충족시킨다. 따라서 그런 입장은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다른 사람들은 실재론을 우리가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구체적인 존재자들에 한정하기를 바란다. 이것은 존재자 실재론(entity realism)으로 불린다.

 

도구주의와 양자 역학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논쟁에 있어서 대부분의 주장들은 사실상 인식적인 것인데, 그것들은 과학적 지식 일반과 관련되어 있다. 때때로 예시의 목적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과학적 이론들의 실제 내용에 관한 세부에 너무 깊이 진입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옹호하고 싶은 주장은, 오히려 이런 논의들에서 과학적 이론들의 특정한 내용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특히 한 이론, 즉 양자 역학이 과학적 실재론에 심각한 위협을 제기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어떤 직접적인 "문자 그대로의" 해석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것이 옳다면, 과학적 실재론은 지배력을 상실한다. 최선의 물리학적 이론들(실재의 가장 근본적인 층위들을 다루는 것으로 추정되는)에 대해 그런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과학적 이론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겠는가? 우리는 우리 이론들의 의미에 관한 더 온건한 관념으로 돌아가서 우리 표상들의 지위에 대한 더 겸손한 견해를 수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결국 모형과 실재 사이의 엄밀한 대응 관계를 포기하는 한편으로 실재론에 필요한 것들의 일부를 여전히 수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나는 양자 역학과 도구주의 사이에 오랫동안 유지된 관계에 관해 한 마디 언급할 것이다. 양자 역학은, 상이한 형태들의 도구주의(예를 들면, 검증주의적 의미론을 통해서 앞에서 언급한 의미론적 명제을 부인하는 것)가 지배적이었던 시기에 개발되었다. 또한 그 시기는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강한 지성적 관계들을 향유하던 시기였다. 1920년대에 유명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비엔나 서클에서 모였다. 그 서클은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를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과학 철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철학적 운동이었다. 도구주의는 20세기 중에 논리경험주의가 사망한 이후에 사라졌다. 도구주의적 입장들은 그 운동의 내부와 외부에서 제기되었지만, 원칙적으로 언어 철학에서 제기된 강력한 논증들의 공격을 받았다. 그렇지만, 양자 역학은 남게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시작된, 일부 현업 과학자들 사이에서 "입 닥치고 계산하라"라는 악명 높은 사유 학파에 의해 예시되듯이, 이른바 철학적 해석의 고아가 되었다.

 

실재론자에게 불행하게도, 양자 역학의 기묘함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이론이 더 나은 이론으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양자 역학과 상대성 이론을 융합한 표준 양자 장 이론과 마찬가지로, 양자 역학은 확실히 중력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의 계승자가 그것의 당혹스러운 양상들 대부분을 공유할 것이라는 강한 표식들이 존재한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벨의 정리(Bell's theorem)에 의해 다루어지는데, 그 정리는 대체로 양자 역학 이론 자체와는 독립적이지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소수의 경험적 원리들에 의존한다. 어떤 국소적인 실재론적 이론도 관찰된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는 그 정리의 기묘한 결과는 1982년 아스페(Aspect)의 실험 같은 실험들에 의해 잘 확증되었다. 미래의 어떤 이론도 이 결과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양자 역학 창시자들의 강한 도구주의적 입장이 없었다면 그 이론은 개발될 수 없었을 것이고, 그 이론의 경험적 성공은 철학자들의 현재 지배적인 실재론과 그 이론의 거의 내장된 도구주의 사이의 타협을 요구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양자 역학을 실재론과 화해시키려는 시도들이 존재하지만, 나는 그것들이 심각한 난제들에 직면하여 수용할 수 없는 결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행로가 바람직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에세이의 목적은 대단히 야심만만한 목표인 이런 대안적 행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더 온건하게 나는 양자 역학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들을 표명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난제들을 제시할 뿐이다.

 

측정 문제

 

양자 역학에 대한 실재론적 해석들이 직면하게 되는 두 가지 주요한 난제들이 존재한다. 첫째는 측정 문제이고, 둘째는 지시 문제이다.

 

측정 문제는 그 쟁점을 분명히 하는 데 있어서 철학자들이 자기 일을 제대로 해낸 한 분야이다. 표준 양자 역학(나는 양자 장 이론은 언급하지 않을 것이지만,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에서 체계는 파동함수로 서술된다. 어떤 체계에 대해 상이한 특성들―그것의 위치, 운동량, 스핀―이 측정될 수 있다. 파동함수는, 느슨히 말하자면, 복합적 체계의 경우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고 그 체계의 개별적 부분들에 대한 측정들의 모든 조합을 비롯하여 이런 특성들에 대한 모든 가능한 측정 결과들 사이에 나타나는 상관관계들을 서술하는 수학적 구조물이다. 파동함수는 모든 복잡한 측정 가능성들을 부호화하지만 모든 측정들이 양립 가능하여 동시에 수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자(비유적으로, 어떤 3차원 객체에 대한 모든 가능한 2차원 투영도들을 부호화하지만, 한 번에 단 하나의 투영도만 나타날 수 있는 3차원 객체를 생각하자). 과학자들은 어떤 체계를 측정하는 이런 복잡한 가능한 방식들을 "관측 가능량(observable)"이라고 부른다.

 

파동함수는 어떤 선형 방정식, 즉 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진화한다. 어떤 관측 가능량에 대한 가능한 결과와 관련된 계수는 복소수(무게와 위상)인데, 그것은 가능한 결과들이, 최소한 측정되지 않을 때에는, 서로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주어진 2차원 투영도에서 객체의 부분들이 파괴적이거나 건설적인 방식으로 겹치고 간섭하는 것을 상상하라).

 

이런 수학적 모형에 덧붙여, 보른 규칙(Born rule)은 그 모형으로부터 특정한 결과 확률들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말해준다. 이것은 확률을 얻기 위해 파동함수를 가능한 결과들 가운데 단 하나에 투영하는 것에 해당하는데, 그 확률은 해당하는 계수로부터 계산된다.

 

문제는 이렇다. 실재론이 표준 양자 역학에 대해 참이라면, 그 이론에 의해 서술되는 대로의 실재는 어떤 체계에 대한 모든 가능한 측정들의 모든 가능한 결과들을 부호화하는 파동함수이지만, 그 이론을 시험하는 경험적 실재는 특정한 관측 가능량들에 대한 한정된 측정 결과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형과 경험적 실재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보른 규칙에 의해 메꿔지지만, 보른 규칙은 물리적 모형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객체도 아니고,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과정도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규칙일 뿐이다. 또한 그것은 체계를 측정하는 방식에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데, 파동함수를 실재하는 기저의 상태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서술하는 인식적 객체일 뿐이라고 해석하자. 그것은 결국 고전 물리학에서 확률들이 일반적으로 해석된 방식인데, 즉 우리의 무지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파동함수는 가능한 상태들의 중첩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가능한 상태들로의 분해는 관측 가능량에 의존한다. 체계는 자체가 어떻게 관측될 것인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을까? 또한 측정되지 않는 어떤 관측 가능량의 "가능한 상태들"은 서로 간섭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최소한 통계적으로, 마침내 측정되는 관측 가능량에 대한 최공 결과에 잠재적으로 기여한다. 그것들이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것들이 모두 존재한다면, 우리는 왜 그것들의 중첩이 아니라 한정된 결과들을 항상 관측하는가? 측정 과정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내가 말했듯이, 철학자들은 문제를 분명히 하는 위대한 작업을 수행했는데, 그것의 표현들 가운데 하나[모들린(Maudlin)에서 택한]는 다음과 같이 트릴레마(trilemma), 즉 모두가 한꺼번에 수용될 수는 없는 세 가지 명제로 주어진다.

 

파동함수는 어떤 체계의 상태에 대한 완전한 서술이다

 

파동함수는 선형 동역학(슈뢰딩거 방정식)에 따라 진화한다

 

모든 측정은 한정된 결과를 갖는다

 

(1)의 결과로, 어떤 관측 가능량에 대해서도, 어떤 체계는 어떤 "상태들의 중첩"으로 간주될 수 있다. (2)의 결과로, 한 상태들의 중첩은 반드시 다른 한 상태들의 중첩으로 진화할 것이고, 어떤 물리적 "투영"도 존재하지 않는다. (1)과 (2)를 수용하여 어떤 체계와 결합된 어떤 측정 장치의 상태를 어떤 복합 파동함수로 서술하자. 측정 장치 역시 결국은 물리적 체계이다. 어떤 실험 끝에 체계 + 장치는 어떤 상태들의 중첩에 있을 것인데, (3)에 모순되게도 그 실험은 한정된 결과를 갖지 못한다.

 

그 논증의 논리적 결론은 우리가 세 가지 명제들 가운데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측정 문제이다.

 

실재론적 해결책에 대한 전망

 

이런 표현의 한 가지 이점은, 그것이 그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들을 분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기술적 세부 내용을 너무 많이 다루지 않을 것이지만, 어떤 해결책도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다.

 

(1) 또는 (2)를 거부하는 것은 양자 역학 이론을 부가적 구조로 완결하는 것을 포함한다.

 

봄(Bohm) 역학이 가장 보수적인 움직임이다. 봄 역학은, 고전 물리학의 경우와 꼭 마찬가지로, 파동함수 이외에도 단속적인(그리고 인과적으로 근거 없는) 입자들을 가정함으로써 (1)을 거부한다. 그것은 결정론을 복원시키지만, 순간적인 원격 상호작용들을 가정해야 하고, 그래서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을 조화시키는 데 덜 적합할 것이다(상대성은 비국소성 및 동시성과 악명 높게도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유형의 해결책들에서 다른 한 가능성은 반 프라센(van Fraassen)에 의해 처음 제안된 양상 해석들(modal interpretations)로 시행되는데, 그것은 어떤 시점에도 한정된 상태가 존재하는(그리고 궁국적으로 측정되는 관측 가능량과 일치해야 하는) 어떤 특권적인 동적인 관측 가능량으로 양자 역학 이론을 완결한다. 봄 역학은 사실상 특권적인 관측 가능량이 정적이며 항상 위치인 양상 해석으로 판독될 수 있다. 또한 양상 해석들은 절대적 동시성이라는 관념을 필요로 하는데, 비국소적 체계의 상태는 구성상 특수한 순간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것들은 상대성 이론과 조화시키기 어렵다.

 

이런 이론들은 모두 비경험적 목적을 위해, 즉 우리의 실재론적 추정들을 구하기 위해 부가적인 수학적 구조를 가정한다. 거의 틀림없이, 이것은 우리가 피하고 싶어할 "형이상학에 의한 과학 길들이기"에 대한 사례이다. 지불해야 할 더 구체적인 대가는 이런 부가적 구조들을 상대성 이론과 조화시키고 이런 이론들의 정합적인 양자 장 판본들을 공식화하는 데 있어서의 난점들에 놓여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이론들은 물리학자들에 의해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어쨌든, 부가적 구조를 가정하는 한 그것들은 양자 역학에 대한 직접적인 문자 그대로의 독법으로 간주될 수 없는데, 그것들은 별개의 이론들이다.

 

(3)을 거부하는 것은 명백히 터무니 없는 듯 보이는데, 양자 이론에 대한 바로 그 시험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험적 결과들이 어떻게 한정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버렛(Everett)에 의해 제안된 해결책은 그것들을 관찰자에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 착상은, 우주의 파동함수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갈래들로 진화하며(결풀림 이론에 의해 설명된다), 실험들은 그 갈래들 가운데 하나의 갈래―그곳에서 경험적 결과들은 한정적인 듯 보인다―에 처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각 측정 결과는 별개의 갈래에서 예화된다. 이 제안에서 여러 마음 해석(many-mind interpretation)과 다세계 해석(many-world interpretation)이 비롯된다.

 

그 움직임은 잠정적인데, 어떤 상식적 직관들을 버리고 수조 개의 접근할 수 없는 대안적 세계들이 밀리초 당 예화된다는 점을 수용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부가적 구조라는 비용을 치르지 않은 채 실재론적 이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대안적으로 우리는, 우주를 물리적으로 가능한 모든 세계들과 그것들의 완전한 진화들의 상호관련된 집합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인데, 우리의 순간적 자아들 각각은 이런 거대한 블록 우주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악마는 세부에 존재한다. 여러 마음 해석은 이원론과 부대 현상론(epiphenomenalism)에 대한 문제적인 신념과 함께 매우 이상한 존재론(갈라지는 갈래들의 결과로 어느 순간에도 무한히 많은 마음들이 우리의 각 분신에 거주한다)을 수반한다. 다세계 해석은 확률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데, 모든 결과들이 똑같이 실재적이라면 왜 확률에 관해 말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무지 확률을 환기할 수 없는데, 우리가 무지하다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결과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게다가 왜 보른 규칙인가? 모든 결과는 동일한 확률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확률을 인식적 행위자들에 대한 합리적 제약에 정초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있다[물리학자 도이치(Deutsch)에 의해 제안되었고 철학자 월리스(Wallace)에 의해 개선되었다]. 확률은 주관적이고 미래 결과에 대한 예상에 해당할 것이다. 보른 규칙은 양자 상태들에 대한 확률 할당에 부과되는 어떤 대칭적 제약을 만족하는 유일한 규칙으로 정정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해결책들이 성공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상은 과거의 경험적 결과들에 기반을 두지만, 확률에 관한 더 강건한 관념(다중 우주에서 통계적 분포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 없다면 과거의 경험적 결과들이 우주 전체를 표상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론이 참이라면, 우리는 양자 이론이 참이라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는 듯 보인다. 어쨌든, 우리의 모든 미래적 자아들이 똑같이 현존한다면 우리는 정말 무엇에 대해 기꺼이 예상할 것인가? 우리는 왜 신경쓰야 하는가? 합리성 제약은 필경 규범적 측면을 지니고 있지만(그것은 심리학적 법칙들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준다), 여기서 정확히 핵심은 무엇인가?

 

또한 다세계 해석은 결풀림을 필요로 하지만, 결풀림 이론 역시 확률에 대한 더 강건한 해석에 의존한다. 그것은 체계와 환경 사이의 구별짓기도 전제하지만, 우주 전체는 환경이 있는가?

 

지시의 문제

 

측정 문제는 충분히 논의되었다. 실재론적 이론들이 직면하는 또 하나의 난제가 있는데, 그것은 지시의 문제이다.

 

과학적 실재론의 의미론적 명제의 결과로, 수학적 모형들과 실재적 존재자들 사이에 대응 관계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되듯이, 파동함수는 실재적 존재자들에 쉽게 대응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구조가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그림을 우리의 일상 경험과 연결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고전 물리학의 전자기장을 고려하자. 그것은 시공간의 모든 위치에 벡터들을 할당한다. 그 객체는 표현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저 어떤 벡터는 어떤 특정한 위치에서 장이 나타내는 어떤 종류의 특성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파동함수는 어떤 종류의 객체인가? 하나의 장으로 해석될 때 파동함수는 시공간 점들에 특정한 특성들을 할당하지 않는데, 그것은 거의 무한한 차원의 추상적인 수학적 공간[배위 공간(configuration space)으로 불리는]에 거주한다. 전통적으로 이런 수학적 차원들은 상이한 입자들의 자유도로 해석된다. 괜찮지만, 그것은 파동함수 이외에 입자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다세계 해석 또는 GRW 이론이나 CSL 이론의 결과로, 파동함수를 자율적 객체로, "저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싶다면 어쩔 것인가? 무한히 많은 자유도를 지닌 어떤 객체에 대한 이런 추상적인 표현으로부터 "세계에 대한 현시적 이미지"―우리 이론들에 대한 경험적 시험들이 수행되는, 보통의 객체들로 가득찬 친숙한 3+1 차원 시공간―를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일부 저자들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참아낼 각오를 하고 우리의 친숙한 시공간이 아무튼 배위 공간에서 창발된다고 바라지만, 많은 사람들이 문제가 있으며, 어떤 물리적 이론은 시공간에 무엇이 현존하는지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가능한 해결책은 파동함수를 구체적 객체라기보다 자연 법칙 또는 성향과 유사한 "법칙적(nomic)" 존재자로 간주하고, 통상적인 시공간에서 이런 성향들의 담지자들 또는 이런 법칙들의 추종자들을 서술하는 부가적 구조를 갖춘 이론을 보충하는 것이다. 봄 역학은 이미 그런 목적을 위해 입자들을 갖고 있다. GRW 이론에 대한 제안들은 "명멸" 또는 물질 밀도 장으로도 알려져 있는, 붕괴가 일어나는 특이한 시공간 점들을 포함한다. 이런 부가적 구조는 아무 근거도 없으며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기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자. 또 다시 우리는 과학적 이론들을 우리의 형이상학적 편견들의 주형에 강제로 맞추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파동함수를 법칙으로 간주하는 것은 거의 말이 되지 않는데, 자연 법칙들은 공간과 시간에 걸쳐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파동함수를 성향으로 간주하기도 어려운데, 파동함수는 비국소적 객체이고, 그래서 이런 성향은 국소적 담지자에 직접 할당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그런 성향은 "물질의 배치"에 할당되어야 한다. 결국 우리에게는 진화하는 우주의 성향을 표현할 거대한 추상적 구조가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매혹적이지 않다.

 

요약하면, 이런 이론들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파동함수가 없을 수가 없는데, 그것이 이른바 모든 예측적 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파동함수의 존재론적 지위와 그것이 우리 경험의 통상적 객체들과 관련되어 있는 방식은 아무튼 여전히 모호하다.

 

다른 해석들

 

여태까지 진행된 논의의 틀은 실재론적인 것이었다. 지시의 문제는 양자 이론의 구조가 실재적 존재자들에 대응해야 한다는 실재론적 신념에서 직접 비롯되며, 측정 문제의 명확한 표현에 함축된 것은 파동함수가 시간에 따라 진화하는 상태(완전한 상태가 아닐지라도)를 서술한다는 점이다.

 

이제 반실재론적 해석 몇 가지에 관해 언급하자. 현대 물리학자들은 양자 역학에 대한 올바른 해석에 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실재론자이고 다세계 해석을 명시적으로 옹호한다(예를 들면 캐럴). 일부는 암묵적인 붕괴 해석을 품고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 해석도 갖고 있지 않으며(앞에서 언급된 "입 닥치고 계산하라" 학파), 또는 모호한 코페하겐 해석(대충, 고전적 객체들에 대해서는 실재론, 양자 상태에 대해서는 도구주의를 견지한다)이나 더 정교한 정합적 역사 접근 방식을 고수한다. 어쨌든, 명료하게 표명된 존재론적 해석을 갖는 것이 모든 물리학자들에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실제적 목적을 위해서는 도구주의가 완전히 괜찮은 듯 보인다. 뉴턴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자신의 이론적 성찰의 근저에 놓여 있는 강한 형이상학적 견해를 고수하는 유력한 과학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실재론과 관련된 의문은 오히려 철학적인 쟁점이다. 이것은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에게도 그럴 것이지만, 그것은 또 다른 주제이다.

 

물론, 도구주의의 직접적인 편익은 그것이 앞에서 언급된 문제들을 그냥 회피한다는 점이다. 요구되는 전부는 이론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도구적 관점에서 양자 역학의 불가사의들을 조명하는 더 미묘한 방식들이 존재한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양자 역학을 하나의 정보 이론 또는 일반화된 확률 이론(대충 고전 논리학을 수정하는 것에 해당한다)으로 간주하는 것이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특히 양자 계산 분야에서 그랬다. 가장 정교한 제안들에는 양자 베이즈주의, 즉 큐비즘이 포함된다. 이것은 분명히 반실재론적 움직임이다(베이즈주의는 주관적 확률 이론이다). 이런 견해들에 따르면, 파동함수는 인식적 존재자이다. 그것은 실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서술한다. 이런 이론들이 말하는 전부는 물리적인 것에 관한 우리 추론들은 반직관적인 논리적 규칙, 즉 양자 논리학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능성은 반실재론적으로 변형된(그리고 여러 세계가 없는) 에버렛의 상대적인 상태 공식화를 채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학자 로벨리(Rovelli)에 의해 제안된 관계적 해석인데, 파동함수는 객관적 상태가 아니라, 물리적 관찰자(물리적 체계라면 무엇이든 간에)와 관찰된 체계 사이의 관계를 서술한다고 주장한다. 객관적인 "초월적 견해(view from nowhere)"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비슷한 시도들이 파동함수를 준거틀로 상대화한다. 이런 취지에서 원근법적 양상 해석들도 존재하는데, 이것들은 상대성 이론과 표준적인 양태 해석들 사이의 양립 가능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이런 종류들의 견해는 정신에 있어서 사실상 상대론적인데, 물리적 관찰자에 대한 모든 물리적 상태들의 상대화(시공간 좌표들의 상대화만이 아니라)를 통해서 그것들은 상대성 이론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크레이머(Cramer)에 의해 제한된 교류적 해석(transactional interpretation)은 측정이란 방출자와 수용자 사이의 교류라고 가정한다. 교류는 지연 파동(retarded wave, 시간에 순행하는 파동)과 전진 파동(advanced wave, 시간에 역행하는 파동으로서 물리학자들에 의해 전통적으로 "비물리적인" 것으로 기각되는 파동)의 조합을 포함한다. 그 해석은 가상 시간 속 서사를 제안하는데, 지연 파동들이 방출자들에 의해 흡수자들로 제공되고 흡수자들은 전진 파동으로 응대한다. 한 흡수자가 선택되고 한 교류가 일어난다. 그 해석은 형식 체계로부터 멋지고 우아한 방식으로 보른 규칙을 끌어낸다. 나는 그것을 실재론적 해석으로 분류하지 않았는데, 교류가 결코 물리적 과정이 아니고, 시공간에서 일어나지 않으며, 때때로 어떤 종류의 지작적 관계라고 하기 때문이다. 관계적 양상(교류)을 강조하는 이 해석은 관계적 해석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제안들에 얼마간 공감하는데, 특히 그것들이 실재론적 성분을 유지하고 우리를 억지로 철저한 관념론으로 복귀시키지 않을 때 그렇다. 그런데 그것들도 난제들에 직면하고, 그래서 완전히 정합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명시적인 이론들을 얻기 위해서는 해야 될 작업이 남아 있다. 그것들도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인식론적 논쟁의 일부를 이루는 더 일반적인 논증들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결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내게는 과학의 인식론에서 과학적 실재론에 관한 논쟁들이 과학적 이론들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듯 보인다. 양자 역학의 경우에, 문제는 그 이론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없는 문자 그래로의 해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운 것은 사실상 도구주의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어떤 모형으로부터 결과 확률들을 계산하기 위해 어떤 수학적 규칙을 적용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매우 실재론적이지 않다. 거의 틀림없이, 다른 모든 해석들(많은 옹호자들에게 실례지만, 다세계 해석을 포함하여)은 양자 이론 위에 덧씌우진 추측들이다. 게다가, 모든 해석들이 난점들을 만나는데, 어떤 예측적 역할도 수행하지 않으며 상대성 이론과의 양립 가능성을 위협하는 임시방편적인 구조로 양자 이론을 완결하거나, 아니면 확률의 해석에 있어서 개념적 문제들을 직면하게 된다(아니면 의심스러운 여러 마음 존재론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어쨌든, 파동함수의 존재론적 지위는 여전히 꽤 모호하다. 오늘날까지 어떤 해결책도 전적으로 만족스럽지는 않다.

 

우리가 시작한 인식론적 논쟁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일한 경험적 데이터에 부합되며 더 자연적이거나 직접적이지 않는, 하나 이상의 가능한 형이상학적 해석 또는 이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점을 인식하자. 이것은 사실상 양자 역학에 관한 과학적 실재론의 기반을 약화시키는데, 우리는 어떤 해석 또는 이론에 관해 실재론적이어야 하는가? 아마도 미래의 발전이 이런 실재론적 해석이 저런 실재론적 해석보다 올바른 것이라고 모든 사람에게 납득시킬 것이지만, 당분간 나는 전망이 매우 좋지는 않다고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반실재론적 해석들은 어떠한가? 양자 역학의 드러난 내용이 실재에 "대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직접적인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진리 대응설을 수정하고 과학적 이론들에 대한 더 실용적인 태도를 채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확실히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 최소한 과학적 실재론의 요구 사항들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합당하다. 난제는, 도구주의에 대한 표준적인 반대들(특히 "기적 불가 논증", 그런데 의미론적 논증들도 있다)의 먹이가 되지 않으면서 "세계에 대한 현시적 이미지", 즉 낮은 차원의 시공간에서 거시적 규모의 객관적 상태들이 존재한다는 상식적 직관을 복원하는 입장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이 모든 것은 코펜하겐 해석의 모호함이 없어야 한다. 우리 앞에 이런 난제들이 존재할 때, 많은 저자들이 이런저런 실재론적 해석을 수용하기를 선호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래도 여전히 낙관주의를 유지하자. 양자 역학은 기묘하고, 우리는 그것의 기묘함을 제거하지 못할 것인데, 이것은 해야 할 정말로 흥미로운 철학적 작업이 많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