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객체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인용-범생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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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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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이론에서는 항상 언어와의 투쟁이 존재한다. 신조어들이 가끔 만들어지지만, 오히려 규범은 술어들이 일상적 언어에서 입수되어 다른 용법을 부여받는다. 여기에는 항상 위험이 존재하는데, 그 술어들은 계속해서 일상적 언어의 함의들을 내포하지만, 또한 이론은 이런 함의들 가운데 일부를 단절하고 그 술어들을 새롭거나 다른 방향으로 정향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난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테고레인(kategorein)이라는 그리스 낱말을 택해서 이런 함의와는 전적으로 다르게 변화시켰다. 우리는 그의 청중이 얼마나 당혹스러워 했으며 "그런데 그것들은 비난이 아닙니다!" 같은 말들을 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다자인(Dasein)이라는 독일어 술어를 택하여 세계-내-존재라는 설명으로 변형시킨다. 이론적 언어는 일상적 언어를 적절한 용법과 부적절한 용법을 규정하는 규범적 권위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신에 일상적 언어에서 벗어나는 어떤 개념을 해방시키기 위해 그것이 던져진 언어와 투쟁한다[...]. 일상적 언어가 존재의 집이 아니라 억견(doxa)의 집이라면, 부분적으로 이론은 일상적 언어 속에 담겨 있는 억견에 맞서는 투쟁이다. 흔히 이론은 일상적 언어와의 이런 투쟁에서 패배한다. 억견은 전성기가 있으며 공통 함의들의 승리를 통해서 개념을 삼켜버린다. 그것이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다. 그런데 다른 길은 없다.

 

"생태(학)"이라는 술어의 경우에도 그렇다. 생태학은 지역적 존재론의 지위로 좌천되고, 그래서 기후, 환경 문제, 문학 속 자연 등에 관해 작업하는 철학자와 이론가들에게만 흥미로운 것이다. 일상적 언어에 따르면, 생태학은 자연, 환경, 기후 그리고 녹색인 것에 관한 탐구이다. 그러므로 정치, 지식의 본성, 과학, 예술, 윤리, 문학, 사회 등에 관심이 있는 이론가들은 생태학에 주목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연구 분야를 벗어난다.

 

그런데 생태학은 지역적 존재론, 즉 자연 또는 환경을 탐구하는 분과학문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확실히, 이런 사유 형태는 지금까지 그런 영역들에 유용하게 적용되었지만[...], 생태학은 자연에 관한 테제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에 관한 테제이다. 그리고, 물론, 존재는 "자연"과 문화, 의미와 물질, 사회와 환경, 마음과 세계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생태학의 존재론적 테제는 범생태적이다. 범생태주의는 존재가 철저히 생태적이라는 테제이다. 모든 것이 생태적이기 때문에 생태학은 하나의 연구 영역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사유 양식으로 규정되는데, 생태학은 공존함이라는 견지에서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사유 양식으로서 존재자들을 분리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상호작용하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으며, 무엇보다도 서로 접촉하는 조립체들에 거주하는 것으로서 탐구한다. 생태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분리된 별개의 존재자들의 견지에서가 아니라 체계와 상호작용들의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자가 관계와 상호작용들의 지평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그런 견지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생태는 좋은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데, 사실상 많은 생태들이 자체의 거주자들에게 거대한 고통을 초래할 정도로 소름끼치고 끔찍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생태는 공존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병을 유발하는 암, 억압적인 인종 차별주의자 등과 같은 공존하고 싶지 않은 존재자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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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